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켄터키주에 사는 일곱 살 소녀 재뉴어리는 어릴 때 엄마를 여의고 식구라고는 아빠뿐인데, 그 아빠는 엄청난 부자인 동시에 열정적인 수집광인 로크 씨를 위해 전 세계를 떠돌며 보물을 발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로크 씨가 소유한 대저택에서 사는 재뉴어리를 보고 사람들은 부러워하지만 재뉴어리의 생각은 다르다. 대저택이 아니라도 좋으니 아빠 엄마와 같이 살고 싶고, 단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로크 씨의 시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다. 바깥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고, 좋아하는 개도 키우고 싶다. 그런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발견한 것이 문제의 '푸른 문'이다.


재뉴어리는 일곱 살 때 로크 씨와 떠난 여행에서 그 문을 처음 발견했다. 그 문을 발견하고 아끼던 가죽 수첩에 '소녀는 그 문을 열었다'라고 적으니 거짓말처럼 문 밖의 세계로 갈 수 있었다. 그때 주운 여왕이 그려진 은화는 오랫동안 재뉴어리의 보물이었다. 재뉴어리는 열일곱 살 생일에 그 문을 다시 발견했다. 보물 상자에서 표지에 <일만 개의 문>이라고 쓰인 가죽 장정의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재뉴어리는 그것이 아빠가 몰래 준비한 생일 선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고, 비통해진 재뉴어리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이 어릴 때 보았던 바로 그 푸른 문이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채로.


앨릭스 E. 해로우의 데뷔작 <재뉴어리의 푸른 문>은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월드판타지상 등 유수의 상에 노미네이트된 화제작이다. 이 소설은 일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같은 전통적인 환상 동화의 공식을 따르는 듯 보인다. 현실에 불만족한 소녀가 어떤 계기로 현실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신비로운 모험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전의 인격보다 훨씬 더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른 문 너머의 세계에서 재뉴어리가 하는 모험은 그저 지루한 일상과는 다른 신비롭고 흥미진진한 경험만은 아니다. 재뉴어리보다 먼저 그 문을 찾은 여성인 애들레이드 리 라슨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과감히 위험한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후에 펼쳐지는 애들레이드의 이야기는 재뉴어리에게 있어서 과거의 이야기인 동시에 미래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현재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문 너머의 세계를 알게 된 재뉴어리는 자신을 구속하는 로크 씨의 대저택을 떠나 실제로 모험을 떠나는데, 이 대목이 무척 감동적이었다.


이 소설은 허구를 가정하는 환상 소설인 동시에 실제를 반영한 역사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의 배경인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에선 유색 인종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분수에 맞게 사는 법"을 모른다고 여겨졌다. 재뉴어리는 어릴 때에는 그러한 차별을 모르다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유색 인종이고 여성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구분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배움(사회화)은 결국 체념으로 이어지기 쉬운데, 재뉴어리는 푸른 문과의 만남을 통해 어떤 한계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임을 알게 된다. 이는 여전히 많은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깊은 감동과 자극을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부커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교도관이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있는 사형수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편지에 따르면 이 사형수는 한 남자를 죽이고 그 사람의 금고에서 3만 엔(현재 가치로 약 1억 6,000만 원)을 훔친 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일로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이므로 실은 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게 있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더 이상의 극형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 그저 저승으로 떠나기 전에 마음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다는 이 사형수의 말에 따르면, 그에게는 일란성 쌍둥이 형이 있고 그가 저지른 모든 범죄와 살인은 바로 이 형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한다. 대체 어떤 사연일까.


