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없이 거침없이 후회없이 - 욕심 있는 여자들을 위한 자기혁명
조안나 바쉬.수지 크랜스턴 지음, 정준희 옮김 / 흐름출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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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태어나서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한국의 어른들이 대개 그렇듯, 우리 부모님, 친척들 모두 내가 딸이 아닌 아들로 태어나길 기대했다. 성적을 잘 받았거나 상을 타면 '저게 아들이었으면 더 좋았을텐데'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학교에서도 반장은 남자, 부반장은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규정 때문에 반장이 될 수 없었고, 대학 원서를 쓰고 전공을 고를 때에도 여자는 안정적인 직업이 최고니까 그에 맞춰서 택하라는 조언을 숱하게 받았다.

 

하지만 여대에 들어가서, 같은 여자로 태어났지만 사회적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멋지게 사는 선배들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고 용기를 얻었다. 여자로 태어나서 불행하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해봤자 손해보는 건 결국 나. 잘 찾아보면 유리 천장의 미세한 틈을 뚫고 성공한 여성 선배들도 있고, 아예 유리 천장이 없는 다른 곳에서 자기만의 활동영역을 넓히는 여성들도 있다.

 

<겁 없이 거침없이 후회없이>도 그런 훌륭한 여성 멘토, 여성 선배들에 관한 책이다. 저자 조안나 바쉬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여성 리더 양성에 공헌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인물이고, 수지 크랜스턴은 스탠포드 MBA를 졸업하고 맥킨지의 조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 리더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고,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요소들을 분석하여 이 책 한 권에 담았다. 

 

첫번째 장 <좋아서 하는 일을 찾아라 : 의미 찾기>는 평생에 걸쳐 도전하고 해내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 장에는 어릴적부터 간직해온 변호사의 꿈을 이룬 나이지리아 여성 아미나 수잔나 악바제와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영화감독의 꿈을 이루기 위해 멋진 커리어를 버리고 영화판에 뛰어든 미국 여성 조지아 리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미나의 어머니는 딸이 간호사나 의사가 되어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바랬다. 중국계 이민자인 조지아의 부모도 딸이 의사가 되어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며 살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신이 아닌 가족의 뜻대로 살면 평생 불행해질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족도 소중하지만, 결국 나의 삶의 주인은 나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루지 못한 일들을 헤아리며 후회하는 것은 부모님이 아니라 결국 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과연 누가 나를 믿어줄까ㅡ 불안한 마음도 들 것이다. 나도 그렇다. 매사에 선택을 할 때마다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먼저 생각하게 되고 반대에 부딪히면 좌절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이겨내고 밀어붙여야 비로소 한 가정의 딸이 아닌 인간으로서 독립을 할 수 있다.  

 

좋아하는 일을 찾고나서도 여전히 문제에 부딪힐 수 있다. 책에는 예상되는 문제 상황과 해결책도 나와 있다. 그 중에서도 흔히 여성들에게 취약한 점으로 꼽히는 사내 인맥 관리 방법과 직업적으로, 인간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멘토를 찾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사실 여성들은 사회적 관계에 결코 취약하지 않다. 오히려 여성들한테는 남성에게 없는 '사회적 호르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더 유리하다. 산고가 시작되면 편도체에서 옥시토신이 분비되듯,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남성들은 싸움으로 흑백을 가리려고 들지만 여성들은 조율하고 균형을 찾으려고 애쓴다. 이런 능력은 수많은 이해집단과 조직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을 때 큰 강점이 될 수 있다.

 

또한 남성들이 술자리나 운동을 통해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만드는 반면 여성들은 보다 진실하고 깊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특성을 억제하지 말고 잘 활용하면 일적인 방면에서도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고, 깊은 통찰이 담긴 조언을 주는 멘토를 만날 수도, 그런 멘토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인맥 관리뿐 아니라 고객과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은행에서 상담을 받다가 겪은 일화를 들려주신 적이 있다. 같은 문제를 두고 남자 직원은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며 어머니 말은 듣지도 않고 공격적인 투자만 강조한 반면, 여자 직원은 어머니의 말을 경청하고 동조하면서, 어머니가 원하는 안정적인 상품을 추천해주었다. 어떤 직원과 거래를 했는지는 두말 할 것도 없다. 

