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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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렇게 뜨거운 이야기를 차갑게 썼을까. 김숨의 <L의 운동화>는 여러모로 나의 기대를 배신한 소설이다. L이 이한열 열사라는 말을 듣고 처음에 나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처럼 읽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소설을 상상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소설은 시종일관 차분하다 못해 차갑고 서늘하다. 이한열 열사가 상징하는 독재 타도, 민주주의 같은 대의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마음에 남은 얼얼한 여운은 뭘까. 얼음을 만졌는데 동상이 아니라 화상을 입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미술품 복원 전문가인 '나'는 L(이한열 열사)이 타계하기 직전에 신은 운동화 한 짝을 복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에 빠진다. L은 19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열린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 2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L의 희생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피격 당시 L이 신었던 운동화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다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L의 정신을 기리는 상징물로 남았다.


'나'가 복원을 망설이는 것은 L의 운동화를 복원할 실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L이 상징하는 가치에 공감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나'는 L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 흉물처럼 남아 있는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일인지 고민한다. L의 운동화를 복원하고 감상하는 것은 결국 산 사람들의 죄책감과 부채감을 달래기 위한 행위가 아닐까. 복원이라는 명목으로 L이 신다 만 상태로 남아 있는 운동화에 손을 대는 것은 실상 복원이 아니라 훼손이 아닐까. L의 운동화는 1987년 당시 전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었던 흔하디흔한 타이거 운동화 중 하나일 뿐인데, L이 신었다는 이유로 복원 대상이 되고 기념관에 전시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일까. 애초에 이 운동화가 L이 신은 운동화이기는 한 걸까. 나머지 한 짝은 어디 있을까. 


소설의 모티프가 된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는 실제로 존재한다(신촌역 8번 출구 근처에 있는 이한열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으로 상상한 L의 운동화를 사진으로 보니 여러 생각이 든다. 사진 속의 운동화는 L이 신은 운동화라고 보는 게 맞을까, 복원 전문가가 복원한 운동화라고 보는 게 맞을까. 낡고 해진 운동화는 30년이 지나도 복원할 수 있는데 왜 죽은 사람은 복원할 수 없을까. L이 남기고 간 사람들은 저 운동화를 보고 무엇을 생각할까.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끝없이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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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반납 여행 - 전후 일본 사학사의 한 컷 오래된 책을 찾아 자박자박 1
아미노 요시히코 지음, 김시덕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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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일 줄 알았는데 짐작과 달리 '고문서 반납'에 중점을 둔 인문 교양서에 가까운 책이다. 저자 아미노 요시히코는 일본 정부가 1949년에 세운 사회사 자료관에서 일한 적이 있다. 사회사 자료관에는 일본 정부가 전국 농어촌에서 수집한 엄청난 양의 고문서가 있었는데, 얼마 후 사회사 자료관은 재정난으로 인해 문을 닫고 저자도 고등학교 교사로 이직하면서 고문서는 갈 곳을 잃게 되었다. 


저자는 한동안 고문서의 존재조차 잊고 살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문서 도둑'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문서를 빌려 갈 때는 반드시 돌려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여태까지 돌려주지 않았으니 도둑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다. 그리하여 저자는 무려 18년에 걸쳐 일본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고문서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고문서 반납 여행을 한다. 고문서를 빌려준 주인 입장에서 보면 1949년에 빌려준 문서를 1998년에야 돌려받았으니 50년 넘게 걸린 셈이다. 


저자는 고문서를 돌려주러 갈 때마다 주인에게 쓴소리를 들을 것을 각오했는데, 놀랍게도 고문서를 돌려받은 주인 대부분이 고문서를 돌려줘서 고맙다고 오히려 감사를 표했다. 심지어는 정부나 기업, 학교 등에서 일하는 '높은 사람들'이 고문서를 빌리고 돌려준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이니 고문서 외의 영역에서는 민간에 대한 횡포(갑질)가 얼마나 심할지 짐작이 된다(한국은 어떨까). 


