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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왼손 ㅣ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1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9월
평점 :

얼마 전 파리 리뷰에 실린 작가 인터뷰 모음집 <작가란 무엇인가>를 읽고 어슐러 르 귄을 알게 되었다. 그 책에서 어슐러 르 귄은 한동안 슬럼프를 겪다가 페미니즘을 만났고, 페미니즘과의 만남을 1969년에 발표한 대표작 <어둠의 왼손>에 녹여 썼다고 했다. <어둠의 왼손>을 서둘러 구입해 읽어보니 과연 페미니즘의 영향이 짙게 묻어난다. <이갈리아의 딸들>이나 <시녀 이야기>처럼 페미니즘을 전적으로 표방하는 문학은 아닐지라도 작품의 바탕에 페미니즘이 있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소설의 배경은 '게센'이라는 이름을 지닌 가상의 행성이다. 지구인 남성 겐리 아이는 우주행성연합인 에큐멘의 특사로서 게센 행성이 에큐멘에 가입하도록 이끄는 임무를 부여받고 게센 행성에 파견된다. 겐리 아이는 먼저 카르히데 왕국으로 가서 왕을 만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하지만 카르히데 왕국의 내부 권력 투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특사로 대접받기는커녕 추방당하는 처지가 된다. 이웃나라 오르고레인으로 넘어간 겐리 아이는 이번에도 왕을 만나려 노력하지만 스파이 혐의를 쓰고 수용소에 갇힌다.
이 과정에서 겐리 아이는 카르히데 왕국의 재상 에스트라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지만, 가까워지려고 노력할수록 가까워질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닫고 좌절한다. 겐리 아이가 에스트라벤과 가까워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겐리 아이가 지구에서 남성으로서 교육받고 사회화된 것과 달리 에스트라벤은 성구분이 불분명한 게센 행성에서 남성인 동시에 여성으로서(또한 양성으로서) 교육받고 사회화되었다는 것이다.
게센 행성 사람들은 한 달 주기로 양성을 모두 가지는 소메르 시기와 양성이 분리되는 케메르 시기를 거친다. 이는 곧 게센 행성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면 남성도 될 수 있고 여성도 될 수 있고 양성 모두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게센 행성 사람들은 누구나 원하는 시기에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고 양육의 부담도 동등하게 나누어 가진다. 게센 행성 사람들은 아버지인 동시에 어머니일 수 있고, 남편인 동시에 아내일 수 있다.
겐리 아이는 처음에 에스트라벤을 지칭할 때 'he(그)'라고 해야 하는지 'she(그녀)'라고 해야 하는지 몰라서 고민한다. 에스트라벤을 남성으로 대해야 하는지 여성으로 대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에스트라벤은 이런 겐리 아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게센 행성에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게센 행성에서 인간은 오로지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되며, 남성 또는 여성의 정체성보다는 개개인의 정체성으로서 인정될 뿐이다. 겐리 아이는 잘못된 것은 게센 행성의 문화가 아니라 인간을 남성 또는 여성으로 구분하고 그에 맞춰 재단하고 평가했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작가는 여기에 몇 가지 상상을 추가로 제시한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불분명한 게센 행성에는 성별에 따른 차별이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고 어머니 또는 아버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임신, 출산, 양육으로 인한 고통을 고르게 나눠 가진다. 오이디푸스 신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의 동의 없는 성교나 강간도 없다. 인간을 강자와 약자, 보호자와 피보호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주인과 노예로 구분하는 문화도 없다. 사회의 역동성은 덜할지 몰라도 평화롭고 안정적이다.
과연 우리는 상대에게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카테고리와 무관하게 대우받아 본 적이 있을까. 상대를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카테고리와 무관하게 대우해본 적이 있을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오로지 인간으로서 존중한다는 것 또는 다른 인간으로부터 오로지 인간으로서 존중받는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어쩌면 게센 행성이야말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미래가 아닐까. 소설의 내용도 흥미진진하지만 소설의 바탕을 이루는 작가의 상상이 기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