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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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라 유의 대표작 <아름다운 그>는 소설보다 만화로 먼저 접했다. <아름다운 그>는 흘음(말더듬증) 때문에 어릴 때부터 줄곧 친구가 없었던 주인공이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 무리의 리더 격인 남학생을 사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BL이다. 처음에는 학교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너무 낭만적으로 보고 미화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거부감이 들었는데, 계속 읽다 보니 개중에는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원작 소설(무려 네 권)도 다 읽고, 실사판 드라마, 영화도 다 봤다. 논란이 있는 나기라 유의 소설 <유랑의 달>을 읽어볼 결심을 한 것은 그래서였다. 이 작가, 논란이 될 만한 소재를 설득력 있게 잘 쓴다 싶었다. 개중에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해서 전체가 그렇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유랑의 달>의 줄거리는 이렇다. 아홉 살 여자아이 가나이 사라사는 '외국인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생활 방식이 자유롭고 애정 표현이 적극적인 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언제까지나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병으로 죽고 엄마마저 다른 남자를 따라 떠나면서 혼자가 된 사라사는 이모의 가족과 살게 된다. 이모의 가족은 사라사의 가족과 정반대로 규율이 엄격하고 서로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다. 심지어 이모의 아들 즉 사라사의 외사촌 오빠는 사라사의 몸에 손을 대기까지 한다. 참다 못한 사라사는 학교 근처 공원에 자주 나타나 아이들 사이에서 '로리콘'으로 불리는 대학생 오빠 후미에게 자신을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한다. 사라사 자신도 설마 응할까 싶었는데 후미가 진짜로 사라사를 데리고 가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로리콘' 즉 '롤리타 콤플렉스'를 다룬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직접 읽어보니 애매하다. 일단 사라사와 후미는 각각 아홉 살, 열아홉 살로 둘 다 미성년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결말쯤에 드러나는 후미의 사연과 이후의 전개를 보면 애초에 후미가 이성애자, 나아가 유성애자인지도 의심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후미가 로리콘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이 소설은 대개 사라사의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사라사가 후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와 불안정했던 상태 등을 감안하면 사라사를 신뢰할 만한 화자로 보기 어렵다. 사라사가 후미를 지나치게 낭만화 하고 있는 걸 수도 있고,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볼 여지도 있다. 후미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장면이 더 많았다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같은 내용이 전개되었을 수도 있다.


의심이나 가능성은 차치하고 소설에 있는 내용만 본다면, 이 소설은 (로리콘보다도) 이성애자 여성이 이성애자 남성을 사랑하며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한다. 금슬이 좋은 부모 슬하에서 자란 사라사는 하루 빨리 자신도 엄마 아빠처럼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를 꿈꿨다. 하지만 사라사가 만난 (후미 이외의) 남성들은 하나같이 사라사를 성욕을 풀 대상으로만 보거나 살림 기계로 이용하고, 사라사가 거부하면 강간, 폭행, 스토킹까지 하면서 사라사를 괴롭혔다. 사라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만 할 뿐 건드리지는 않는 후미 같은 남자는, 적어도 이성애자 남성 중에는 만나기 어렵다. 그러니 만남을 포기하거나 성애 가능성이 없는 남성(아이돌, BL, 만화 등등)만을 만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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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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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해서 샀는데 초판 3쇄다. 빠르게 주문했다고 생각했는데 1쇄가 아니라니. 1쇄 받으신 분들 부럽고요... 어젯밤에 도착한 책을 오늘 오전에 읽었다. 두께는 얇지만 단숨에 후루룩 읽을 만한 내용이 아니고 시간을 들여서 찬찬히 읽어보면 좋을 내용이라서 앞으로 여러 번 정독하게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 여행 갈 때 가지고 가고 싶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공항에서 글 한 편, 숙소에서 시 한 줄, 이런 식으로 읽으면 좋을 듯. 그런 날이 언제쯤 오려나.


