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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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들이 쓴 산문집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점이 있다. 어쩌면 소설가들은 산문도 그렇게 자신의 소설처럼 쓰는 걸까. 황정은의 산문은 황정은의 소설 같고, 박민정의 산문은 박민정의 소설 같고, 한정현의 산문은 한정현의 소설 같고... 이번에 읽은 김초엽 작가의 첫 산문집 <책과 우연들>을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김초엽의 산문은 김초엽의 소설 같구나. 장르를 불문하고 글은 글쓴이를 반영하는구나...


이를테면 소설가가 된 계기에 대해 대부분의 작가들은 '소설이 좋아서', '글쓰기 밖에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해서' 같은 주관적인 답변을 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저자는 포스텍 재학 시절 과학 서평 또는 칼럼 연재로 용돈 벌이를 했고, 소설가보다는 과학 논픽션 작가가 되고 싶었으며, 한국 소설은 등단 이후에야 제대로 읽기 시작했고, 글쓰기는 몇 권의 작법서를 수험서처럼 독파하면서 익혔다, 라는 식으로 자신이 소설가가 된 이유와 과정에 대해 객관적인 팩트를 제시한다. 이런 면이 과학도 출신 소설가다울 뿐 아니라,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담담한 태도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김초엽 소설의 매력과 연결된다고 느꼈다.


작품의 영감을 얻는 방법도 인상적이었다. 화학을 전공한 저자는 전부터 소설보다 과학 논픽션을 더 많이 읽었다. 자신의 관심사를 따라서 과학 논픽션 책을 읽다 보면 어떤 질문들이 떠오르는데, 그 질문들이 곧 소설의 영감이 된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자신의 직간접적인 체험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라서 신선했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소설이라는 핍진한 이야기로 발전시키는 방법은 몇 권의 작법서를 통해 배웠다. 어떤 작법서에는 어떤 특장점이 있고 자신은 그 책을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 등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시험 합격 수기 같기도...?)


저자는 글쓰기를 문자 그대로 '공부'하고 공부하듯이 글을 쓰는 유형의 작가인데, 나는 이렇게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글을 쓰는 작가가 그렇지 않은 작가보다 훨씬 더 믿음이 가고, 작품에 대한 기대와 애정도 높아진다. 문과 과목이 싫어서 이과를 전공했고 과학자가 되려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던 사람이 소설 창작이라는, 어떻게 보면 자신이 그동안 걸어온 길과 전혀 다른 (듯 보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겪은 시행착오와 희로애락을 소개하는 대목들도 좋았다. 저자는 지금의 자신을 만든 건 책과 '우연들'이라고 썼지만,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결국 저자가 해온 '노력들'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음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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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랭면 (여름 리커버)
김지안 지음 / 미디어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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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냉면 없이 어떻게 여름을 버텼을까. 어쩌면 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그들만의 냉면이 있었던 건 아닐까. 김지안 작가의 동화 <호랭면>은 더워도 너무 더웠던 조선 시대의 어느 여름날을 배경으로 한다. 더위 때문에 힘든 건 어른도 어린이도 마찬가지. 그래도 놀거리를 찾아 씩씩하게 동네를 누비던 김 낭자, 이 도령, 박 도령은 웬 서책 한 권이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한다. 서책에 따르면 구범폭포라는 곳에 절대로 녹지 않는 신비로운 얼음이 있다고 한다.


노는 거라면 빠지지 않는 김 낭자, 이 도령, 박 도령은 녹지 않는 얼음을 찾아 구범폭포로 향한다. 얼음을 찾으면 어떻게 먹을지 궁리하고 상상하느라 가는 길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얼음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런 그들 앞에 무서운 호랑이가 나타나는데...! 이야기의 배경과 전개는 전래 동화의 그것인데, 요즘 사람들이 즐겨 먹는 냉면이 나오니 반갑고 새롭다. 무엇보다도 냉면의 시원함과 감칠맛을 그림으로 표현한 솜씨가 대단하다. 집에 걸어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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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틈새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31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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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권여선 작가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을 여러 권 읽고 너무 좋아서 장편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권여선 작가가 1996년에 발표한 첫 번째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의 개정판이 출간되어 읽어보았는데, 작품 자체도 좋았지만 권여선 작가의 원점, 시작점을 알게 된 느낌이라서 더 좋았다. 소설은 서른 살을 앞둔 미옥이 그동안 살았던 방을 비울 날을 일주일 앞두고 이사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옥은 선원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슬하에서 두 자매 중 차녀로 태어났다. 여중, 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명문대에 입학하는 과정은 비교적 순조로웠으나 대학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미옥이 대학에 입학한 시기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재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던 때였고, 인문대생인 미옥 또한 선배의 부름을 받고 언더서클에 가입해 시위 현장을 따라 다니게 되었다.


사실 미옥은 시위 자체보다 언더서클에서 만난 동기들에게 관심이 더 많았다. 미옥은 동기인 여자 친구 둘, 남자 친구 셋과 일종의 그룹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이십 대 내내 미옥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여성적인' 미혜와 '중성적인' 수진은 미옥으로 하여금 앞으로 어떤 여성상으로 살아갈지 결정하는 데 있어 일종의 모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타입의 남자 친구 셋(한영, 명호, 종태)은 미옥에게 각각 사랑, 관심, 우정 등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미옥의 내면을 성장시킨다.


