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발언 -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
주디스 버틀러 지음, 유민석 옮김 / 알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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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혐오 발언 이전에 언어에 관한 책인데 이 책의 언어부터 너무 어렵다. 몇 번을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 머리를 자책하며 읽다가 옮긴이 해제를 보니 주디스 버틀러가 '최악의 저자 상'을 수상했을 만큼 원래 난해한 글쓰기로 악명이 높다고. 그렇다 한들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요, 본서를 비교적 쉽게 요약한 옮긴이 해제 역시 수월하게 읽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평을 한 줄도 남기지 않을 수는 없으니 이해한 범위 내에서 적어보겠다. 


저자는 오스틴의 언어 행위 이론을 인용하며 언어에는 '발언 내 행위'와 '발언 효과 행위'가 있다고 전제한다. 발언 내 행위는 발언 자체가 곧 행위인 반면, 발언 효과 행위는 발언과 행위가 별개라서 발언의 효과가 시간차를 두고 나타난다고 본다. 그렇다면 '혐오 발언'은 어떨까? 사람들이 어떤 말을 듣고 상처를 받거나 모욕을 느낀다면 언어는 그 자체가 행위이고 어떠한 힘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혐오 발언을 발언 내 행위로만 볼 수는 없다. 혐오 발언을 듣고도 모욕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에 힘을 부여하는 존재를 가해자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고 더욱 넓게 볼 수 있다. 저자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모욕하기 위해 사용한 혐오 발언이 어느 시점부터는 피해자 집단을 대변하거나 결속시키는 경우가 있음을 지적한다.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기 위해 사용한 '니거(nigger)', '니그로(nigro)'라는 표현이 흑인들 사이에서는 결속감을 높이는 단어로 사용되고,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차별하기 위해 사용한 '퀴어(queer)'라는 표현이 이제는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보편적인 단어로 사용되는 것이 그렇다. 그렇다고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혐오 발언을 스스럼없이 쓸 수 있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흑인 아닌 인종이 '니거', '니그로'라는 말을 쓰면 여전히 인종차별에 해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언어가 화자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개념이라면, 중요한 것은 언어 이전에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아닐까 싶다. 설사 화자에게는 아무런 악의가 없다 해도 누군가에는 어떤 발언이 상처가 될 수 있고 혐오 발언으로까지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은 매사에 있어 타인과의 관계와 사회적 영향력을 감안해야 하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혐오 발언이 넘친다는 것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자세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 점점 늘어간다는 것일까. 어떻게 보든 마음 아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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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코뿔소가 온다 - 보이지 않는 위기를 포착하는 힘
미셸 부커 지음, 이주만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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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은 통 읽지 않지만 한때는 경제경영서를 열심히 읽었다(이래 봬도 경제학 전공이다). 한동안 유행했던 경제경영서 중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블랙 스완>이 있었는데, 얼마 전 <블랙 스완>을 보완하는 성격의 경제경영서가 나왔길래 읽어보았다. 책의 제목은 <회색 코뿔소가 온다>. 저자는 세계 최고의 위기관리 전문가이자 세계적인 싱크탱크 세계정책 연구소의 대표이사인 미셸 부커이다.


'블랙 스완'이 일반적 논리와 맞지 않고 매우 예측하기 힘든 위기를 의미하는 반면, 미셸 부커의 '회색 코뿔소'는 개연성이 높고 예측하기 쉬운 위기를 의미한다. 누구나 알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는 위기인데 무엇이 문제일까? 저자는 누구나 알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는 위기인데도 위험성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대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문제라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눈에 뻔히 보이는 위기를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이유는 대체로 집단 사고나 보수적인 시스템 탓이다. 가령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금융 위기나 테러 위협, 자연재해 등은 사전에 크거나 작은 전조 내지는 조짐을 보이게 마련인데, 사람들이 이를 뻔히 보고도 위급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에 치명적인 위기나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피 튀기는 기사라야 주목받는다'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혹은 일을 잘못 처리해서 대참사로 이어진 사건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반면 위험을 무사히 피한 사건들은 신문 1면을 장식하지 않는다. 우리가 미래의 대재난을 피하기 위해 연구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이런 사건들이다. (p.51) 