전체 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빠르게 훑다가 눈길이 멈춘 대목은 한강 작가님의 하루 루틴이다. 글 제목이 <출간 후에>이고 글 내용 중에 <작별하지 않는다>가 여러 번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 후에 지키신 루틴인 듯하다.


"매일 시집과 소설을 한 권씩 읽는다, 문장들의 밀도로 다시 충전되려고.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과 걷기를 하루에 두 시간씩 한다, 다시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게." (44쪽)


아무리 전업 작가라고 해도 매일 시집과 소설을 한 권씩 읽으신다니 너무 대단하다. 문장들의 밀도로 다시 '충전'되는 기분.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과 걷기를 하루에 '두 시간씩' 하신다는 것도 놀랍다. 소설도 안 쓰면서 운동량은 훨씬 적은 나... 반성한다. 이 시절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선유도공원의 폐허 같은 구조물들과 초록 숲 사이를 걷다 돌아오기도 했다"라고 쓰셨는데(43쪽) 나도 가봐야지. "폐허 같은 구조물"이 어떤 건지 궁금하다.


다음 글에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동안에 지키려고 노력하신 루틴이 나온다. 


1.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가장 맑은 정신으로 전날까지 쓴 소설의 다음을 이어 쓰기.

2. 당시 살던 집 근처의 천변을 하루 한 번 이상 걷기.

3. 보통 녹차 잎을 우리는 찻주전자에 홍차 잎을 우린 다음 책상으로 돌아갈 때마다 한 잔씩만 마시기. (61쪽)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앞의 루틴에서 '읽기'가 '쓰기'로 바뀐 것 외에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매일의 중심 활동이 읽기이든 쓰기이든 간에 그러한 활동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몸을 움직이는 시간을 가진다는 점이 본받을 만하다. 커피가 아닌 '홍차'를 드신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홍차도 종류가 많은데 어떤 홍차 드시는지 궁금하고요... 나도 이제 슬슬 커피 줄이자(라고 맨날 말만 하면서 오늘 벌써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신 나. 반성한다...).


루틴 이야기가 (나에게) 워낙 인상적이라서 루틴 이야기를 길게 썼지만 루틴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고,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과 미발표 시, 산문, 정원 일기 등도 실려 있다. 각각 다른 시기에 다른 목적으로 쓴 다른 형태의 글(들)인데, 책 전체로 보면 이사를 앞두고 그동안 자신이 쓴 시들을 모아서 손수 시집을 엮을 정도로 글쓰기를 좋아했던 아홉 살 여자아이가 그 후에도 열심히 소설과 시, 산문을 써서 마흔 여덟 살에 처음으로 자기 명의의 집을 사고, 그 집에 딸린 작은 정원을 기쁜 마음으로 가꾸는 '전개'가 소설처럼도 읽히고 영화처럼도 보인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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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공죄 4 (더블특전판) - PP 책갈피 + SNS 클리어 카드
히라이 오하시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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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야구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역시 나 같은 야구 문외한이 읽기에는 무리인가 싶었는데 오래지 않아 야구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나와서 안도했다(그래도 역시 야구에 대해 잘 알면 만화의 내용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안 보던 야구를 볼 수도 없고...). 4권에서는 U12 세계 대회 종료 후 아야세가와의 진로를 두고 아야세가와 본인과 주변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드러난다. 


U12 세계 대회에서 괴물 같은 실력을 선보인 아야세가와는 일본 야구계의 신성이자 희망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동세대 선수들과 감독, 코치진에게는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른다. 특히 아야세가와와 같은 포지션인 선수들이나 그들을 서포트하는 어른들에게는 아야세가와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야구 이전에 다른 운동을 할 때에도 (잘해도 너무 잘하는) 자신 때문에 친구들이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했던 아야세가와에게는 지금 같은 상황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사람들은 그저 즐겁게 야구를 하고 싶다는 아야세가와를 이해 못하지만, 아야세가와로서는 즐겁기 위해 하는 야구 때문에 괴로워질 미래가 두렵다.