이 소설은 민주화 운동 당사자의 경험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후일담 문학으로도 분류될 수 있고, 한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내면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성장 소설로도 분류될 수 있다. 과거의 사건들을 시간 순서로 배열하지 않고, 이사를 일주일 앞둔 미옥이 곧 있으면 떠날 방 안팎의 풍경들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시간적으로는 뒤섞여 있지만 작품 전체로 보면 유의미한 순서로 각각의 사건들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구성한 점이 기발하고 훌륭하다고 느꼈다.


아울러 이 소설은 한 여성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경험한 일들을 여성 자신의 관점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여성 서사로도 분류될 수 있다, 미옥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부재하고 외가 식구들이 집 안을 점령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동성인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던 것이나 여학교 시절 동급생들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었던 것, 대학생이 된 후에도 미혜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 등은 퀴어 서사의 관점으로도 분석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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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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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학생이 실종된다. 경찰과 이웃 주민들은 열심히 여학생을 찾지만 좀처럼 여학생은 발견되지 않고 단서조차 안 나온다. 그러다 저수지 근처에서 젊은 여자의 옷이 발견된다. 여학생의 옷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경찰은 저수지 주변을 철저히 수색한다. 하지만 그 이후의 단서는 나오지 않고, 그 사이 실종자 수는 다섯 명으로 늘어난다. 한편 돈 벌러 도시로 떠난 엄마를 기다리며 저수지 근처 방갈로에 숨어 사는 삼 형제는 요 며칠 경찰이 주변을 왔다갔다 해서 불안하다. 경찰에게 발견되면 더 이상 굶주리지도 않고 더러운 곳에서 지내지 않아도 되겠지만, 엄마가 곤란에 처할 것이며 영영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아오이가든>은 2000년에 등단한 편혜영 작가가 2005년에 발표한 첫 소설집이다. 제목만 들었을 때는 청아하고 세련된 느낌의 소설이 실려 있을 것 같았는데 읽어보니 전혀 달랐다. 마침 얼마 전에 편혜영 작가의 장편 소설 <재와 빨강>을 읽어서 그나마 덜 놀랐지, 그렇지 않았다면 묘사의 잔인함과 내용의 기괴함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 같다.


버림받고 방치된 존재들이 모여 있는 저수지에 대한 묘사가 일품인 첫 번째 단편 <저수지>의 뒤를 잇는 표제작 <아오이가든>은 <재와 빨강>과 세계관이 상당히 비슷하다. 두 소설 모두 역병이 창궐하면서 봉쇄 조치가 내려진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도시에서 처음으로 역병 환자가 발생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나'는 오랫동안 아무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누이가 나타나 초인종을 누르며 자신을 들여보내 달라고 한다. '나'와 한 집에 사는 '그녀'는 봉쇄로 인한 긴장과 공포로 정신을 놓아버린 듯 보인다.


이어지는 단편 <맨홀>은 맨홀 안에 모여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문득>은 낚시꾼이 발견한 시체 한 구와 남편을 찾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누가 올 아메리칸 걸을 죽였나>는 추리 소설의 결말을 끝내 알지 못하고 경찰에 체포된 남성의 이야기이다. 하나 같이 설정이 기발하고 전개를 종잡을 수 없다. 무덥고 긴 여름밤에 하나씩 읽으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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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우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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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어딘가에 원래는 나였지만 지금은 내가 아닌 존재가 있다면 어떨까. 게다가 생애 주기의 어떤 시기에 도달하면 다시 그 존재와 몸을 합쳐야 한다면. 우다영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의 첫 번째 소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가 바로 그러한 상황을 그린다. 이 세계에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것이 있다. 이들은 원래 한 몸으로 태어나 트윈으로 분리되어 살다가 열여덟 살 생일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면서 한 몸이 된다. 알파인 '나'는 자신의 분신인 오메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기도 하고 오메가와 결합하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기도 하면서 오메가와의 결합을 기다린다. 


그런데 열여덟 살 생일이 되어도 오메가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오메가를 찾아서 집으로 끌고 오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살아온 배경도 다르고 성격이나 취향도 맞지 않아 이 상태로 결합하면 재앙이 벌어질 게 분명하다는 불길한 예감만 든다. 그러나 오메가와 결합하지 않으면 완전한 성인이 될 수 없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전개만 보면 결혼에 대한 비유인가 싶은데, 알파와 오메가가 원래는 한 몸이고 결합 후 다시 한 몸이 된다는 점에서 개인과 개인의 결합인 결혼보다는 개인 안의 서로 다른 인격 또는 자아의 충돌과 화합을 그린 이야기로 읽혔다.


이어지는 단편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은 남태평양의 사모아제도에서 '아즈깔'이라는 식물이 발견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이 풀의 독성에 감염된 사람은 자신이 환생하기 전의 모든 생과 환생한 후의 모든 생을 기억하게 된다. 그 결과 감염자들은 어떤 사건의 인과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게 된다. <긴 예지>는 여섯 살 쌍둥이 자매의 베이비 시터인 효주가 어떤 게임과 관련된 프로젝트에 연루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이 외에도 SF 또는 판타지의 요소가 결합된 기발하면서도 환상적인 내용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문장도 좋아서 앞으로 이 작가의 책을 계속 따라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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