 

책에 소개된 여성들의 경험담을 읽으면서 여자로 태어난 것을 불행으로만 여기지말고 최대한 좋은쪽으로 활용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공평하다면, 남성에게만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좋은 것을 많이 주셨을터ㅡ. 중요한 것은 남자들처럼 성공하는 것도, 남자들만큼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것도 아니라, 나다운 삶을 살고 나다운 성공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안의 여성적인 특성을 받아들이고 강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리라.

 

2011년의 마지막 날을 일주일 남짓 남겨둔 오늘ㅡ

새로운 2012년을 나의 해로 만들고 싶은 이 시대의 당당하고 멋진 여성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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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6일 - 유괴, 감금, 노예생활 그리고 8년 만에 되찾은 자유
나타샤 캄푸쉬 지음, 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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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침에 대전 모 여고 학생이 자살했다는 뉴스 보도를 보았다. 학교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고,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했다. 인터넷에서는 훨씬 전부터 이 사건이 알려져 그 친구들과 선생님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사건에 대한 보도와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친구가 삶의 전부이고, 학교만이 내 세상인 그런 나이에, 친구들로부터, 학교로부터 자신을 부정당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연인으로부터, 회사로부터, 사회로부터 등등 나를 부정당하는 건 늘 불쾌한 감정이 뒤따른다. 그러니 이 어린 친구한테는 얼마나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그저께부터 읽던 <3096일>을 펼쳐 들었다. 저자 나타샤 캄푸쉬는 1988년 2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고, 열 살이 되던 1998년에 유괴되어 무려 3096일, 약 8년의 시간을 볼프강 프리클로필이라는 남성에 의해 감금되어 보냈고, 2006년에 혼자 힘으로 탈출했다.

 

나타샤의 어린시절은 불안정했다. 어머니가 늦은 나이에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나타샤를 낳았기 때문에 '원치 않았던 아이' 라는 생각이 늘 그녀를 괴롭혔다. 부모님은 허구헌날 싸웠고, 어머니는 나타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나타샤는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폭식을 했고, 그 탓으로 학교에서는 뚱뚱하다는 놀림을 받았다. 그러면 다시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고, 매사에 무력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 시절 어린 나타샤의 머릿속에 각인된 영상이 있었다. 바로 텔레비전 뉴스에서 본 아동 유괴, 성폭행에 관한 영상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어린 소녀들을 노리는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나타샤는 비슷한 또래의 소녀들이 피해자라는 사실이 놀랍고 두려웠고, 만약 자신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던 등굣길. 유독 차 한 대가 신경이 쓰였지만 기분 탓이려니 하고 애써 무시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왜 비껴가지를 않는지. 눈깜짝할새에 한 남자가 나타샤를 납치했고, 어느 지하방에 감금했다. 무서웠지만, 나타샤는 뉴스에서 본 것처럼 며칠만 지나면 부모님과 경찰이 자신을 구조해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며칠이 몇 주가 되고, 몇 개월이 되고, 몇 년이 지나 8년이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나타샤는 무려 8년을 오로지 범인 한 사람과 보냈다. 그것도 지하방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범인의 통제와 억압, 착취, 폭력, 성폭행 등을 견디면서 말이다. 범인은 정확히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인지 책에 나오지 않지만, 그녀의 설명을 보면 일종의 반사회적 성향, 여성혐오증과 결벽증 등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아이이자 여성인 나타샤에 대한 감금과 폭력으로 나타났고,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사소한 행동, 말과 생각까지도 통제하려고 했다. 심지어 그녀의 이름도 없애고, 추억도, 꿈도 모두 파괴하며 '나타샤 캄푸쉬'라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하지만 나타샤는 그런 범인에게 결코 굴하지 않았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부모님 얘기를 하면 얻어맞는데도, 어린시절과 가족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틈나는대로 글을 썼고, 탈출하면 학교 수업도 받고 사회생활도 하기 위해 교묘하게 범인을 설득해서 책을 읽고 공부도 했다. 후에 범인의 폭력이 심해져서 멍든 몸이 아파 잠을 못 이룰 때는 탈출해서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려고 애썼다.