아야세가와를 보니 문득 한국의 아이돌 연습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돌 연습생 대부분은 아마도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좋아서 연습생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습생이 되면 어릴 때부터 힘든 훈련과 강도 높은 연습을 받느라 학교 수업도 제대로 못 받고, 같은 처지의 연습생들과 매번 경쟁하고 비교 당하며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릴 것이다. 그렇다고 남다른 재능을 가진 이들이 남들과 똑같이 학교에 다니고 평범한 삶을 사는 게 더 나은 걸까. 아이돌을 꿈꿨지만 연습생조차 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연습생들의 고민까지도 부럽게 느껴지지 않을까.


아야세가와와 동년배인 선수들에게는 아야세가와의 고민조차 부러운데, 아야세가와 본인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신의 재능이 짐스럽기만 하다는 게 참 얄궂고 안타깝다. 나로서는 아야세가와가 남들이 뭐라고 하든 하나도 신경 안 쓰는 강철 멘탈의 소유자가 되어서 오타니 쇼헤이같은 대형 선수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과연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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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마취 상태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9
이디스 워튼 지음, 손정희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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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외부에서 볼 때의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에서 느끼는 상태다. 예를 들어 외부에서 볼 때는 행복해 보여도 내면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부에서 볼 때는 행복해 보이지 않아도 내면은 행복한 사람이 있다. 둘 중 하나의 상태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순수의 시대>, <여름> 등을 쓴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이디스 워튼이 1927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 <반마취상태>는 전자와 후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수작이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주인공의 가족 구성을 정확하게 이해해 두면 좋다. 주인공 폴린 맨퍼드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한 번 이혼한 여자다(당시 뉴욕 상류 사회에서 이혼한 여성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안좋았는지는 <순수의 시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폴린의 첫 번째 남편 아서 와이언트는 '뉴욕 구혈통' 출신에 외모도 출중하지만 무직이고 음주와 도박으로 아내의 돈을 축내기 일쑤였다. 결국 아서가 사촌 엘리너와 몰래 만나는 걸 폴린에게 들키면서 이혼을 하게 되었다. 폴린의 두 번째 남편은 폴린의 이혼을 도와준 변호사 덱스터 맨퍼드로 지독한 일 중독자다.


