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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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나가오카는 역 앞 쇼핑몰에서 우연히 만난 동창 이시게에게 희한한 제안을 받는다. "저기, 나가오카, 나랑 새로운 사이비 종교 시작해보지 않을래?" 처음에 나가오카는 말도 안 된다며 웃어 넘기려 했지만, 달리 할 일도 없고 대체 누가 이런 허접한 사기에 넘어 오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이시게의 제안을 받아들인 척하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본다. 


<편의점 인간>의 작가 무라타 사야카의 단편집 <신앙>에는 단편소설 6편과 에세이 2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신앙>은 설정부터 강렬하다. 호기심 반 조롱 반의 심정으로 이시게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나가오카는 다른 동창들이 사이비 종교에 대해 비난하는 말을 듣고 의문을 느낀다. 명품이라는 말에 혹해 원가의 몇십, 몇백 배가 되는 돈을 주고 가방이며 화장품, 그릇 등을 사는 것과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신묘한 정수기를 사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예뻐지고 싶어서 성형 수술을 받는 마음과 행복해지고 싶어서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마음이 대체 얼마나 다른가. 극단적이지만 유의미한 질문이다.


생존율이 등급으로 매겨지는 세상을 그린 <생존>, 인간으로 살기가 힘든 나머지 야인이 되는 편을 택하는 사람들을 그린 <토맥윤기>, 모든 것이 균질한 세상에서 살아가던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모든 것이 균질하지 않은 세상으로 여행을 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컬처 쇼크>, 클론 가전 로봇이 보편화된 세상을 상상한 <쓰지 않은 소설>, 인류 멸망 이후 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시회를 다룬 <마지막 전시회> 등도 하나같이 기발하고 인상적이다. 자신을 우주인으로 상상했던 어린 시절의 일화를 그린 <그들>과 '크레이지 사야카'라는 별명 때문에 생긴 일을 담은 <기분>도 에세이이지만 소설만큼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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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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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다섯 살인 '나'는 오랜만에 대학 시절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대화 도중 '나'는 에번의 친구가 자신의 집에 침입한 10대 소년을 총으로 쏴서 죽이게 된 사연을 듣게 되고, 친구들은 그들 중 유일하게 자식이 있는 '나'에게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그 순간 '나'는 이십 년 넘게 알고 지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며 가치관이 비슷하다고 여겼던 친구들과 자신이 지금은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고 느낀다. 달라진 것은 친구들일까 나일까. 무엇이 그토록 비슷했던 그들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앤드루 포터의 소설집 <사라진 것들>에는 로 백인 고학력 중산층 기혼 유자녀 남성이 인생의 중반에 이르러 그동안 자신이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불안과 걱정, 후회와 미련 같은 감정을 느끼는 내용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백인 고학력 중산층 기혼 유자녀 남성이면 인류 전체를 통틀어 최상위 스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작 소설 속 남자들은 자신의 삶을 불안하게 여기고 시종일관 걱정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 단편 <오스틴>의 주인공 남성은 남의 집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총을 맞고 죽은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년의 부모의 감정에 이입해 자기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넝쿨식물>의 주인공 남성은 전 여친 마야가 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려했던 그들의 청춘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한다. <첼로>의 주인공 남성은 첼리스트이자 대학 교수인 아내 나탈리가 파킨슨 병으로 의심되는 증상을 보이면서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성공이 보장된 듯 보였던 그들의 미래가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숨을 쉬어>의 주인공 남성은 어린 아들이 수영장에서 놀다가 익사할 뻔한 일이 있은 후 수시로 공황 상태에 놓인다. <실루엣>의 주인공 남성은 정년직 교수 임용에서 탈락한 후 주변 동료들을 믿지 못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백인 고학력 중산층 기혼 유자녀 남성으로서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위치에 있지만 언제 어디서든 자신 또는 가족에게 질병이나 사고, 범죄 등이 일어나 불시에 삶이 무너질 수 있다고 느끼면서 경계하고 불안해 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이 소설집에는 자주 나온다. 이른바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에 대해 그린 걸로도 볼 수 있지만, (백인 고학력 중산층 기혼 유자녀 남성도 공포를 느낄 만큼) 지금의 미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회적 안전망이 취약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방증으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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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일기
김지승 지음 / 난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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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부모님께서 연달아 수술을 받으셨다. 특히 아버지는 올해 이맘때 큰 수술을 받으시고 현재까지도 경과를 지켜보는 상황이다. 환자의 가족으로서 여러 번 병원을 오가면서 세상에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느꼈다. 서울에 있는 대형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새벽부터 대기하는 환자와 가족들, 수술 전후 환자를 돌보기 위해 몇 주, 몇 달에 걸쳐 근처 모텔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수술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해 검사를 받고 경과를 확인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보이고 들리고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짐승일기>는 암 수술 경험자인 이지승 작가가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현재의 생활에 대해 일기 형식으로 쓴 책이다. 전에 없던 증상을 느끼고 병원을 찾아간 저자는 의사로부터 항암 후유증으로 오는 갱년기 증상일 뿐 갱년기는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산부인과를 찾아가 보았지만 답변은 비슷했다. 갱년기 증상은 갱년기와 무엇이 다른가. 원인이 무엇이든 증상이 있으면 치료를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생각을 말로 하면 아픈 여자, 늙은 여자가 말도 많고 예민하게 군다고 할 것 같아 그만뒀다. 그렇게 저자에게는 치료되지 않은 증상과 언어화되지 못한 상처만이 남았다.