 

.....

 

여기까지만 보면 여느 범죄나 흉악 사건의 피해자의 수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극악무도한 범인과 약하고 무력한 피해자. 범인의 악행이 아무리 심해져도 피해자는 꿋꿋이 버티며 정의를 믿는 그런 구도.

 

그런데 그녀의 회상 중에는 보통 독자가 읽기에는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그녀의 몸과 정신 모두를 파괴하려고 애쓴 범인인데, 그녀의 추억 속에서 범인은 때로는 이웃집 아저씨, 오빠처럼 자상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순전히 까맣기만 하고 하얗기만 한 것은 없다. 어느 누구도 선하거나 악하지만은 않다. 이는 유괴범에게도 유효하다. 이런 말은 유괴를 당했던 희생자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선과 악에 대한 뚜렷한 정의를 내려주는 틀을 뒤흔드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세상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러한 틀. 내가 이런 말을 할 때 대부분의 제3자의 얼굴에서 동요와 거부의 빛을 발견하곤 한다. 내 운명을 동정하며 이해하던 사람들의 마음은 곧장 얼어붙고 거부감으로 변한다. 또한 감금생할의 내면을 손톱만큼도 들여다보기 싫은 사람들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스톡홀름 신드롬'이란 한 단어로 단정 짓는다. (p.184)

 

열 살 소녀에서 열 여덟 살 성인이 되기까지, 그 중요한 시기를 오직 범인 한 사람에 의존하여 살았던 나타샤에게 범인은 이 모든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악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밥도 주고 잘 곳도 주고 가끔씩 선물도 주고 책도 주는 선인이기도 했다. 이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범인을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필요로 하는 모순적인 감정을 가지게 했다. 결과적으로 아버지, 어머니, 언니들, 선생님 등 ㅡ 보통의 소녀들이라면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로 했을 그 모든 사람들의 도움을 준 사람이 나타샤에게는 바로 범인 한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나타샤는 탈출 후 가족들을 다시 만나고 경찰과 심리학자의 도움을 받는 상황이 더 어색하고 외로웠다고 고백한다. 다시 만난 가족들은 ㅡ 가족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ㅡ 그녀의 성장과정을 몰랐고, 경찰은 믿음직하지 못했고, 심리학자는 그녀의 심리를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단어로 규정지으며 그녀의 모순적인 감정과 그로인한 고통을 무시했다.

 

이 사회는 볼프강 프리클로필과 같은 범인을 필요로 한다. 그 사회 안에 존재하는 악에 형상을 부여하고 그 악을 자신으로부터 분리해내기 위해서. 사회는 지하감방과 같은 배경을 필요로 한다. 폭력이 그 파렴치하고 악랄한 얼굴을 무수한 방이나 앞마당에서 드러내는 광경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범죄의 수많은 익명의 피해자들, 아무리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나와 같은 엽기적 사건의 피해자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p.203)

 

이렇게 보면 사건의 일차적인 범인은 볼프강 프리클로필이지만, 이차적인 책임은 사회 전체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하거나 억압한 것은 아니지만, 범인을 방기하고,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을 잊고 있었으며, 사건이 해결된 후에도 여전히 피해자라는 굴레를 씌워서 그녀의 삶을 규정지으려고 하는 사회 말이다.

