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즈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핸래티의 시골 마을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아버지, 새어머니, 이복 남동생과 함께 산다. 로즈의 새어머니 플로는 동화에 나오는 계모처럼 대놓고 로즈를 괴롭히지는 않지만 수시로 로즈와 신경전을 벌인다. 로즈를 상대하기가 힘에 부칠 때면 플로는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로즈에게 '장엄한 매질'을 가한다. 로즈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돌봄과 애정을 주기는커녕 정신적, 신체적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와 새어머니 때문에 절망하는 한편으로 그런 부모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저주한다.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고향 마을 전체를 잠식한 빈곤과 무례함, 무지성, 폭력을 혐오하는 로즈는 이후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진학한다. 로즈는 대학에서 만난 패트릭과 몇 년 간의 연애 끝에 결혼한다. 로즈가 백화점을 운영하는 집안의 후계자인 패트릭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고향 마을 사람들은 로즈가 자신의 형편보다 훨씬 좋은 남자를 만났다고, 성공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로즈 자신은 패트릭과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를 실감할 때마다 자괴감을 느끼고, 그런 남자를 배우자로 택한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결국 이들의 결혼은 십 년 만에 끝이 나고, 이혼 후 로즈는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거지 소녀>는 2013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앨리스 먼로가 1978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앨리스 먼로는 단편으로 유명한 작가인데, 이 소설은 드물게도 장편이다. 엄밀히 말하면 로즈라는 한 여성의 생애를 열 편의 단편으로 구성한 연작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각각의 단편이 한 편의 소설로서 완결성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번에 열 편의 단편을 다 읽은 독자로서는 아무래도 이 소설을 열 편의 단편이 아닌 한 편의 장편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까.

 

예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에는 로즈의 유년기와 청소년기 이야기가 흥미로웠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을 때는 이혼 이후의 이야기가 더 눈에 들어왔다. 이혼 후 로즈는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이후 배우와 강사 일을 병행하며 돈을 벌고 경력을 쌓는다. 패트릭이 소유한 집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했던 시절에 비하면 여러모로 결핍되고 초라한 생활이지만, 로즈는 생애 그 어떤 시절보다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부자 아빠와 사는 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기엔 역부족이고, 사랑할 남자를 찾고 그 남자와 관계를 지속하는 일은 늘 어렵다.


어머니와 갈등을 겪는 소녀 로즈의 이야기로 시작한 이 소설은 바로 그 새어머니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중년 여성 로즈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로즈의 아버지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새어머니 플로 혼자 오랫동안 고향 마을에서 살았는데, 플로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고 증세가 심각해지자 로즈와 이복 남동생 브라이언은 플로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한다. 플로는 로즈에게 결코 좋은 어머니가 아니었지만, 돌이켜 보면 로즈 역시 플로에게 좋은 딸은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에 플로 자신도 어떤 어머니가 좋은 어머니인지 경험해 보거나 생각해 볼 새 없는 삶을 살았을 텐데, 플로에게 그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 아닐까.


하물며 로즈는 친딸인 애나가 어릴 때부터 헤어져 살았고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로즈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엄마 역할을 해주었던 플로가 훨씬 더 엄마다운 엄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플로의 삶이 더 가치 있고 로즈의 삶이 덜 가치 있는 건 아니다. 막상 플로 자신은 엄마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 인생을 살았던 로즈가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은 타인의 삶에 대해 자기가 아는 정도 밖에 알 수 없고, 자신의 삶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렇게 불완전한 채로 살다가 영원히 완성되지 못한 채로 떠나는 것이 인생인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도와 영토 - 2010 공쿠르 상 수상작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1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드 마르탱은 일견 부유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듯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건축가인 아버지는 늘 바빠서 기숙학교에서 지내며 외로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예술대학 졸업 후 상업 사진 작가가 된 제드는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아버지와 함께 장례를 치르러 가던 길에 우연히 미슐랭 지도를 보고 영감을 얻는다. 파리에 돌아와 작업을 시작한 그는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고, 신인 사진 작가로는 드물게 빠른 속도로 스타덤에 오른다. 이른 나이에 부와 명예 그리고 아름다운 연인까지 얻은 그는 돌연 사진에서 회화로 장르를 바꾼다.