저자는 고문서의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그동안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개념이나 역사 이론에 허구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농공상'이 대표적인데, 저자는 농업을 중심으로 일본의 경제가 발전했다는 기존 역사학의 관점은 잘못이며, 어민, 산민, 상인, 직공 등 그동안 천시된 '비농업' 분야의 경제인들이 일본 경제의 성장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고문서를 반납하기 위해 쓰시마(대마도)를 방문한 이야기도 나온다. 저자가 쓰시마의 전통 가옥이 일본의 전통 가옥과 다른 모습임을 깨닫고 그 이유를 묻자, 같이 방문한 연구자가 쓰시마의 전통 가옥은 제주도 또는 한국 남부 지방의 전통 가옥과 비슷한 모습이라고 답한다. 대체 얼마나 비슷할까. 궁금해서 쓰시마의 전통 가옥 사진을 검색해봤더니 일본의 전통 가옥을 연상케하는 사진만 나온다. 직접 가서 봐야 알 수 있는 걸까. 반납할 고문서는 없지만, 언젠가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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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삶의 정물화
문광훈 지음 / 에피파니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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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조용한 삶의 한 장면을 포착해 사각의 화폭에 담은 정물화 같은 책이다. 저자 문광훈은 현재 충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저서로는 <가면들의 병기창>, <가장의 근심>, <심미주의 선언> 등이 있다. 책의 절반은 저자가 일상에서 건져올린 생각의 편린을 담은 글이고, 나머지 절반은 저자가 사랑하는 음악과 문학, 미술에 관해 평한 글이다. 


영화 <스틸 라이프>를 보고 쓴 글도 있다(스포일러 있음!!). 주인공은 고독사한 사람의 지인을 찾아 장례를 치르는 일을 하는 구청 공무원 존 메이. 예산을 너무 많이 쓴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 날, 존의 아파트 바로 맞은편에서 살던 빌리 스토크가 죽은 채 발견되고, 존은 빌리를 위해 처음으로 사무실을 벗어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빌리의 지인을 찾는다. 마침내 존은 빌리의 지인을 찾아내고 빌리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는데, 하필이면 빌리의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해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존 역시 가족이나 연인, 친구 하나 없는 고독한 인간이었기에 존의 목숨이 꺼져가는 그 순간에도 존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고독사한 사람의 뒤처리를 하던 사람이 고독사하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카메라가 멀찍이 떨어지자 그동안 존이 장례를 치러준 영혼들이 존의 곁으로 모여드는 모습이 보인다.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무척 감동적이고 가슴 뭉클한 장면일 것 같다. 어쩌면 우리네 삶도 가까이서 보면 지루하고 답답하고 억울하고 말도 안 되는 일 투성이지만, 멀리서 보면 제법 괜찮은 그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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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 공감 - 우리가 나누지 못한 빨간 날 이야기
김보람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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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가 나오는 거니까 참아." 생리통을 호소할 때마다 엄마는 말했다. 생리로 인해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깨질 것 같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플 때에도 엄마가 해준 말을 되뇌이며 참았다. 엄마 말대로 나쁜 피가 몸에서 나오고 있는 중일 테니까. 나쁜 피가 나오면 내 몸은 더 깨끗해지고 건강해질 테니까.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를 만들고 책 <생리 공감>을 쓴 김보람 감독도 오랫동안 생리는 나쁜 피가 몸에서 나오는 것,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몇 년 전 국제영화제에서 만난 네덜란드인 친구에게 우정의 상징으로 할머니가 만들어준 생리대 파우치를 선물했을 때, 네덜란드인 친구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네덜란드에선 사각형의 일회용 생리대를 사용하는 여성이 드물고, 자신은 그조차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미 오래 전에 '생리를 하지 않는 시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저자는 생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생리컵, 면생리대, 해면 탐폰, 스펀지 탐폰, 울 탐폰, 생리컵, 여성용 콘돔 등 다양한 생리 용품을 직접 사용해 보았고, 생리 경험을 공유하는 수많은 '피'자매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 과정을 통해 저자가 얻은 것은 직접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과 책 한 권만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이기 때문에 당해야 했던 수많은 금지와 차별, 혐오를 인식하게 되었고, 자기 자신조차 남성의 시선에 동화되어 스스로를 부정하고 혐오하고(내 가슴은 왜 이렇게 작을까, 나는 왜 남자친구를 만족시키지 못할까) 있었음을 깨달았다. 


