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한나 아렌트는 미국 시사지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석한다. 전체주의와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정치사상가이자 그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독일에서 탈출, 미국으로 망명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의외로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독일에 살던 유대인 수백만 명을 강제 이주시킨 것으로 모자라 유대인 대량 학살을 손수 집행한 악인이라면 머리에 뿔은 안 달렸어도 무시무시하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흔한 중년 남성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재판 도중 드러난 아이히만의 인격도 무서운 악마나 몰염치한 사이코패스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평범하다 못해 진부했다. 식상하고 멍청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언제나 법률을 준수하는 시민'이었고,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 말은 일견 맞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제3제국 독일에선 히틀러의 말이 곧 법이었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죽이라고 명령했으니 유대인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말대로 그는 히틀러의 말, 즉 법을 준수했을 뿐이고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을 학살했을 뿐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능함 그 자체라고 지적한다. 아이히만의 무능함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자기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함이고, 둘째는 자기 힘으로 생각하지 않는 무능함이고, 셋째는 타인의 입장으로 바꾸어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함이다. 아이히만은 자기 언어가 아니라 히틀러의 언어로 생각하고 히틀러의 언어로 행동했다.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이 '살인'이 아니라 '안락사 제공'이라고 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 수백만 명에게 '안락사'를 '제공'했다. 죄가 있다면 그들에게 '안락사'를 '제공'할 때 더 편하게 해주지 못한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아이히만의 머릿속엔 히틀러처럼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능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정교 교육을 마치지도 못하고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지도 못한 그는 변변한 학벌이나 능력 없이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된 히틀러를 숭배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우상인 히틀러가 말하는 내용에 의심을 품지 않았으며 감히 거스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개인적으로 유대인을 미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대인에게 은혜를 입은 일까지 있지만, 히틀러가 명령하는 대로 유대인을 죽였고 털끝만큼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가 끝까지 열렬히 믿은 것은 성공이었고, 이것이 그가 알고 있던 '좋은 사회'의 기준이었다. 히틀러(그와 그의 동지 자센이 자신들의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를 원한 사람)에 관한 주제에 대해 그가 한 마지막 말은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히틀러가 "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니고,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000만에 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을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198쪽)
아렌트는 이 책에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말은 평범함 속에 악이 있다는 뜻으로 잘못 전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마음산책에서 나온 <한나 아렌트의 말>이라는 책에 실린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악의 평범성'에서 평범은 차라리 진부함, 멍청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즉 악은 자기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생각하지 못하며, 타인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사람들에게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드러난 박근혜,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이후 우리는 죄를 저지르고도 '법을 지켰을 뿐이다',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악인'들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대선을 며칠 앞둔 지금도 박근혜,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의 잔당들은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고 악을 악으로 부르길 거부하며 가뜩이나 어지러운 정국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사진으로 보기엔 평범한 중년의 얼굴을 한 이들에게서 아이히만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나로서는 세월호 사고로 수백 명의 목숨을 희생시키고도 사죄하기는커녕 세월호 배지를 그만 떼라고 타박하고, 국정 농단으로 수천만 국민을 실망시키고도 권력 복귀를 꿈꾸는 이들의 죄나 아이히만의 죄나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