사진을 그만둔 제드는 그 후 칠 년 이상 두문불출하며 회화 작업에 몰두한다. 그는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제프 쿤스, 데이미언 허스트 같은 유명인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초상화로 다시 한 번 큰 주목을 받는다. 그의 그림들은 고가에 팔리고, 전보다 더 큰 부와 명예를 얻은 그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한다. 그것은 영국에서 혼자 생활하며 작업 중인 소설가 미셸 우엘벡과의 협업이다. 제드는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지닌 미셸에게 이제까지 다른 누구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친밀감을 느낀다. 그는 미셸과의 오랜 우정을 꿈꾸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그의 희망은 사라지고 만다.


2010 공쿠르상 수상작인 미셸 우엘벡의 소설 <지도와 영토>는 일견 전통적인 예술가 소설처럼 보인다. 주인공 제드 마르탱은 일견 성공한 예술가로 보인다. 이른 나이에 남들이 부러워 할 만한 부와 명예를 얻었을 뿐 아니라 사진과 회화 양쪽에서 모두 인정받고 연애까지 잘한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항상 고독하고 공허하다.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와는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고, 연인인 주느비에브와는 일적으로도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에게는 친구다운 친구도 없는데, 처음으로 영혼이 통하는 친구라고 여겼던 미셸과는 우정을 길게 이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모든 걸 갖춘 제드의 인생을 그토록 고독하고 공허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내 생각에 그것은 현대 사회의 핵심인 자본주의와 상업주의다. 제드의 아버지는 돈을 버느라 바빠서 아들에게 소홀했다. 제드의 사진과 회화는 작품 자체의 가치보다는 유명한 제품(미슐랭 지도)과 유명한 인물을 차용한 것이 화제가 되어 유명해졌다. 그의 작품은 기획과 홍보, 판매 단계를 거치며 상품으로 전락했다. 일을 통해 만난 사람과는 일을 떠난 사이로 발전하기 어렵고, 일이 끝나면 자연히 그 관계도 소멸한다. 이런 사회에서 예술가는 예술이라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생산자에 불과하며, 관계는 돈보다 높은 가치를 가지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작가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 등장할 정도로) 유머와 위트가 곳곳에 번뜩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우울하고 허무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그런 나를 눈여겨 봐주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고, 그 사람과는 결국 헤어지고, 그런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는 무슨 낙으로 살아야 할까. 한때는 기발하고 독창적이라고 극찬을 받았던 작품들이 금세 잊히고 사라지는 것이 예술이라면 예술가는 무엇을 위해 창작을 하는 걸까. 유명해지고 부유해진 이후의 삶은 유명함과 부유함을 견디는 것뿐이라면 삶을 지속할 이유가 있는 까. 결코 유명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모르는 여자가 말을 건다 앗코짱 시리즈 2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7세 여성 에노모토 아케미는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유명 푸드기업의 5년차 직장인이다. 고객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아케미는 고객들의 민원과 직장상사의 갑질에 시달린 나머지 매일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을 기다리며 '누군가 뛰어들어 죽어서 회사에 늦게가길' 빌 정도로 마음이 많이 지친 상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케미는 지하철 플랫폼의 주스 판매대에서 일하는 키 큰 여자로부터 기분 나쁜 색깔의 스무디 한 잔을 건네받는다. "시금치랑 고마쓰나랑 사과 스무디예요. 무료 캠페인 중입니다. 마셔 봐요." 안 받을 수도 없고, 받은 걸 버릴 수도 없어서 억지로 마셨는데 그 날 이후 아케미의 인생이 바뀐다.


유즈키 아사코의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모르는 여자가 말을 건다>는 '앗코짱 신드롬'을 일으킨 전작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의 후속편이다. 전작에서 도시락 바꾸기 놀이로 직장 후배인 미치코의 인생을 바꾼 앗코 여사가 이번에는 스무디로 아케미의 인생을 바꾼다.


미치코는 작은 출판사의 영업 보조이고 아케미는 대기업의 정사원이지만, 두 사람은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사회가 정해놓은 루트대로 사는 것을 정답으로 여기고 루트에서 벗어나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자신이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남들이 바라는 것, 하라는 것을 하면서 몸은 몸대로 지치고 마음은 마음대로 괴롭다. 그런 두 사람에게 앗코 여사는 다른 인생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에도 그 방법은 직접적인 설교가 아니라 간접적인 힌트다. 


