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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암살자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평점 :

페미니즘 문학을 표방하지 않아도 페미니즘이 짙게 배어 있는 문학 작품이 더러 있다. 이를테면 <빨간 머리 앤>이 그렇다. 고아인 앤 셜리는 마릴린 아주머니와 매튜 아저씨(놀랍게도 둘은 부부가 아니라 남매 다. 어릴 때는 왜 이들이 '당연히' 부부인 줄 알았을까!)에게 입양되어 대학 교육을 받고 어엿한 직업도 가진다. 사소해 보이지만 작품이 발표된 해가 1908년임을 감안하면 앤은 상당히 진보적인 여성 캐릭터이다.
<빨간 머리 앤>을 쓴 루시 모드 몽고메리와 마찬가지로 캐나다를 대표하는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대표작 <눈먼 암살자>는, 페미니즘 문학이라기보다 역사 문학에 가깝지만 페미니즘이 작품 전체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은 삼중 액자 구조로 되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팔십 대의 노파 아이리스가 죽음을 앞두고 회고록을 작성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스물다섯에 사망한 아이리스의 여동생 로라의 이름으로 출간된 작중 소설 <눈먼 암살자>이고, 세 번째 이야기는 <눈먼 암살자> 속 남자가 여자에게 들려주는 공상 과학 소설이다.
아이리스는 20세기 초 캐나다의 명망 있는 가문에서 두 자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두 딸에게 무관심하고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유모 리니가 두 자매를 거의 다 키우다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산 위기에 처한 아버지가 아이리스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했고, 로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이리스는 가족들을 위해 결혼하는 길을 택했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한 몸처럼 지냈던 자매는 떨어지게 되고, 결국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이 소설은 초반부터 주요 등장인물 몇 명의 죽음이 신문 기사의 형태로 암시된다. 그 상태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이리스와 로라 자매가 명망 있는 가문의 여식으로 자라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아이리스와 로라는 같은 부모에게 태어나 같은 집에서 자라고 같은 교육을 받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어느 순간부터 양극단으로 치닫는다. 아이리스가 보수적이고 순종적인 선택을 한다면, 로라는 급진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을 한다. 그로 인해 아이리스는 부잣집 마나님으로서 편안하게 살지만 정신적으로는 공허한 반면, 로라는 정신병원에 감금될 만큼 문제아 취급을 받을지언정 짧은 생을 자유롭게 살다 간다.
그렇다고 아이리스가 로라처럼 살고 싶은 욕망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아이리스도 로라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고, 아버지가 짝지어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그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로라처럼 살 용기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건 아이리스의 탓이 아니다. 아이리스의 아버지는 말했다. 아이리스가 아들이었다면 회사를 경영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사업을 물려주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아이리스는 -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 아들로 태어날지 딸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었다'. 반면 아이리스의 아버지는 '선택할 수 있었다'. 아이리스의 아버지는 아이리스를 자신의 후계자로서 교육할 수 있었다. 아이리스의 아버지는 아이리스에게 사업을 물려줄 수 있었다. 아이리스의 아버지는 아이리스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모든 비극은 '선택할 수 없었던' 아이리스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었던' 아이리스의 아버지의 탓이다. 아니면 애초에 아이리스를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나게 한 신의 탓이든지.
이론상으로는 내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다. 나는 중심가, 번화한 곳만을 고수했다. 그런 한정된 곳 내에서도 구속력이 느껴지지 않는 곳은 몇 군데 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을. 그들은 결혼을 했는가?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직업은 있는가?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신발 가격 외에는 별다른 것을 알아낼 수 없었다. (2권 75쪽)
'선택할 수 없었던' 아이리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무능과 용기 없음을 평생 탓했다. 아이리스는 자기 자신을 '거대한 사기의 희생자, 그와 동시에 그 하수인'이라고 여겼다. 아이리스는 여자도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여자도 가고 싶은 곳에는 마음껏 갈 수 있다고 말하는 동생을 부러워했고 질투했고 시기했다. 자매의 유대감은 그렇게 와해되었고, 언니와 동생은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강력한 가부장제 속에서 자란 자매가 각자 다른 선택을 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겹쳐 보인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맨)부커상 수상작이다(<눈먼 암살자>는 2000년, <채식주의자>는 2016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