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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에키벤 2 : 시코쿠.츄고쿠 - 철도 도시락 여행기
하야세 준 지음, 채다인 옮김, 사쿠라이 칸 감수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0년 11월
평점 :
재작년 가을, 오사카 우메다에서 간사이 국제 공항까지 가는 길에 '에키벤'을 샀다. 에키벤이란 역을 의미하는 '에키'와 도시락을 뜻하는 '벤또'의 '벤'을 합친 말로, '기차역이나 차내에서 판매하는 도시락'을 일컫는 일본어다. 에키벤은 일본철도의 탄생과 함께 생겨나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현재 2,500종이 넘는 에키벤이 일본 각지에서 판매 중이다.
일본 문화에 관심 있고, 여행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먹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에키벤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하여 먹어보았는데 그 맛이 어땠냐면... 에키벤에 대한 로망과 여행자의 허기를 채우기에 충분했을 뿐, 값으로 보나 양으로 보나 일부러 사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 입맛과 취향엔 2프로 부족했던 에키벤. 한 번밖에 먹어보지 않았으니 맛없다, 비싸다고 단정 지을 순 없다(맛있는 에키벤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일본 여행을 그만두지 않으리!).
만화 <에키벤: 철도 도시락 여행기>를 읽은 이상 더욱 그렇다. 이 책은 내로라하는 철도 마니아이자 에키벤 전문가인 나카하라 다이스케가 결혼 10주년을 기념해 아내로부터 선물 받은 일본 전국 일주 기차 여행권을 이용해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부터 최북단 홋카이도까지 전국 곳곳을 기차로 여행하며 그 고장의 특산물로 만든 진귀한 에키벤을 먹어보는 이야기를 그린다. 일본의 에키벤 문화를 본격적으로 다룬 만화일 뿐 아니라 일본의 철도와 역사, 지리, 문화, 예술 등을 폭넓게 다룬 텍스트로서도 가치가 탁월하다.
주인공 다이스케는 일본열도를 구성하는 네 개의 섬 중 최남단에 위치한 규슈를 시작으로 시코쿠, 츄고쿠, 칸사이, 홋카이도, 토호쿠, 기타칸토, 츄부, 간토, 오키나와 등을 여행한다. 일본 영토가 아닌 지역으로는 러시아 사할린과 대만을 여행하기도 한다. 1권에서 다이스케는 규슈의 지역 특산물을 살려 만든 고등어 초밥 도시락, 돈코츠 도시락, 복어 도시락, 명란젓 도시락, 유후인의 숲 도시락 등을 맛본다. 2권에서는 시코쿠와 츄고쿠, 3권에서는 간사이 지방을 여행한다.
4권부터 6권은 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홋카이도 편이다. 아내 유코와 함께 침대특급 '트와일라잇 익스프레스'를 타고 홋카이도로 출발한 다이스케. 홋카이도의 면적은 남한 면적에 약 80퍼센트에 이르며, 주요 도시 사이를 이동하는 데에만 몇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여행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지역이다. 그 대신 고기면 고기, 해산물이면 해산물, 디저트면 디저트... 먹을거리가 다양하고 풍성하다. 다이스케 또한 홋카이도의 광활한 자연을 바라보면서 홋카이도의 특산물인 게, 오징어, 성게 등등 맛있는 에키벤을 폭풍 흡입한다.
7권부터 9권에선 도호쿠 지방을 여행한다. 도호쿠 지방은 일본 혼슈 동북부에 위치한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기현, 아키타현, 야마가타현, 후쿠시마현 등을 포함하는 지역. 좋은 쌀이 생산되고 식재료가 풍부해 일본에서도 에키벤이 가장 발달한 곳으로 유명하다. 도호쿠 지방은 마츠오 바쇼가 도호쿠 지방을 여행하며 남긴 기록인 '오쿠노호소미치'의 배경이자 한국인들에게도 유명한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장이며 <은하 철도의 밤>을 지은 미야자와 겐지의 고향이기도 하다. 문학과 예술의 고장인 도호쿠에서 다이스케는 미야자와 겐지가 좋아서 일본에 온 프랑스 아가씨 크리스티나와 함께 맛있는 여행을 즐긴다.
다이스케는 기차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난다. 여행 기자인 '나나'를 시작으로 사법시험에 떨어지고 시코쿠에 사찰 순례를 하러 온 '미키', 미키의 조카이자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 '히로시', 호주 출신 유학생 '케이트', 프랑스에서 온 '크리스티나', 대만에서 온 쌍둥이 자매 '야우야우', '메이메이', 한국 여행사 직원 '한미수' 등등. 남자인 히로시를 제외하면 죄다 여자이고 미인인데 다이스케는 오로지 에키벤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는 설정이 가장 만화적이다!). 특히 나나는 <에키벤> 시리즈를 통틀어 다이스케의 아내(이자 이 여행의 스폰서(?))인 유코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실질적인 히로인'이므로 눈여겨보시길.
다이스케는 식성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사람 좋고 호방하게만 보이지만 실은 매우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다. 학창 시절에 가진 철도 여행에 대한 로망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뤘고, 운영상 적자가 난다는 이유로 지방 철도가 속속 폐지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철도가 사라지면 해당 지역 사람들이 이동하기 불편해질 뿐만 아니라 철도가 간직하고 있는 역사와 문화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 다이스케는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택하면서까지 지방 철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철도가 폐지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표한다.
10권에선 기타칸토, 11권과 12권에선 츄부, 13권과 14권에선 토카이, 15권에선 간토 지방의 에키벤을 소개한다. 연재 종료 이후 16권에 해당하는 <에키벤 : 대만+오키나와 편>이 발행되기도 했다. 다이스케가 대만에서 온 쌍둥이 자매 야우야우, 메이메이와의 인연으로 대만 에키벤 여행을 한 걸 보면, 언젠가 한미수와의 인연으로 한국 에키벤 여행을 하는 이야기도 나올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