앗코 여사는 일 때문에 너무 지쳐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아케미에게 직접 만든 스무디를 먹인다. 그동안 바빠서 외식이나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때웠던 아케미는 처음엔 스무디의 푸르죽죽한 색상과 시금털털한 맛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점점 몸이 건강해지고 불면증이 해소되고 스트레스가 덜 쌓이는 것을 체감하면서 나중에는 앗코 여사가 만든 스무디를 마시기 위해 출근길을 기다리는 지경(?)이 된다.


이 책에는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에서 앗코 여사에게 도시락을 싸주었던 직장 후배 사와다 미치코의 현재 이야기도 나오고, 기시와다 도코, 와카바야시 사에 등 새로운 캐릭터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어느 이야기나 재미있게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 - 런치의 앗코짱 앗코짱 시리즈 1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23세 여성 사와다 미치코는 전문대 졸업 후 도쿄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 영업 보조로 취직했다. 미치코는 주로 혼자서 밥을 먹는데, 정사원은 파견 나온 영업 보조와 밥을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영업부 정사원은 한 명 빼고 전부 남성이라서 같이 밥을 먹기가 껄끄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날 미치코가 언제나처럼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고 있을 때, 영업부의 유일한 여성 정사원인 구로카와 아쓰코, 일명 '앗코 여사'가 다가와 말을 건다. "다음주 일주일 동안 내 도시락을 싸주지 않겠어? 물론 사례는 할 거야. 내 일주일 점심 코스와 바꾸기 놀이를 하자고."


반찬이라고는 톳과 고기 감자 조림과 콩자반 정도인 자신의 도시락을 직장상사가 먹는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앗코 여사의 큰 키와 진지한 목소리,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에 기가 죽은 미치코는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 다음 주부터 시작된 도시락 셔틀, 아니고 도시락 바꾸기 놀이의 내용은 상상 이상이다. 앗코 여사는 미치코가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자신이 먹는 대가로 매일 1천 엔 짜리 지폐와 그 날의 미션이 적힌 쪽지를 건넨다. 월요일엔 회사 근처 식당에서 파는 카레, 화요일엔 가벼운 조깅 후 샌드위치와 스무디... 이런 식으로 날마다 다른 미션이 미치코의 하루를 바꾸고 인생을 변화시킨다.


유즈키 아사코의 소설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는 출간 직후 일본에 '앗코짱 신드롬'을 일으킨 화제작이다. 제목만 보고 갑질하는 직장상사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읽어보니 갑질은커녕 '나도 이런 인생 선배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한 직장상사의 이야기라서 놀랐다. 