다가오는 게 뻔히 보이는 회색 코뿔소를 피하지 않고 있다가 해를 입는 경우는 개인의 일상에도 왕왕 있다. 저자는 사소한 구강 질환을 무시했다가 증상이 악화되어 급기야 잇몸 수술을 받아야 했던 일을 예로 들기도 한다. 회색 코뿔소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자는 '자동 조종 장치'를 만들라고 충고한다. 인간은 본능에 약하다. 본능에 굴복해 현실을 부정하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이성이 있을 때 따로 알아서 작동할 수 있는 자동 조종 장치를 만들어두면 좋다. 개인이 미래에 가난해질 것을 대비해 지금부터 저축 예금을 들고 월급날 자동이체가 되게끔 하는 것이나, 정부가 평화 시에 위기관리 시스템이나 사고 처리 매뉴얼을 만들어두는 것이 이런 예다. 큰 문제일수록 작게 쪼개서 접근하는 방법도 있다. 성인병 예방을 위해 당장 10kg을 감량하기란 어렵지만 한 달에 1kg씩 감량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인간은 위기보다 기회에 더 잘 반응하는 법이다. 위기를 새로운 이익을 창출할 기회 또는 기존 체제를 수정할 터닝 포인트로 활용한다면 회색 코뿔소 피하기가 마냥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체험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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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7-18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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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치과의사를 만나는 10가지 똑똑한 방법 - 치료비가 목적인 엉터리 의사들이 위험하다
사이토 마사토 지음, 조은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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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벌 떠는 1人이다. 하다못해 치과에 관한 책을 읽는 것도 싫어서 이 책에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이 가득 담겨 있어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인 사이토 마사토는 치과보전학 및 치내요법학 박사 학위를 가진 치과 전문의이다. '함부로 치아를 뽑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수십 년 넘게 환자를 치료해온 저자는 오늘날 일본의 치과 의료계에 미숙한 치료나 부실 치료를 하는 '불량 치과의사'가 너무나 많다고 한탄한다. 문제는 불량 치과의사는 엉터리 치료로 하고 돈을 벌 뿐, 이들에게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이들의 죄를 고스란히 뒤집어쓴다는 것이다. 저자는 치료보다 치료비를 중시하는 엉터리 치과의사들과 이들을 방치하는 일본의 치과 의료계의 관행을 폭로하고 환자들이 이들에게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가이드를 제시한다. 


저자가 말하길, 치과대학 학생들이 배우는 치과의사의 제1 덕목은 '치아를 뽑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치과 의료계의 현장을 보면 충치 치료, 교정 치료는 물론 임플란트까지 다양한 명목으로 치아를 뽑는 시술이 왕왕 이루어지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작은 치아 하나도 신체의 일부이며 신체의 다른 조직이나 신경, 뼈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물리 또는 화학적인 치료는 큰 자극이 될 수 있을뿐더러 하물며 발치는 건강상에 엄청난 해를 입힌다. 그러나 일부 치과 의사들은 발치 외에 다양한 치료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무턱대고 치아부터 뽑으려 든다. 일단 치아를 뽑고 나면 환자로서는 다른 선택지를 생각할 수 없고, 치과 의사는 발치 이후에 찾아오는 온갖 통증을 치료하며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치과의사는 자신이나 가족에게 임플란트 치료를 하지 않는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면 다니는 치과의 의사에게 "선생님도 임플란트를 받으셨나요?"라고 물어보라. 그 의사는 뭐라고 대답할까? 물론 평소에 관리를 잘해서 치아가 상하지 않았다고 얼버무릴 것이다. 나와 나란히 앉아 공부한 동기 치과의사들은 환자가 원한다면 임플란트 치료를 하지만, 자신이나 가족에게는 임플란트 대신 틀니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p.88) 


