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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식탁 위의 책들 -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종이 위의 음식들
정은지 지음 / 앨리스 / 2012년 4월
평점 :
어떤 책들은 줄거리보다 음식으로 더 강렬하게 기억되곤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 하면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굴튀김과 시원하고 알싸한 맛의 생맥주가 떠오르고,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하면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하여 쉴틈 없이 구워지는 케이크와 빵이, 에쿠니 가오리의 <부드러운 양상추> 하면 추운 겨울 외국에서 혼자 먹는 도넛과 뜨거운 커피의 맛이 연상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 <내 식탁 위의 책들>이 무척 마음에 들 것이다. 어릴 때부터 먹는 이야기에 유난히 집착했다는 저자 정은지는 이 책에서 그 이력을 살려 <빨간 머리 앤>, <작은 아씨들> 등 어린이, 청소년 대상의 동화부터 <수레바퀴 아래서>, <장미의 이름> 등 성인 대상의 소설, <먼 북소리>, <토토의 창가>등 에세이까지 전세계의 수많은 책에 등장한 음식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냈다.
에이미네 학굥에서 라임은 단순한 주전부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화폐고 신분의 상징이었다. 아이들은 소금에 절인 라임을 연필, 구슬 반지, 종이인형과 교환했다. 좋아하는 아이와는 나눠먹고, 싫어하는 아이 앞에서는 약을 올렸다. ... 라임을 가져온 아침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에이미의 위신은, 라임을 창가에 내버리며 덩달아 곤두박질쳤다. (p.77)
이 책에서 어렸을 때 재미있게 읽은 <작은 아씨들>의 한 장면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하도 옛날에 읽어서 전체적인 줄거리만 기억날 뿐 세부적인 에피소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에이미의 '라임피클 사건'만큼은 기억이 난다. 제대로 본 적도 없거니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과일, 라임. 새콤달콤하다는 것으로 봤을 때 귤이나 오렌지, 레몬과 비슷한 맛이 아닐까 짐작할 뿐, 어린 나에게는 라임을 먹어볼 방법도, 어떻게 생긴 과일인지 찾아볼 방법도 없었다. 저자도 그게 궁금했다니, 반갑기 그지없다.
수도원장은 양측을 화합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으로 피에몬테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의 요리를 준비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게 블러드푸딩이다. 블러드푸딩은 돼지 피에 비계, 빵, 고구마, 양파, 보리, 귀리 등을 섞어 굳힌 것이다. 그냥 차갑게도 먹고, 튀기거나 굽거나 데워서 내기도 한다. 원장이 이탈리아식 블러드푸딩 산구이나초로 유명한 프리울리 지방을 젖혀 두고 몬테카시노풍 블러드푸딩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몬테카시노야말로 529년 성 베네딕트가 첫 번째 수도원을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p.132)
그런가 하면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에 이런 음식이 나왔던가 싶은 대목도 있었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줄거리는 기억이 나는데 블러드푸딩이라는 음식이 나왔는지는커녕 수도원장이 성찬을 대접하는 장면이 있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젤리처럼 부드러운 식감의 디저트로 유명한 푸딩이 원래는 소시지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지금처럼 달콤한 부딩이 등장한 것은 불과 19세기. 당시로 봤을 때 블러드푸딩은 (이름은 무섭지만) 결코 해괴망측하거나 엽기적인 음식이 아니다.
내용도 좋지만 책의 만듦새가 좋아서 출판사를 봤더니 앨리스(아트북스)다. 같은 출판사에서 만든 밥장의 <밤의 인문학>도 책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이 책도 좋다. 앞으로 아트북스와 정은지 작가의 책을 눈여겨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