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본 남자
데버라 리비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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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가을의 런던. 28세 남성 솔 애들러는 애비 로드를 걷다가 자동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한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병원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여자친구 제니퍼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솔은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라고 말하고는 원래 가던 길을 간다. 제니퍼와 만난 솔은 사진 작가인 제니퍼의 촬영을 도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얼마 후 갑자기 제니퍼가 솔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충격을 받은 솔은 동베를린으로 떠난다. 역사학도인 솔의 전공은 동유럽 공산 국가 연구인데, 그곳에서 만난 언어 강사 발터 뮐러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영국 작가 데버라 리비의 소설 <모든 것을 본 남자>는 먼저 읽은 그의 에세이 <알고 싶지 않은 것들>, <살림 비용>과 비슷한 점이 별로 없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 <살림 비용>이 작가 자신이 여성으로서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에 관한 책이라면, <모든 것을 본 남자>는 남성인 주인공의 청년 시절부터 노년의 일을 그리기 때문에 여성만의 경험이나 생각에 관한 비중이 적고, 있어도 주변 인물의 그것으로서 등장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여성의 목소리를 축소하거나 무시하는 내용인 건 아니다. 


주인공 솔 애들러는 1980년대를 살았던 남성으로서는 드물게 눈 화장을 하고 어머니의 유품인 진주 목걸이를 하고 다닐 정도로 관습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이다. 여성과 남성 모두를 사랑하는 양성애자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유대인이고 노동계급 출신이며 공산주의자인 아버지를 두었다. 여러 면에서 그는 약자, 소수자의 정체성을 지녔고, 그 자신도 그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여자 관계에 있어서는 절대 약자가 아니다. 제니퍼를 사귈 때 그는 제니퍼의 룸메이트에게 추파를 던졌다. 발터와 자면서 발터의 여동생 루나를 탐했다.


루나는 솔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영국에서 동베를린으로 올 때 파인애플 통조림 하나만 사달라고 부탁했을 뿐이다. 그러나 솔은 루나가 좋아하는 비틀즈의 앨범 재킷을 모방해 자신이 직접 애비 로드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루나에게 가져다줄 뿐이다. 동베를린에서 탈출해 리버풀에 살면서 의대에 다닐 거라는 루나의 계획을 도울 마음도 없다. 그저 루나의 몸을 탐하고 루나에게 사랑(주지 않고) 받기만을 원했던 대가는 수십 년이 흐른 후에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만남으로 찾아온다. 모든 것을 보았지만 진정으로 본 건 없는 남자의 쓸쓸한 말로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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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민 토킹
미리엄 테이브스 지음,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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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을에 사는 여자들에게 갑자기 단체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릿속이 몽롱하고 몸에는 핏자국이 있고 어떤 여자는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한 것이다. 문제를 호소하자 같은 마을에 사는 남자들은 귀신과 악마의 소행이라며 오히려 여자들을 비난하고 벌주려 한다. 옛날에 유행한 귀신 이야기 같은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2006년부터 2009년 사이에 볼리비아에 있는 한 메노파 신자 공동체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남자들이 '귀신과 악마의 소행'이라고 했던 일의 정체는 알고 보니 한밤중에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동물용 마취제를 먹이고 강간한 것이었다.


캐나다의 작가 미리엄 테이브스의 소설 <위민 토킹>은 바로 이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아우구스트 에프는 오나 프리센의 의뢰를 받고 메노파 공동체 여성들의 회의록을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된다. 여성들이 남성에게 회의록 작성을 맡긴 이유는 메노파 공동체에선 읽기와 쓰기를 남성에게만 가르치고 여성에게는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회의의 목적은 여성들을 강간한 남성들과 그들의 보석금을 벌기 위해 다른 도시로 간 남성들이 48시간 이후에 돌아올 예정인데, 그들이 돌아오면 여성들은 더 이상 이 마을에 살 수 없으니 그 전에 그들을 용서할지 말지 결정하자는 것이다.