최근 유행하는 임플란트는 위험성이 심각하다. 저자에 따르면 임플란트 치료는 아직 발전 단계에 있으며 안전성이 아직 확증되지 않았고, 시중에는 값이 싸고 질이 나쁜 중국산 임플란트 상품이 널려 있어 무턱대고 임플란트 시술을 받았다가는 충치보다 더 큰 질환에 시달릴 수 있다. 저자는 치과의사들이 자신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임플란트 치료를 하는 법이 없다고 설명한다. 임플란트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라면 차라리 틀니를 한다는 것이다. 지인 중에 30대 초반인데도 벌써 임플란트를 한 사람이 있는데 괜찮을지 걱정이다. 나 역시 언젠가(어쩌면 조만간) 임플란트 치료를 권유받을 날이 올 텐데 그때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다른 치료 방법은 믿을 수 있는 걸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저자는 평소 생활습관을 통해 치아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6개월에 한 번씩 치과에서 스케일링 겸 검진을 받고, 하루에 적어도 한 번 이상 정확한 방법으로 양치질을 하는 것만으로도 치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자일리톨 껌은 설탕을 넣은 껌에 비해 충치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일반 칫솔질이나 전동칫솔로 이를 닦는 것이나 효과는 같다, 치약은 일시적인 자기 위안 정도에 불과하며 충치나 치주 질환을 치료하기는 불가능하다 등 치아 관련 상식을 알려주어 유익하다. 너무 싫은 치과, 여러 번 가지 않게 평소 치아 관리를 열심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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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8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터리 치과 의사를 만나서 멀쩡한 치아를 뽑은 사람이 있고, 치아를 연결하는 신경을 잘못 건드려서 수술을 여러 차례 받은 환자들의 사연을 고발 프로그램에서 본 적 있어요. 치과에 가지 않으려면 양치질을 잘 해야겠어요. ^^
 
나는 왜 걱정이 많을까 - 걱정하는 습관을 없애는 유쾌한 심리학 수업
데이비드 카보넬 지음, 유숙열 옮김 / 사우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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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에도 수십 가지가 넘는 걱정을 한다. 출근길에 지하철이 멈추면 어떡하지? 주초부터 지각하면 어떡하지? 새로 꺼내 신은 스타킹의 올이 나가면 어떡하지? 점심 약속에 늦으면 어떡하지? 등등 큰일부터 작은 일까지 온갖 걱정을 사서 한다. 