'생리=나쁜 피'라는 관념이 생긴 것도 생리 경험이 없는 남성들이 이 사회의 다수라서 벌어진 일이다. 알다시피 생리는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할 것을 대비해 형성된 자궁내막이, 착상이 이루어지지 않자 저절로 탈락해 배출되는 현상이다. 즉, 생리혈은 나쁜 피가 아니라 좋은 피, 건강한 피다. 매달 3일에서 7일 동안 좋은 피, 건강한 피가 수백 밀리리터씩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아프고 힘든데 '생리충', '피싸개'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생리는 성적 흥분으로 비롯되는 현상이 아니므로 사정 또는 몽정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도 잘못이다.


<생리 공감>에는 이 밖에도 저자가 생리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면서 생리와 여성에 몸에 관해 새롭게 얻은 지식과 성찰이 담겨 있다. 김보람 감독을 처음 알게 된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 '김하나의 측면돌파 - 김보람 감독 편'과 교보문고 북뉴스 김보람 감독 인터뷰도 좋으니 관심 있는 분은 듣거나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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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영웅전설 3 : 영웅들의 초상
다나카 요시키 지음, 미츠하라 카츠미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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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하라 카츠미판 <은하영웅전설 : 영웅들의 초상> 제3권은 은하제국의 함대사령관 로이엔탈과 자유행성동맹의 새로운 총참모장 춘 우 지엔이 서로 맞붙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춘 우 지엔은 양 웬리 못지않게 '미덥지 못한'(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책에 나온 표현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용모의 소유자이지만 그 지략 또한 양 웬리 못지않게 뛰어나다. 춘 우 지엔은 적이 페잔 회랑을 통과해온 이상 이제르론 회랑을 확보하는 것에 의미가 없다며 가능한 한 빨리 양 웬리를 불러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좌중은 은하제국으로부터 어렵게 빼앗은 이제르론을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다며 당황해하는데, 놀랍게도 그 자리에 없는 양 웬리가 춘 우 지엔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르론 요새를 포기한다." 양 웬리는 그린힐 대위가 소집한 간부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한다. 간부들은 당연히 놀란 반응을 보인다.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해가며 어렵게 확보한 이제르론 요새를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양 웬리는 더 큰 그림을 보고 있다. '전쟁의 천재' 라인하르트가 이끄는 은하제국의 군대가 엄청난 속도로 밀려오고 있다. 페잔 회랑이 넘어간 이상 이제르론 회랑이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어차피 빼앗길 요새라면 민간인 사상자를 내기 전에 빨리 탈출하고 역전의 기회를 모색하는 편이 낫다. 과연 전세는 양 웬리의 예상대로 흘러갈까. 나는 어째 불안하다(양 웬리가 이겼으면!)... 






<은하영웅전설>은 우주에서 펼쳐지는 가상의 전쟁을 그린 판타지 만화인 동시에, 현대 국가들의 정치 체제가 내재한 모순을 파고드는 일종의 정치 만화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권력을 독차지하는 독재보다 다수가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민주주의가 더 낫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그 다수가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를 원할 때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 또한 별로 없다. 


천재의 폭주를 막을 장치가 없는 독재 체제와 천재가 활약할 기회조차 가지기 어려운 민주주의 체제. 둘 중 어느 체제가 더 나은지는 <은하영웅전설> 시리즈를 계속 지켜보면서 확인하시길(4권 제발 빨리 나왔으면 ㅠㅠ). <은하영웅전설 3 : 영웅들의 초상> 뒷부분에는 원작 소설을 쓴 다나카 요시키와 만화가 미치하라 카츠미의 스페셜 대담도 실려 있다. 15쪽에 달하는 만큼 대담 내용도 알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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