여성들의 반응은 크게 두 편으로 갈린다. 한 편은 마을에 남아서 싸우자는 것이고, 다른 한 편은 마을을 떠나자는 것이다. 두 편으로 나뉜 여성들은 각각 일리 있는 의견을 펼친다. 남아서 싸우자는 여성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내 이 마을에서 지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살 길이 없고, 원수도 용서하라는 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견해를 펼친다. 마을을 떠나자는 여성들은 마을에 계속 남아봤자 과거와 동일한 고통과 폭력이 반복될 따름이며, 자신들이 남성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강간을 당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신에게 더 무슨 기대를 하느냐고 반론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고은 시인이 언급되는 대목이다.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고은이라는 한국 시인의 이야기였다. 나는 여자들에게 그가 어떻게 자살을 네 번이나 시도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71-2쪽). 여성들은 고은이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네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고도 끝내 살아간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들도 그렇게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아마도 고은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 모르고 이 대목을 썼을 텐데, 안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피해자들의 고통은 계속되는데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를 자처하는 소설 속 현실이 실제와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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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길로 돌아갈까?
게일 콜드웰 지음, 이승민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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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점이 많다고 해서 누구나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자기 자신과 너무 비슷한 사람에게는 일부러 거리를 두거나 질투심을 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책의 저자인 게일 콜드웰이 어느 문인 모임에서 처음으로 캐럴라인 냅을 만났을 때 곧바로 친구가 되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둘 다 비혼 여성 작가인 데다가 사는 지역도 비슷하니 가깝게 지내면 각자의 고유성 또는 정체성이 흐려질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몇 년 후 산책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둘 다 개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이 정도로 공통점이 많으면 운명이다. 받아들이는 수 밖에.


그런데 막상 친해지고 보니 두 사람은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많았다. 일단 당시 게일은 사십 대였고 캐럴라인은 삼십 대 중반이었다. 게일은 미국 남부의 시골 마을에서 농부의 딸로 자란 반면 캐럴라인은 미국 동부의 대학도시에서 교수의 딸로 자랐다. 그러나 둘 다 자신의 가정 환경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며, 어린 시절에 앓은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다리가 약간 불편하고, 알코올 중독과 거식증, 실연의 상처 등으로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깊은 이해와 공감을 나누게 되고, 서로의 연인조차 부러워 할 정도의 우정을 쌓았다.


그렇게 함께 개를 키우고 산책하고 배를 타면서 오래오래 정답게 늙어가기를 바랐건만, 어느 날 갑자기 캐럴라인이 폐암 선고를 받으면서 둘은 이별을 맞게 되었다. 병이 발견되었을 때 이미 4기였던 데다가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없었다. 준비하지 못한 이별의 여파는 캐럴라인이 떠난 후에 왔다. 캐럴라인과 함께 산책했던 길을 혼자서 걷고, 캐럴라인과 함께 배를 탔던 강에서 혼자서 노를 저을 때마다 캐럴라인의 빈 자리를 느꼈다. 캐럴라인의 반려견 클레먼타인을 볼 때마다 캐럴라인이 생각났다. 영문도 모른 채 이별을 맞고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는 개의 모습이 꼭 자신 같다고 느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 생각이 많이 났다.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후에 종종, 아니 자주 그 친구 생각을 한다. 비가 오면 그 친구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었던 거리의 풍경이 떠오르고, 그 친구가 좋아했던 음식을 보면 그 친구한테 한 번이라도 더 사줄 걸 싶다. 게일은 캐럴라인과 더 오랫동안 더 친밀하게 지냈으니 후회나 미련, 아쉬움과 그리움이 더 클 것 같다. 헤어짐이 아쉬워서 자꾸만 먼 길로 돌아가자고 말하게 되는 친구를 내 인생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만난다 해도 너의 자리를 채우지는 못할 거야,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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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것들
앨러스데어 그레이 지음, 이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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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생 맥스 맥캔들리스는 다들 괴짜라고 조롱하는 의학 교수이자 천재 외과 의사인 갓윈 백스터를 흠모한다. 어느날 갓윈의 부름을 받은 맥스는 갓윈으로부터 자신의 조수가 되어 어떤 일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일이란, 갓윈의 저택에 사는 벨라라는 여성의 발달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다. 벨라는 아름답고 성숙한 여성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정신 연령이나 지적 수준은 신생아 레벨을 겨우 벗어난 정도다. 맥스는 벨라의 일상을 관찰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고 청혼을 하기에 이른다. 벨라는 맥스의 청혼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은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며 던컨 웨더번이라는 변호사와 여행을 떠난다.