공포증과 불안장애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임상 심리학자 데이비드 카보넬의 책 <나는 왜 걱정이 많을까>에 따르면 '걱정은 단순히 미래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과 상상일 뿐이다'. 걱정은 안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상 내지는 믿음이지, 백 퍼센트 현실화될 가능성도 보장도 없다. 중요한 것은 걱정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걱정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걱정은 내가 걱정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내가 걱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떻게 느끼는지, 걱정을 어떻게 대하는지, 걱정을 어떻게 처리하고자 하는지, 나의 행동이 걱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걱정은 합리적인 사고와 동떨어진 반직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직관적인 방법으로 풀기 힘들다. 커다란 파도가 다가올 때 몸을 돌려 해안가를 향해 달리는 것은 직관적인 방법이고 파도를 향해 뛰어드는 것은 반직관적인 방법이다. 파도를 피하기 위해 파도를 등지고 달리는 것은 지극히 이성적인 행동이지만 결과는 파도에 따라잡히고 온몸을 바닷물에 흠뻑 적실뿐이다. 차라리 다가오는 파도를 향해 달리면 파도가 금방 나를 지나칠 뿐 아니라 운이 좋으면 파도 위에 올라탈 수도 있다. 걱정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다. 걱정을 위험으로 받아들이면 싸우거나 도망가거나 얼어붙는다. 걱정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걱정이 저절로 사라지길 기대하는 것이 낫다.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전학간 학교에서 친구를 못 사귀면 어떡하나', '시험을 못 보면 어떡하나', '남자친구가 나 말고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나' 등등 수많은 걱정을 해왔지만 그때마다 걱정이 완벽히 해결된 적은 별로 없고(친구는 억지로 사귄다고 생기지 않고, 시험을 못 본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나 말고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내 쪽에서 사절이다) 시간이 흐르거나 나이가 듦에 따라 저절로 사라졌다. 지금 하는 걱정 또한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걱정이 저절로 사라지길 기대할 여력이 없다면 걱정에 맞장구치는 방법이 있다. '비행기에서 내가 환각 증상을 보여 승무원들이 나를 제지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든다면 '그래, 비행기가 착륙하고 나를 요양소에 데려가기 전에 온 세상에 공개하겠지. 나는 저녁 뉴스에 나올 테고 모든 사람들이 볼 거야.'라는 식으로 걱정을 그대로 인정하고 내용을 보태는 것이다. 이 방법은 걱정을 없애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걱정에 맞장구침으로써 걱정을 잘 받아들이면서도 걱정이 덜 문제 되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이 밖에도 걱정 노래 부르기, 하이쿠 쓰기, 5행시 쓰기, 제2 언어로 걱정하기, 걱정 목록 작성하기, 걱정거리 녹음하기 등의 방법이 있다. 핵심은 걱정 그 자체에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을 소리 내어 말하거나 글로 씀으로써 지금 안고 있는 걱정이 얼마나 사소하고 바보 같은 것인지 귀나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걱정에는 뭔가 웃기는 구석이 있다'. '출근길에 지하철이 멈추면 어떡하지?', '새로 꺼내 신은 스타킹의 올이 나가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은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나만이 안고 있는 고민도 아니다. 차라리 걱정할 시간에 지하철 말고 다른 통근수단을 생각해내거나 여분의 스타킹을 준비하는 것이 나을 터. 걱정을 없애지 말고 끌어안으라는 저자의 조언이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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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혁명 - 자긍심을 회복하는 순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최종희 옮김 / 국민출판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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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 태어나고 싶었다. 딸만 둘을 낳은 어머니가 할머니로부터 씨받이를 들이겠다는 위협을 받았을 때,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거나 큰 상을 받아도 사람들이 칭찬을 해주기는커녕 '딸이 아니라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다'며 혀를 끌끌 찼을 때, 교사로부터 남자아이들이 버젓이 있는데 여자아이가 반장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학급 임원직을 포기했을 때, 나는 여자로 태어난 나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했다. 그러다가 여고 2학년 때 친구로부터 페미니즘의 존재를 배웠고 운명처럼 여대에 입학해 페미니즘을 공부했다. 그러나 가볍게 훑기만 했을 뿐 깊이 빠지지는 못하다가 최근 한국 사회에 뜨겁게 점화된 페미니즘 논쟁을 보면서 다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오랫동안 미뤄둔 숙제를 다시 들춰보는 기분으로 몇 권의 페미니즘 서적을 읽어보았다. 놀랍게도 페미니즘을 처음 알게 되었던 여고 2학년 때만 해도 멀게만 느껴졌던 이슈들이 30대가 된 지금은 무척이나 가깝고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세계 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 Ms.>의 창간인이자 페미니스트들의 대모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쓴 <셀프 혁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미국에서는 1993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나 국내에서는 2016년 올해 처음 출간된 이 책은 1993년 당시 40대 중반의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미국 대통령 경선에 나서면서 오늘날의 자신을 있게 한 멘토 중 한 사람으로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꼽기도 했다. 


'여성들은 너무 강하다'라는 말은 9백만 명의 '마녀'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추동력이 되었고,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종교 체제로의 진전을 위한 은밀한 자극제이기도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너무 강하다'라는 말은 히틀러가 그 자신을 부유한 유대계 은행가들'과 대비되는 노동자 계층의 우상으로 세우기 위해 주장한 것이었다. (p.274) 


요즘도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페미니즘과 동성애를 연달아 비난하고 있는데, 과거에 그 둘 사이의 대비는 훨씬 더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예를 들어, 종교 재판이 성행하던 중세 유럽에서는 수 세기 동안 마녀들을 화형에 처했는데, 그때 동성애자 남성은 마녀를 태울만큼 '충분히 뜨거운' 불을 만들기 위해 먼저 화형에 처해졌다. 게이를 경멸할 때 쓰는, 'faggot(장작)'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p.275) 


