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 - 정여울과 함께 읽는 생텍쥐페리의 아포리즘
정여울 지음 / 홍익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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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을 때 인상적인 구절이 있으면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책장 귀퉁이를 살짝 접어놓고 책을 다 읽고 나서 한꺼번에 노트에 적는다. 이렇게 하면 책을 읽는 동안 흐름이 끊기지 않아 좋지만, 노트에 정리할 때 무슨 생각이나 느낌이 들어 표시한 건지 기억이 안 나 곤란한 경우가 종종 있다. (문제집이나 참고서가 아닌 한) 책에 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는 건 죄악시하는 성격이고. 


  책을 사랑하는 애서가(愛書家)들은 어떻게 책을 읽고 어떻게 읽은 내용을 정리할까.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을 읽으면서 저자 정여울의 독서법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생텍쥐페리의 명문장과 내가 나눈 대화록이다. 강연을 할 때마다 늘 받는 질문 두 가지가 있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나요?' '특별한 글쓰기 비법이 있나요?' 이 책이 그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를 바란다. 나에게 유일한 비결이 있다면 '잘 읽는 것'이다. (p.6) 

  이 책은 저자 정여울이 20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작품을 읽고 그중에서도 대표작인 <어린 왕자>, <인간의 대지>, <야간 비행>, <남방 우편기>에서 감명 깊게 읽은 구절을 골라 '아포리즘(aphorism)'의 형태로 소개한다. 아포리즘이란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금언 ·격언 ·경구 ·잠언 따위의 짧은 글'을 뜻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저자는 여기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담은 짧은 글을 덧붙여 마치 저자와 생텍쥐페리가 직접 만나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그림자 여행>, <헤세로 가는 길> 등 여러 권의 책과 베스트셀러를 쓴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 비결로 '잘 읽는 것'을 든다. 잘 읽는다는 것은 책을 그저 눈으로 훑는 것이 아니라 책 속으로 들어가 작가와 대화하고 때로는 하나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어린 왕자>를 읽으며 줄거리만 보지 말고 돈이나 물질 등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느라 마음의 눈으로 봐야 보이는 것을 보는 데에는 소홀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인간의 대지>를 읽으며 가족의 반대와 암울한 시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생텍쥐페리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너와 나의 다름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하고,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지성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타락하지 않는다. 때로는 '내가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하다니' 하고 혼자 우쭐해질 때도 있지만,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만나면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난 아직 멀었구나.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영혼은 한 뼘 자란다. 이런 깨달음은 주로 책을 읽을 때에 얻게 된다. 나에게 책은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만나는 내면의 극장이다. 책 속의 행간이 바로 영혼이 숨 쉬는 곳이다. 지은이와 대화할 수 있는 행간의 여백이 책 읽기의 눈부신 기쁨을 자아낸다. (pp.24-5) 


  이렇게 작가와 대화하며 읽는 책은 더 이상 흔해빠진 종이 뭉치가 아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만나는 내면의 극장'이 된다. 1월 한 달만 해도 벌써 이십 권 가까운 책을 읽었지만, 저자처럼 작가와 내밀한 대화를 하며 읽은 책은 몇 권이 되지 않는다. 읽기에 급급해 작가의 삶을 만나고 내 삶을 들여다볼 여유를 가지지 못한 게 부끄럽다.

 

 작년에 <헤세로 가는 길>을 읽고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만났듯이 이번엔 저자의 인도를 따라 생텍쥐페리의 책을 읽어볼 참인데, 이번엔 기필코 저자처럼 작품 속에 푹 빠져 작가와 대화하는 경지의 독서를 해보고 싶다. 생텍쥐페리는 나에게 어떤 말을 들려줄까. 매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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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 - 정여울과 함께 읽는 생텍쥐페리의 아포리즘
정여울 지음 / 홍익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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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가 감명깊게 읽은 책의 여백에 남긴 메모를 엿보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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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여자는 늙지 않는다 - 나이들수록 아름다운 프랑스 여자들의 비밀
미레유 길리아노 지음, 박미경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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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프랑스 여인처럼 먹어라>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프랑스 여인들은 다이어트를 심하게 하지도 않고 성형수술이나 지방 흡입 수술을 받지도 않으면서 젊어서는 물론이고 나이가 들어서도 아름다운 외모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걸로 유명하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 비결이 자세하게 나온다. 프랑스식 다이어트 열풍을 이끈 사람으로 작가 미레유 길리아노도 나온다. 미레유 길리아노는 적게 먹고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프랑스 여인들의 식사법과 생활습관을 소개하는 책을 써서 미국에서만 100만 부 이상 팔았다. 미레유 길리아노는 환갑이 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씬한 몸매와 완벽한 스타일링을 갖춰 많은 여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마침 레유 길리아노가 쓴 책 중에 <프랑스 여자는 늙지 않는다>가 번역되어 나왔길래 읽어보았다.