여기까지가 2023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2024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비롯한 4개 부문 수상에 빛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가여운 것들>의 초반 줄거리이다. 나는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원작 소설을 읽었는데, 일단 영화가 너무 좋았다.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 미술, 의상, 음악 등이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고, 무엇보다 여성의 자유와 욕망, 성장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풍자가 영화 곳곳에 녹아 있으며 여성 스스로 그러한 억압을 극복하고 파괴하는 과정을 그린 점이 너무나 감동적이고 만족스러웠다.


이러한 마음을 품은 채로 읽은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원작 소설은, 놀랍게도 영화보다 더 훌륭했다. 소설은 일견 영화와 비슷한 줄거리를 따르는 듯 보인다. 성인 여성의 몸을 가졌지만 정신 연령과 지적 수준은 한참 어린 벨라. 그런 벨라를 사랑하는 맥스와 벨라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는 변호사 던컨. 이어지는 여행과 벨라의 성장 그리고 각성... 결국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 벨라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해피 엔딩을 맞는 영화와 달리, 소설은 조금, 아니 전혀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소설에선 영화에서도 소설에서도 지고지순하게 벨라를 사랑했고 결국 벨라의 남편이 되는 맥스의 실체가 벨라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밝혀진다. 


영화 <가여운 것들> 공개 당시 선정성 논란이 있었는데(벨라가 무수히 많은 남성들과 성관계를 가지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 비하면 소설은 선정성이 낮다. 가독성이 좋은 소설은 아니라서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소설을 읽는 편이 훨씬 이해가 잘 된다. 영화만 봤다면 소설도 꼭 읽어보시길. 아직 둘 다 안 봤다면 영화부터 보고 소설을 읽으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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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 인문 기행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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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본의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가 일본 고교 야구의 꿈의 무대로 불리는 '고시엔'에서 우승했다. 뉴스를 보면서 한국인으로서 가슴이 벅찬 한편으로 지난해 12월 18일 타계한 故 서경식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났다. 서경식 선생님은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난 분으로, 1970년대 '재일조선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조작 사건으로 구속된 두 형(서승, 서준식)의 석방과 한국 민주화 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런 서경식 선생님이 고시엔 구장에 '동해 바다'로 시작되는 교가가 울려 퍼지고 자신들의 뿌리가 조선 또는 한국임을 자랑스러워 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런 마음을 품고 읽은 이 책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은 서경식 선생님의 유작이다. 이 책은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영국 인문 기행>에 이은 '나의 인문 기행' 시리즈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책이다. 앞의 두 권도 밝은 분위기는 아니지만 이번 책은 유난히 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에게 미국은 결코 좋은 추억으로 남은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1985년 저자가 처음으로 미국에 방문했을 때 저자의 목적은 누명을 쓰고 한국의 교도소에 수감 중인 두 형의 구명 운동을 도와줄 인권 단체를 찾는 것이었다. 언어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갖은 고생을 했지만 원했던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2016년 미국에 갔을 때는 트럼프가 집권 직전이었고, 2020년 마지막 미국 방문 때는 팬데믹 직전이었다. 불안한 현실과 비관적인 미래 때문에 우울한 마음이 들 때마다 저자는 미술관을 찾았다. 저자는 원래 미국 회화는 유럽 회화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유명한 미술관이 많지만, 유럽의 유명한 미술 작품들을 많이 가져다 놔서 유명해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보니 미국 회화는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만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수틴의 초상>,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본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디트로이트 산업> 등 인상적인 작품이 많았다.


저자는 미국 방문의 추억이 그저 비참하고 우울하기만 했던 건 아니라고 회고한다. 80년대에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영어를 못하는 자신을 도와준 자원봉사자들이 없었다면 힘들었던 시간이 두세 배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저자를 디트로이트에 초대한 일본인 친구 U군과의 에피소드도 뭉클하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디아스포라 지식인인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인연도 흥미롭다. 두 사람의 만남과 대화가 성사되었다면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 인류에게 귀하고 큰 선물이 되었을 텐데. 많이 늦었지만, 두 분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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