에도가와 란포는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1894년생인 에도가와는 1923년 작가로 데뷔한 이래 수많은 추리소설과 탐정소설, 괴기 소설을 발표하며 엄청난 명성과 인기를 얻었다. <에도가와 란포 기담집>은 1924년에 발표된 <쌍생아>부터 1931년에 발표된 <메라 박사의 이상한 범죄>까지 총 16편의 괴기스럽고 잔학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로 실린 단편 <쌍생아>는 일란성 쌍둥이 형을 죽이고 형의 행세를 하며 범죄 행각을 벌이고 다닌 사형수의 이야기를 그린다. 쌍둥이 트릭 자체가 지금은 새롭지 않지만 당시에는 기발했을 것 같고,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성장 과정에서 생긴 차이점을 지우기 위해 화자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자세하게 서술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인간의 악의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범죄로 이어지는지, 첫 번째 범죄가 두 번째 범죄로 연결되고 두 번째 범죄가 세 번째 범죄로 연결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생생하게 묘사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이어지는 단편 <붉은 방> 역시 살인자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인생이 너무 시시하고 지루한 나머지 살인이라는 '유희'에 빠져들었고, 그 결과 99명의 목숨을 빼앗게 되었다고 밝힌다. 언뜻 보기에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현저하게 결여된 나머지 목숨을 빼앗는 행위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이코패스 같은 인물처럼 보이지만 뒤늦게라도 죄책감을 느끼는 걸 보면 반사회성 인격장애는 아닌 것 같고, 그보다는 누군가의 작은 악의로도 죽음에 다다를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목숨은 언제나 위태롭고 이를 강력한 법률이나 사회 제도로 방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 책에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단편 <인간 의자>도 실려 있다. 작가인 요시코는 자신의 팬이라고 밝힌 남자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가구 직공인 남자는 가구 중에서도 의자를 전문으로 만드는데, 어느 날 자신이 만든 의자가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기상천외한 생각을 떠올린다. 예전에 이 단편을 읽었을 때에는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라서 소설의 형식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을 못했는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이중, 삼중의 반전으로 독자를 놀래키는 방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어서 과연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민석의 우리 고전 대모험 3 - 춘향전 설민석의 우리 고전 대모험 3
설민석.최설희 지음, 강신영 그림, 류수열 감수 / 단꿈아이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인이 사랑하는 고전 춘향전을 만화로 재밌게 접하고 역사 공부도 할 수 있어 유익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샤워
다카세 준코 지음, 허하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혼한 지 십 년 차인 서른여섯 살 여성 이쓰미는 며칠 전부터 남편 겐시가 목욕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목욕뿐 아니라 세수도 안 하고 양치도 면도도 안 한다. "얼굴 정도는 제대로 씻는 게 어때?"라고 물어도 남편은 고개만 갸웃할 뿐이다. 이대로 안 씻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지장이 생길 것이다. 아니 당장 이쓰미 자신이 남편의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집 안에서 숨쉬기가 힘들다. 성관계는 물론이고 가벼운 신체 접촉도 엄두가 안 난다. 이대로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계속될 수 있을까. 이쓰미는 씻지 않는 남편을 씻게 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는데...


2022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기를>의 작가 다카세 준코의 소설 <샤워>는 씻지 않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사수하기 위해 분투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쓰미의 남편 겐시가 씻기를 거부하게 된 계기는 직장 내 괴롭힘과 따돌림이다. 회식 자리에서 입사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후배에게 물세례를 맞은 이후로 남편은 수돗물과의 접촉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수돗물로 샤워는 물론 세안과 양치도 안 하고, 수돗물을 마시는 것도 안 한다. 이쓰미는 궁여지책으로 수돗물 대신 생수 사용을 권하지만 경제적 부담이 커서 지속하기 어렵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씻지 않는 남편 때문에 이쓰미의 고민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별거나 이혼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쓰미 자신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보는 건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이쓰미가 남편을 아직 많이 사랑한다. 씻지 않아 냄새가 나도 여전히 남편의 몸을 만지고 싶고 남편이 자신의 몸을 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그렇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 남편의 체취에 익숙해질 즈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씻지 않는 남편 때문에 내가 괴로운 건 어떻게 할 수 있어도 남들이 괴로운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때부터 이쓰미는 남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남편을 지키는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지금 이 상황을 아무 상관 없는 누군가가 판단해줬으면 했다. 비 오는 밤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어도 그 누구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이 도시에서는,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55쪽)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씻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생긴 부부 간의 문제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 간의 거리 문제가 다각도로 그려져 있다. 지방 출신인 이쓰미는 가족은 물론 친척 간의 거리가 지나칠 정도로 가깝고, 회사 동료나 이웃들과 만나면 안부 인사를 나누는 정도는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반면 도쿄 출신인 남편은 친척은 물론 가족과도 개인 대 개인으로서 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웃은 같은 동네,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 정도로 인식한다. 회사 동료들에게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해도 곧바로 항의하지 않고, 악취를 풍기는 정도로 일종의 수동 공격을 할 뿐이다.