아픈 사람의 삶에 아픔만 있는 건 아니지만 아픔 이외의 것도 아픔으로 해석되는 경향은 있다. 친구와 함께 일본의 가부키 공연을 보던 저자는 무대 위의 어떤 존재를 보고 매혹되었다. 검은 천을 온몸에 두르고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옷을 벗기거나 입하고 소품이나 무대 장치를 이동하는 역할을 하는 그들의 정체는 가부키 용어로 '쿠로코(黑子)'라고 불리는 이들이었다. 분명히 무대 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관객의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기'로 합의된 그들을 보면서 저자는 그들이 꼭 아픈 사람, 늙은 사람, 여성인 사람 같다고 느꼈다. 보이지 않기로 합의된 것을 보는 것이 아픔이라면,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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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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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수와 신복일에게는 자식이 다섯 있다. 그들은 일화, 월화, 금화라는 이름의 딸 셋을 얻은 후 목화와 목수라는 딸, 아들 쌍둥이를 얻었다. 그들은 결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가정은 대체로 편안하고 행복했다. 첫째 일화는 학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둘째 월화는 글쓰기와 연기 등에 재능을 보였다. 금화는 옛말에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말이 있는 딸부잣집 셋째딸이고, 목화와 목수는 쌍둥이답게 늘 붙어 다니며 남다른 우애를 보였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목화와 목수를 데리고 숲으로 놀러갔던 금화가 목화와 목수만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금화가 실종된 건지 납치된 건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족들은 그 날 이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목화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 잠이 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가운데 오직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목화는 그것이 꿈인 줄 아는데, 나중에 기사를 찾아 보고 자신이 꿈에서 구한 사람이 실제로도 생존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목화는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단 한 사람, 금화 언니를 구하는 데 사용하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금화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금화가 사라진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런 능력은 생기지 않는다.


최진영 작가의 장편 소설 <단 한 사람>은 실제의 죽음과 가상의 초능력이 결합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목화는 나중에 자신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도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목화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목화의 외할머니 임천자가 꿈을 통해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했다면, 목화의 어머니 장미수는 자신의 능력을 거부하고 경멸하면서 꿈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구하느라 고생하느니 차라리 잠들지 않고 두통에 시달리는 편을 택한다.