<프랑스 여자는 늙지 않는다>는 나이 들수록 아름다운 프랑스 여자들의 비결을 마음가짐, 스타일, 피부, 메이크업, 네일 스타일링, 운동, 휴식, 음식, 보충제, 일, 관계 등 다방면에 걸쳐 소개한다. 프랑스 여인들이 오랫동안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첫 번째 비결은 마음가짐이다. 프랑스 여인들도 나이가 들면 살이 찌고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기미나 검버섯이 생긴다. 단, 자기가 나이 먹는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십 대나 이십 대처럼 예쁘고 상큼한 매력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삶의 연륜에서 묻어나는 원숙미와 어떤 주제를 놓고도 열띤 토론을 벌일 수 있는 지성을 가지게 된다. 프랑스 여인들은 자신의 외면보다 내면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움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 결과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에도 드러나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외적인 관리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패션은 물론 피부, 메이크업, 네일 등 외모와 관련되는 부분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니 나이를 먹을수록 부지런히 관리해야 한다. 단, 억지로 젊어 보이려 하거나 자기만의 개성 없이 유행만 따르는 건 프랑스 여인들의 방식이 아니다. 프랑스 여인들은 자기가 '입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가 자신의 스타일에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해선 안 되지만, 많은 경우 겉모습은 자기를 표현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가치를 믿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를 외모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젊어서부터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서는 패션, 헤어, 메이크업뿐 아니라 스타일의 토대가 되는 몸의 관리도 중요하다. 프랑스 여인들은 날씬한 몸매를 만들기 위해 과도한 다이어트를 하거나 헬스클럽에 다니거나 지방 흡입을 받는 대신 '날마다 조금씩' 관리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들은 초콜릿이든 뭐든 먹고 싶은 걸 먹는 대신 몸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적당하게 먹는다. 평소에 물을 많이 마시고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으면 고기나 탄수화물로 된 음식을 급하게 많이 먹는 걸 방지할 수 있다. 운동을 대놓고 하지 않는 대신 일상 속에서 몸을 자주 움직이거나 산책을 하고, 주말이나 휴일에는 집에서 TV를 보며 늘어져 있는 대신 가족이나 친구, 이웃들과 모여 가벼운 스포츠를 즐긴다. 저자는 요가와 수영을 꾸준히 하고 '페탕크'라는 게임을 하며 몸을 관리한다(게이트볼과 비슷한 것 같다). 


  저자는 나이 들수록 아름다운 프랑스 여인들의 마지막 비결로 일과 관계를 든다. 프랑스 여인들은 나이가 들어도 자기 일을 가진다. 저자의 경우 루이비통 계열사 CEO로 재직한 다음 작가로 '전직'해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보내고 있다. 일을 하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사회와 연결되어 있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일이 아니라 취미, 봉사활동이어도 좋다. 항상 할 일이 있는 것은 삶의 만족도를 높여준다. 가족과 애인, 친구, 이웃 등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외면과 내면, 사회적 관계 중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아름답게 나이든다는 프랑스 여인들의 철학이 참 멋지다. 저자가 실천하는 물 자주 마시기, 복식 호흡하기, 틈틈이 운동하기부터 당장 실천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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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6-01-19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티비 프로그램에서 실험하는걸 봤는데요. 우리나라 사람과 외국 ( 아마도 프랑스쪽이었던거 같아요)사람의 식사시 스트레스 정도를 측정했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살찔텐데`하는 스트레스를 스스로 만들면서 섭취하니까 스트레스가 비만을 유발하게 되는거고, 외국사람은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먹어서 스트레스가 없이 건강하게 즐긴다는 결과를 본 적이 있어요. 키치님의 글을 보니 그 프로그램이 떠올랐답니다^~^

키치 2016-01-20 13:35   좋아요 0 | URL
먹으면서 죄의식을 가지고 스트레스 받는 것, 참 안 좋죠. 저는 죄의식이 너무 없어 마구 먹는 게 탈이지만요 ^^;;;; 소중한 덧글 감사합니다.
 