지방 출신이지만 도쿄에서 산 지 십여 년이 지난 이쓰미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걸 경계하는 도쿄 사람들의 태도를 산뜻하게 느끼면서도, 타인으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입는 상황에 처하는 것 역시 경계하는 도쿄 사람들의 태도를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정신적으로는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도 위기 상황인 남편을 누구라도 도와주기를 바라고, 남편 자신도 이쓰미에게 한 번이라도 좋으니 도와달라는 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도 선뜻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남편의 마음도 사랑, 도와달라는 말을 못 들었어도 기꺼이 도와주는 아내의 마음도 사랑이지 않을까. 대놓고 써있지는 않아도 부부 모두 사랑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겨도 계속 사랑하겠다는 자세가 엿보였기 때문에 결말이 더욱 더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33년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는 장애가 있는 아들을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인슈타인이 극찬한 천재였던 에렌페스트는 나치가 정권을 잡고 유대인과 장애인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는 것을 보면서 유대인이면서 장애인인 아들의 미래를 비관했다. 하지만 그뿐일까. 에렌페스트가 속한 물리학계에선 몇 년 전부터 양자역학이 고전물리학의 위상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고전물리학을 신봉해 왔던 에렌페스트는 자기 비판과 열등 의식에 시달렸다. 여기에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전쟁 위기가 고조되면서 그의 불안과 우울 증세는 더욱 더 심각해졌는데...


2021 부커상 최종 후보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의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의 신작 장편 소설 <매니악>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책은 한 부에 한 명씩, 총 3부에 걸쳐 세 명의 천재들을 소개한다. 1부의 주인공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이고, 2부의 주인공은 헝가리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존 폰 노이만이며, 3부의 주인공은 (무려!!) 한국의 전직 프로 바둑 기사 이세돌이다. 


2부의 주인공 폰 노이만은 1부의 에렌페스트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천재였지만 삶의 양태는 사뭇 달랐다. 고전물리학의 대가였지만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 에렌페스트와 달리, 폰 노이만은 전공인 수학 외에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드러내며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나치의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에도 나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는 그 유명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축으로 일하며 오늘날 대부분의 컴퓨터 설계의 기본으로 여겨지는 초기 형태의 컴퓨터를 만들었고 이를 '매니악(MANIAC)'이라고 불렀다.


1부와 2부는 작가의 전작인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와 마찬가지로 인물에 초점을 맞춘 반면, 3부는 인물이 처한 상황 자체를 중점적으로 그린다. 그 상황이란 한국인들도 널리 아는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 간의 대결이다. 이세돌은 당시 알파고를 상대로 다섯 번의 대국에 임해 네 번의 패배와 한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폰 노이만이 개발한 초기 컴퓨터를 기반으로 급속도로 발전한 인공 지능 기술이 그것을 만든 인간의 지능을 넘어섰음을 보여준 동시에, 인류 역사가 파국에 다다르고 있다는 (에렌페스트를 좌절시킨 바로 그) 예감을 더욱 짙게 한 사건이다.


하지만 그뿐일까. 바둑의 본질은 재미를 얻기 위해 하는 게임인데 인간인 자신은 바둑을 두면서 재미를 느끼는 반면 알파고는 그렇지 못하다는 요지의 이세돌의 말을 읽으며, 나는 결국 (기계와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이 재미이며 재미를 느끼는 한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세돌은 또한 알파고와의 대결을 통해 그동안 바둑계에서 당연시했던 수들을 관습적으로 느끼게 되었으며 앞으로는 훨씬 더 참신한 수들이 더 많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마치 고전물리학의 종말로 여겨졌던 양자역학이 물리학의 더 큰 발전을 이끈 것처럼, 인류의 위기로 여겨지는 문제들이 역으로 인류에게 기회일지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