이 책은 페미니즘 서적이기 이전에 심리학 서적이다. 저자는 수십 년 넘게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사회적, 경제적 시스템 같은 외적 변화가 중요하다고 역설해왔지만 한편으로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내적 변화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내적 변화의 핵심은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는 마음가짐을 일컫는 '자긍심'이다. 자긍심은 개인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불완전성, 공허감, 자기 회의, 자기 증오에 취약하며 (당연하게도) 남녀 구분이 없다. 자긍심이 낮은 남성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까지도 저평가하거나 혐오하며, 자긍심이 낮은 여성은 타인이 자신을 비하하는 것을 용인하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 자기를 경멸하게 된다. 


저자는 여성의 자긍심을 높이는 노력이 남성의 자긍심을 높이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남성과 여성 모두 존중받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관습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성향을 가진 남성에 대한 저평가가 대표적이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사회에서는 남성이 관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양육이나 가사노동을 하거나, 패션이나 메이크업에 관심을 보이거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거나 타인의 말이나 생각에 깊이 공감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이로 인해 남성은 가사노동이나 아이들 양육을 기피하게 되고, 패션이나 메이크업에 대한 관심을 억누르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타인의 말에 무관심하게 되면서 자기를 부정하고 심지어는 혐오하게 된다. 여성에 대한 차별 및 관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영역에 대한 비하가 존재하는 한 남성 또한 충분히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흑인이나 유대인들이 비싼 곳이든 싼 곳이든 식당이나 바의 출입을 거절당하면 그에 대한 항의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찬성하면서도, 인류의 절반이자 흑인과 유대인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문제에는 왜 좀 더 진지하고 심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p.20) 


여성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 곳곳에 내재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명확하게 인식하면서도 정작 그 차별을 없애는 문제에 있어서는 좀 더 진지하고 심각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저자에게도 여성 문제에 진지하고 심각하지 못 했던 시절이 있었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시절 저자는 플라자 호텔에서 유명 배우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호텔 로비에서 부지배인으로부터 "동반자를 대동하지 않은 숙녀는 절대로 로비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쫓겨난 적이 있다. 한 달여 후 저자는 같은 호텔에서 다른 저명인사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도 호텔 로비에서 부지배인으로부터 여자 혼자서는 들어올 수 없다는 제지를 받았지만 저자는 "여기는 공공의 장소이며 저는 여기 머무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했다. 그러자 부지배인은 저자를 순순히 들여보내주었고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 사회가 '여자라서 안 된다'고 말할 때 순순히 굴복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당당히 요구하면 결국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관습적인 여성이 보이는 남성에 대한 의존이나 로맨스에 대한 환상, 미와 젊음에 대한 집착 등은 진정한 여성성의 발현이 아니며, 만약 자신에게 그러한 면이 있다면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진짜 욕망 - 남성성의 표출 내지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조화 등등 - 을 발견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저자는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명상과 기도, 쓰기, 그리기, 웃기, 노래하기 등을 제안한다. 이 같은 활동은 '내부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하고, 자아를 인정하고, 가치를 평가받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존중받는 느낌을 준다. 전문 예술인처럼 잘하지 못해도, 익숙하지 않아도 괜찮다. 자기 내면을 확인하고 표현하는 활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우리는 오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우리가 써먹으라고 있는 것이죠. 나는 우리 각자가 자궁 밖으로 나올 때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방법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걸 표현하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는 일이 되죠. (p.251)


대학 졸업 후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쉬는 대신 심리학과 예술을 공부했는데 이 책을 읽고 페미니즘과 심리학, 예술이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 또한 운명의 이끌림이 아니었을까.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에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하고 지금까지도 열정적으로 운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라는 인물의 존재 또한 감사하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해 알아갈수록 여자라는 사실이 전처럼 한스럽지 않고 자랑스럽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하는 생각도 더 이상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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