사라바 1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4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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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5년 나오키상 수상작 <사라바>의 제목 '사라바(さらば)'는 한국어의 '안녕, 잘 있어', 영어의 'Good bye'에 해당하는 일본의 인사말이다. 일본어를 아는 나는 <사라바>란 제목을 보고 '안녕' 그 이상의 뜻으로 해석하지 않았는데, 얼마 전 내 방에 들어오신 어머니가 책상에 놓인 이 책을 보고 "제목이 '살아봐'야? 재미있네!" 라고 말씀하신 걸 듣고 <사라바>가 '살아봐'로 읽힐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일본어로는 헤어짐을 뜻하는 인사말이 한국어로는 '살아봐'라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로 읽히다니. 게다가 이 '모순'은 책 내용과 무관하지도 않다. 신기한 우연이다.


  주인공 아유무는 석유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로 인해 이란과 이집트를 오가며 남다른 유년 시절을 보낸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게 벅차고 친구와 정들면 헤어지는 상황이 힘들지만 괴팍하고 신경질적인 누나 다카코를 돌보느라 고생하는 부모님을 자기까지 괴롭힐 순 없어 내색하지 않는다. 어쩌다 슬픔이나 분노가 느껴져도 자기감정이나 생각을 드러냈다가는 누나처럼 미움받고 괴롭힘을 당할 거라고 짐작하며 열심히 숨긴다. 그 대신 남들 눈치를 살피고 준수한 외모와 괜찮은 성적, 운동신경을 이용하여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된다. 남들 보기에 착한 아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말고 다른 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순조롭게 넘긴 아유무의 인생은 대학을 거치고 사회인이 되면서 조금씩 삐걱대기 시작한다. 자기감정을 감추고 남들만 따라 하다 보니 정작 소중한 사람을 찾고 직업을 가져야 할 때가 되자 사랑을 못 느끼고 몰입하고 싶은 일도 찾지 못한다. 그에 반해 누나를 비롯해 남들한테 폐만 끼친다고 미워했던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잡고 행복을 손에 얻은 듯 보여 아유무는 화가 난다. 걸핏하면 문제를 일으키고 이기적으로 굴던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누구에게나 사랑받기 위해 애쓴 자기는 불행해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 가장 사랑했고 가장 아프게 이별한 친구를 찾아 떠난다.


  아유무의 삶은 언뜻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의 삶과 겹쳐 보인다. 아유무와 요조는 둘 다 남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이다. 그런 속내를 가진 자기를 혐오하면서도 좀처럼 삶의 태도를 바꾸지 못하고, 결국에는 믿었던 친구들을 잃고 은근히 무시했던 여자에게마저 배신을 당하면서 인생의 밑바닥을 친다. 차이가 있다면 다자이 오사무는 요조 같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망가지고 철저히 패배하는지를 그린 반면, 니시 가나코는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구는 대신 요조가 누리지 못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아유무에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글쓰기와 여행이다. 


  이것도 저것도 다 실패하고 죽음까지 각오한 아유무는 글을 쓰면서 비로소 자기를 표현하는 도구를 얻고, 여행을 하면서 남들 보기에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님을 깨닫는다. 글쓰기는 자기감정과 생각을 표현함으로써 자기 안을 깨끗하게 비우는 행위이고, 여행은 당연한 듯 보이는 일상으로부터 자기가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음을 자각하는 행위다. 자기를 비우고 심지어는 사라지게 하는 일이야말로 자기 존재를 깨닫고 확인할 수 있는 길이라니. 아유무가 그렇게 비우고 헤어지고 모든 것과 '사라바' 함으로써 좀 더 '살아봐'야겠다고 용기를 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헤어진 친구와 만나는 것이든, 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것이든, 오랫동안 소원했던 가족과 친해지는 것이든, 그 어떤 믿음이든 실천하기만 한다면 결코 헛되지 않고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 단, 무언가와 과감히 이별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어진 친구와 만나고 싶다면 만날 수 없다는 생각과 이별해야 하고, 소설 한 편을 완성하고 싶다면 완성할 수 없다는 생각과 이별해야 한다. 아유무가 한때 인생의 밑바닥까지 자기를 끌어내린 건 결국 자기가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과 이별하지 못한 탓이다. 반대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올 수 있었던 건 자기를 붙들고 있던 생각과 과감히 이별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길 선택했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무엇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과 이별했을까. 남은 하루 동안 하나씩 헤아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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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도서관 - 황경신의 이야기노트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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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좀 누가 나 대신해주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이른 아침 찬바람 맞으며 출근하기 싫을 때, 저녁에 야근하기 싫을 때, 퇴근하고 집에 와서 밥 차려 먹기 귀찮을 때, 주말에 약속 있는데 꼭 가야 하는 경조사가 겹칠 때 등등. 누가 나 대신 생각 좀 하고 생각한 걸 정리해서 글로 써주었으면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주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머릿속을 꽉 채운 생각들이 언어화되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고, 정리된 생각들 속에서 좋은 아이디어나 그때까지 생각지 못한 깨달음이 떠오른다. 나처럼 대신 생각해주고 대신 글로 써주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독자들이 있기에, 출판계가 아무리 불황이어도 작가는 탄생하고 책은 팔리는 게 아닐까. (출판계여, 귀차니스트를 귀하게 받들지어다!)