목화는 자신의 능력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세상을 경멸하는 핑계로 삼지도 않는다. 그저 잠이 오면 잠을 자고, 사람을 구해야 하면 사람을 구하고, 떨어진 체력을 좋아하는 일로 보충하면서 살아간다. 목화는 이것이 나무의 생애와 비슷하다고 느낀다. 나무는 인간의 수명의 몇십, 몇백 배에 달하는 세월을 한 자리에서 보내며 자신의 잎이 떨어지는 것도 견디고, 가지가 부러지는 것도 견디고, 줄기를 베어가는 것도 견디고, 끝내 밑동만 남게 되는 것도 견딘다. 그렇게 해서 처음과는 다른 모습이 될지라도 나무는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한다. 마치 이름과 추억을 남기고 가족들 곁에 영원히 살아 있는 금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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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캐드펠 수사 시리즈 1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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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영국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 젊은 시절에는 배를 타고 세계를 떠돌며 십자군 전쟁에도 나갔지만 현재는 수도원의 정원에서 각종 약용 식물을 재배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는 캐드펠 수사에게 어떤 임무가 내려진다. 임무의 내용은 수도원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웨일스에 있는 귀더린이라는 시골 마을에 매장되어 있는 성녀 이니프리드의 유골을 가져오는 것. 웨일스어에 능통한 캐드펠은 통역으로서 로버트 부수도원장과 콜룸바누스 수사, 존 수사 등과 함께 귀더린으로 향하는데, 막상 귀더린에 도착하고 보니 현지 주민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부수도원장과 수사들은 정부와 교회가 이미 허가한 일이라고 설득해 보지만, 귀더린 주민들은 귀더린에서 태어나 귀더린에서 죽은 성녀 이니프리드의 유골을 낯선 외지인들에게 내주는 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 특히 귀더린의 명사이자 주민들로부터 존경 받는 영주인 리샤르트가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수도원 사람들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그런데 이 와중에 리샤르트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용의자로 지목된 인물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존 수사가 투옥된다. 대체 리샤르트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이며 캐드펠 수사는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을 것인가.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은 영국의 추리 소설 작가 엘리스 피터스의 대표작 '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77년 영국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이후 18년 동안 총 21권이 출간되었다. 나는 이 소설을 '정세랑 작가의 인생작'으로 먼저 알았다. 정세랑 작가는 2023년 10월 자신의 첫 역사 미스터리 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발표하면서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역사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오랜 애정과 깊은 관심을 드러낸 바 있다. 정세랑 작가의 추천작 맨 윗자리에 늘 캐드펠 수사 시리즈가 있어서 어떤 작품인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전면 개정판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사실 처음에는 중세 영국의 지명이나 인명이 낯설고, 무엇보다도 130쪽이 넘도록 사건이 등장하지 않아서 읽기가 조금 힘들었다(메모 요망). 하지만 사건이 등장하고 본격적인 추리가 시작된 이후부터는 페이지가 쭉쭉 넘어갔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리샤르트의 가정사로 인해 발생한 사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캐드펠 수사가 일종의 탐정으로서 조사를 시작하고 리샤르트가 가진 돈과 권력, 명예를 둘러싸고 귀더린 주민들뿐 아니라 수도원 사람들까지도 탐욕을 품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용의자의 범위가 넓어지는 과정이 흥미진진했다.


중세 영국의 사회상을 볼 수 있는 점도 좋았다. 영국인들도 스코틀랜드나 웨일스 방언을 못 알아 듣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는 한데, 이 소설에서 잉글랜드 영어를 사용하는 신부들이 웨일스 방언 통역을 필요로 하는 장면을 보면서 통역이 필요할 정도면 방언이 아니라 아예 다른 언어로 보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1977년에 발표되었지만 소설의 배경은 중세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면 경찰과 사법 제도에 의해 처리했을 일을 지방의 자치 권력과 종교에 의해 처리하는 장면들도 흥미로웠다. 이런 식으로 역사 소설과 추리 소설의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점이 역사 미스터리의 매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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