폴린은 아서와의 사이에서 아들 짐을, 덱스터와의 사이에서 딸 노나를 얻었다. 이혼-재혼 가정이지만, 폴린과 폴린의 전 남편과 아들 짐, 며느리 리타, 폴린의 현 남편 덱스터와 딸 노나는 마치 하나의 대가족처럼 서로를 아끼며 친하게 지낸다. 문제는 짐-리타 부부 사이가 예전 같지 않게 되면서 불거진다. 결혼 전부터 예술가 기질이 있었던 리타는 짐과의 결혼 생활에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짐과 이혼한 후 연예계에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를 알게 된 폴린과 덱스터, 노나는 리타를 설득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짐에게서 마음이 떠난 리타는 좀처럼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외부에서 보면 폴린과 덱스터, 노나가 리타를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짐을 위하고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폴린과 덱스터, 노나에게는 각각의 속내가 따로 있다. 특히 폴린은 자신도 이혼을 했는데 같은 여성으로서 리타의 이혼을 말리는 게 말이 되나 싶다. 사실 폴린은 소설 곳곳에서 이중적, 모순적인 행태를 보인다. 폴린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여성이다.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산아 제한과 출산 장려처럼 서로 대립되는 주장을 동시에 옹호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 이중성의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저자가 소설의 제목인 <반마취 상태>라는 단어를 통해 일종의 힌트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출판사 제공 카드리뷰에 따르면 반마취 상태는 '출산하는 여성에게 모르핀과 스코폴라민을 혼합한 진통제를 주사하여 산고를 줄일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출산 자체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게 하는 의학 기술'을 뜻하며, 실제로 1920년대 미국 뉴욕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 반마취 상태 분만이 유행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도입부의 리타의 출산 장면에서 폴린이 반마취 상태 분만을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폴린으로서는 출산을 먼저 경험한 여성으로서 리타가 느낄 고통을 경감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폴린의 캐릭터로 미루어 봤을 때 며느리 걱정을 했다기 보다는 자신이 '깨인' 시어머니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로는 '깨인' 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은 리타의 이혼을 반대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뉴욕의 상류층 가족이지만 며느리 하나 빠진다고 휘청거리는 모습은, 역으로 이 가족이 얼마나 부실하고 허약한 토대 위에서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죽하면 가족 중에 가장 젊고 앞날이 창창한 노나가 결말에 이르러 "차라리 수도원에 들어가 생을 마무리하는 게 낫다"라고 절규했을까. 결국 돈이나 지위나 결혼, 가족 제도 같은 사회적 안전망은 남들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에 무감각해지도록 만드는 마취제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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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의 만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5
이자크 디네센 지음, 추미옥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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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의 만찬>. 오랫동안 영화 제목으로 알았는데 최근에야 원작 소설이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출간되었기에 반가워하며 구입했다. 원작 소설이 얼마나 훌륭하면 영화로 제작되고 그 제목이 내 머릿속에 입력되기까지 했을까. 일단 소설부터 읽고 나중에 영화도 꼭 보기로 다짐했다. 책을 펼쳐보니 <바베트의 만찬> 외에 네 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설을 읽기 전에 작가 이력부터 읽었는데 이력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자크 디네센(본명 카렌 블릭센)은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29세에 남작 폰 블릭센과 결혼해 남작부인이 되었고, 남편을 따라 케냐로 이주해 대규모 커피 농장을 경영했다. 남편에게 옮은 매독 때문에 남은 생 내내 투병했다. 193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 출간을 시도했지만 덴마크와 영국에서는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의 한 여성 작가가 이자크 디네센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미국의 출판사와 연결해 주었고(여돕여), 이후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책이 출간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나 덴마크 문단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어째서...). 


로버트 레드포드, 메릴 스트립 주연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원작도 이자크 디네센이 썼다. 근데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 즉 실화라고. 본명인 카렌 대신 이자크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은 여성의 이름으로 책을 내면 남성의 이름으로 낸 책보다 덜 중요하고 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표제작 <바베트의 만찬>은 노르웨이의 작은 시골 마을이 배경이다. 주인공 자매는 목사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검소하고 신실한 생활을 해왔다. 젊을 때는 자매의 아름다운 외모와 신성한 노랫소리에 반해 관심을 보이는 남성들도 있었지만, 결국 자매는 아무와도 맺어지지 않고 오로지 신만을 섬기며 수녀님처럼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매는 친척의 부탁으로 프랑스에서 온 여인 바베트를 식객으로 맞게 된다. 친척에 따르면 바베트는 파리의 유명한 요리사였는데 혁명으로 집과 일터, 가족까지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세 여성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얼마 전 복권에 당첨되어 큰 돈을 벌게 된 바베트가 자매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상차림을 준비하겠다고 나서면서 긴장이 발생한다. 


이어지는 단편 <템페스트>의 내용도 흥미롭다. 배우를 꿈꾸는 말리는 쇠렌센이라는 연극 연출자의 눈에 띄어 셰익스피어의 연극 <템페스트>의 에어리얼 역을 맡게 된다. 몇 달에 걸쳐 열심히 연습한 말리는 공연을 위해 배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 직전에 이르는 사고를 당한다. 이때 말리가 용감하게 나서서 사람들을 구조하고 배의 난파를 막은 것이 알려지자 배의 주인이 말리를 자택으로 초대하고 며느리감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여성이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두 남자와 엮이면서 원래의 꿈으로부터 멀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작가의 생애와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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