  나는 여행을 대신해주는 사람이다. 의뢰인이 정해준 여행지와 날짜, 기간과 목적에 맞추어 경비를 산출하고 스케줄을 짜고 난이도를 감안하여 일당을 계산한다. 몇 차례의 조율이 끝나고 출발일이 정해지면, 공식적으로 또 대외적으로, 나의 의뢰인을 한동안 '여행 중'인 상태로 만드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바나나 리브즈>, p.10)


  황경신의 소설집 <국경의 도서관>에는 남을 대신해 무언가를 하는 대리인이 유난히 자주 나온다. 맨 처음 나오는 소설 <바나나 리브즈>에는 의뢰인 대신 여행을 하는 여행 대리인이 나온다. 그렇게 편한 직업이 정말 있을까마는,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이 두려운 사람, 그런데도 남들한테 여행 이야기를 떠들어보고 싶은 사람, '여행 중'이라는 팻말을 걸고 한동안 잠적하고 싶은 사람 등등을 위해 여행 대리인이 필요하다는 (소설 속 여행 대리인의) 설명을 들으니 있을 만도 하다. 이어지는 <나비와 바다의 놀라운 인생>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경쟁하길 좋아하는 어머니들을 대신해 경쟁하는 '나비'와 '바다'가 나온다. 이 또한 이런 부모 자식 간이 있을까마는, 없으라는 법도 없다. 사람마다 누가 나 대신해주었으면 싶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테고, 그중에는 이따금 비상식적이고 불가해한 것도 있을 테니.


  이미 고인이 된 작가의 대리인이 나오는 소설도 있다. <무거운 꽃>이라는 소설의 화자는 자신을 '에밀 싱클레어'라고 밝히는 사람으로부터 언제라도 좋으니 베를린에 오라는 초대를 받는다. 조건은 단 하나, 머무는 동안 단 한 줄이라도 좋으니 글을 쓸 것.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베를린에 간 화자는 에밀 싱클레어, 그러니까 <데미안>의 저자인 헤르만 헤세(에밀 싱클레어는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출간할 때 사용한 필명이다) 대신 그의 대리인만을 만난다. 작가가 존재하든 하지 않든 '글을 쓰라'는 조건은 변하지 않는다. 표제작 <국경의 도서관>에는 작가와 대리인이 동시에 나오는데, 그 작가는 무려 셰익스피어다. 해마다 열리는 셰익스피어의 낭독회에 우연히 가게 된 화자는 셰익스피어가 원문을 읽으면 같이 간 남자 엠이 번역하는 걸 듣는다. 그러면서 이야기 속을 걷는 동시에 이야기를 듣고 또 만드는 특별한 체험을 한다. 


  그가 이끄는 대로, 나는 겨울날의 스산함과 봄의 들판을 방문한다. 사랑의 시작과 끝을 통과하고, 욕망의 무게에 휘청이고, 생의 빈 잔을 들었다 놓는다.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영상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동시에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혹은 모든 이야기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국경의 도서관>, pp.323-4) 


   대리인은 본인 대신 대리인이 하는 것과 본인이 직접 하는 것이 같다는 믿음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과는 다른 삶을 '대신 살아주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나도 그 삶을 경험한 것과 같아진다는 믿음. 이런 믿음 없이는 이야기 속의 인물에게 몰입하기도 어렵고 공감하기도 어려우며, 그런 짜릿한 체험 없이는 책을 계속 읽어가기도 어렵다. 

  

  나 대신 살아주는 주인공. 나 대신 말해주는 화자. 나 대신 글 써주는 작가. 이들이 모여있는 곳이 책 속이라는 세계는 참으로 편리하고 아늑하다. 반대로 그런 세계를 만드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들지만 가히 전설로 남을 만한 작품은 한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에 실린 소설 중에는 내가 깊이 몰입하여 읽은 것도 있고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있다. 작가가 나 대신 내가 못한 체험과 내가 차마 읽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 책을 읽고 쓴 글이니 어려울밖에. 그럼에도 어떤 작품은 쉽게 읽히고 깊이 빠지기까지 했으니 그 기적이 반갑다. 이런 대리인이라면 몇 번은 더 의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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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1-14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다보면 소소하거나 위대한 기적 같은 게 일어나지요. 그 기적이 반갑다,에 좋아요 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