사실 앗코 여사가 미치코에게 주는 가르침은 그 자체로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미치코처럼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도시락을 혼자 먹는 사람의 인생은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다. 때로는 회사 근처에 줄서서 먹는 식당에 가보기도 하고, 일부러 운동 삼아 먼 곳까지 가보기도 하고, 직장 내의 다른 사람에게 같이 점심 먹자고 말이라도 걸어봐야 뭐라도 변화가 생긴다. 매일 다른 장소에서 다른 메뉴를 먹는 일은 앗코 여사 자신에게도 힘이 부치는 일인지, 앗코 여사는 이를 루틴화했다. 월요일엔 외식, 화요일엔 운동, 수요일엔 서점, 목요일엔 상사와 약속... 이런 식으로 각자 자신에게 맞는 점심 루틴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작은 회사에 다닌다고, 파견 사원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을 미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생각하지 말라는 메시지도 좋았다. 이제는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정년까지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실제로 앗코 여사와 미치코가 다니던 작은 출판사도 결국 망해서, 앗코 여사는 자기 사업을 시작하고 미치코는 다른 회사로 옮긴다. 마지막에 실린 단편 <여유 넘치는 비어 가든>의 주인공 사사키 레미는 종합 IT 상사 시절 창사 이후 가장 '써먹을 데 없는' 사원이라는 구박을 받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자영업자로 변신하며 180도 다른 인생을 산다. 결국 별 볼 일 없는 인생의 반전을 만들어 내는 건 나 자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래빗홀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1651년 출간한 저서 <리바이어던>을 통해 자연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군주가 통치하는 국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학창 시절 사회 수업 시간에 이러한 내용을 배운 것을 기억하지만, 사람들을 규율하는 법이나 질서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경험한 적은 없다. 현재의 아메리카나 오세아니아 등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여 그 지역에 새로운 사회 체계를 만들었다고 믿었던 사람들도, 실제로는 그 지역에 본디부터 거주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지우고 자신들이 속해있던 지역의 사회 체계를 가져와 이식한 것에 불과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무법 상태를 극복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화성의 경우에는 어떨까. 2023년에 출간된 배명훈 작가의 연작소설집 <화성과 나>는 화성에 인류의 이주가 본격화될 경우 어떤 세계가 들어설 것인지 상상한 내용을 담고 있다. 화성은 현재까지 생명체가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을 규율하는 법이나 질서가 부재하는 리바이어던 상태에 부합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이과 출신의 우주비행사나 과학자가 아니라 문과 출신의 정치가 또는 관료로서 화성에 파견될 경우 어떤 세계를 건설할 것인가. 출신 국가는 물론이고 사용하는 언어, 따르는 종교, 관습, 문화 등이 각기 다른 사람들을 '화성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결속시키기 위해 당장 필요한 입법, 행정, 사법 제도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가장 먼저 답하는 소설이 첫 번째로 실린 단편 <붉은 행성의 방식>이다. 인류의 화성 이주가 시작된 지 지구 시간으로 6년 반이 지난 시점에 화성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행성관리위원회 소속의 지요와 희나는 신고를 받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가지만, 화성에서의 첫 살인 사건이다 보니 수사에 필요한 기본적인 절차나 규칙이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당황한다. 행성관리위원회는 공식적인 정부도 아니며 강제력도 없다. 범인이 잡힐 경우 그를 처벌할 형법도 없다. 조종사들이나 과학자들은 상식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2,400명의 주민 중에 누구의 상식을 따를 것이며 또 그걸 어떻게 정한단 말인가.


두 번째 단편 <김조안과 함께하려면>에서는 화성의 행정관료가 되기 위한 방법을 상상한다. 다재다능한 김조안을 흠모한 나머지 그의 화성행도 함께 하려고 준비 중인 '나'는 (아직) 아무도 살지 않는 행성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학문은 법학이나 행정학이 아닌 기상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어지는 단편 <위대한 밥도둑>에서는 인류의 화성 이주가 본격화될 경우 식량 자원의 도입 순서를 어떻게 정할지 상상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간장게장을 먹고 싶은 화성의 한국인들과 성게초밥을 먹고 싶은 화성의 일본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음식을 먼저 들여오겠다고 싸울 경우 누가 중재하고 어떻게 타협안을 내놓을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네 번째 단편 <행성봉쇄령>에서는 지구-화성 간 사이클러 운항 중에 근지구궤도동맹으로부터 불합리한 명령을 받는 경우를 그린다.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국가 및 동맹에 의해 국제 사회의 안정과 평화가 위협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대책이 없는 상황을 보면서, 지금도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비슷한 상황이 우주적인 스케일로 일어날 경우에 대한 대책 또한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단편 <행성 탈출 속도>에서는 화성으로 이주한 부모를 둔 '나'가 자신의 모든 개인 정보가 데이터로 수집되는 것에 대한 반감과 고학력자가 수두룩한 환경에 대해 압박감을 느끼고 지구로 '탈출'하기를 선택하는 과정을 그린다.


마지막 단편 <나의 사랑 레드벨트>의 '레드벨트'는 도시의 무질서한 확산을 방지하고 자연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지정하는 개발 제한 구역인 '그린벨트'의 화성 버전이다. 행성의 인간 대리자인 정반음은 우주선 동기이자 존경받는 도시 건설 전문가인 문결에게 레드벨트를 해제해 달라는 청탁을 받은 이후로 주간 불면증에 시달린다. 레드벨트의 수호자를 자처하지만 동기 사랑이 지극한 반음으로서는 문결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반음이 살고 있는 화성은 사람들을 규율하기 위한 제도나 법 등이 이미 마련된 듯 보이지만, 인간 자신의 한계 때문에 (불면증에 걸릴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겪는 걸 보면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극복하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