 

또 나타샤의 설명대로 그녀의 사건이 너무나 극악무도하고 엽기적이어서 화제가 되었을뿐이지, 사회에는 이미 수많은 악이 판치고 있는데도 절대악이 아니고서야 악인지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무시되는 경우가 허다한지도 모르겠다. `나를 괴롭히는 가족, 연인, 동료나 선배, 상사는 그저 나를 괴롭힐 뿐이지, 악인은 아니야. 악인은 뉴스나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그런 악당들이나 악인이지...` 이렇게 생각하며 일상의 폭력을 가볍게 넘기며 회피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거리 위에서, 건물 안에서 수없이 마주했겠지만 알지도 못하는 나 같은 사람.

 

그래서 그 작은 상처가 ㅡ 나타샤 사건처럼 ㅡ 깊이 곪아 터졌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두려워하고 정의를 운운하고,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잊어버리겠지. 또 다른 무시무시한 사건이 터질 때까지. 

 

.....

 

아주 작은 괴롭힘도 누군가에게는 범죄와 같은 상처를 남길 수 있고, 그 상처는 진짜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만이 범죄자일까? 처음에 작은 상처를 주었던 사람, 그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한 사람들, 너무 무관심해서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일까?  

 

폭력과 억압에 맞서 8년이란 긴 시간을 견디고 스스로 탈출한 나타샤 본인의 의지도 빛나지만, 그 고통의 시간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용감한 주장을 한 것이 너무나도 멋지다. 그녀가 홀로 싸워야 했던 시간들이 단순한 회고록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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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씩은 도서관에 다녀온다. 전에 살던 곳은 집에서부터 걸어서 10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어서 하루에도 두번씩 갈 정도로 자주 다녔는데, 이사오고부터는 가장 가까운 도서관이 버스로 10분, 지하철로 15분, 걸어서 40분 거리라서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것도 큰맘을 먹어야 가능하다. (내가 그만큼 게을러진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좋은 점이 있다면, 이 도서관은 규모가 아주 작아서 아늑하고, 이용자수가 대형 도서관만큼 많지 않은 탓인지 책의 보존 상태가 좋다. 전에 다니던 도서관은 폐지에 가까운 책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여기는 웬만해서는 책들이 신간처럼 깨끗하다. 마을 도서관이고, 동네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이니 그만큼 깨끗하게 보는걸까? 게다가 신간도 잘 들어온다. 어쩌면 그렇게 내가 읽고 싶은 책들만 쏙쏙 잘 들어오는지. (물론 인기 많은 신간은 여기도 예약이 꽉 차 있다...) 주로 걸어서 가기 때문에 왕복 80분(갈 때 40분, 올 때 40분)을 걸으려면 책을 많이 안 빌려야 하는데도 신간을 보면 욕심이 나서 주섬주섬 빌리게 된다. 한 번에 빌릴 수 있는 책 권수도 여섯권이나 되어서, 정말이지 도서관 다녀올 때마다 하루 종일 팔이 욱신욱신 쑤신다. (그런데도 이렇게 서재에 글 남기는 건 뭘까...)

 

오늘 빌린 책들.

 

 

 

 

사실, 용기내어 고백하건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일본문화도 좋아하고, 일본작가도 좋아하고, 남들이 별로라고 말하는 작가도 굳이 좋은 점을 찾아내서 좋아하려고 애쓰는 편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만은 좋아지지가 않는다. 정을 붙이려고, 무려 중1 때부터 꾸준히 그의 작품을 읽어왔음에도. 

 

하지만 '잡문집'이라면 소설보다는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데 더 낫지 않을까 싶어 빌려봤다. 게다가 책 표지의 하얀 동그라미 속에 그려진 검은색 토끼(블랙 래빗)가 귀엽다. (아, 참 사소한 이유다) 이번에는 그의 좋은 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본다.

 

 

 

 

 

 

<3096일>은 어제 서점 갔을 때 표지 보고 읽어보려고 생각했는데 마침 신간 코너에 있길래 냉큼 빌렸다. 지난 여름에 미국에서도 한 여자아이가 유괴되어 수년간 감금살이를 하고 성폭행으로 범인의 아이까지 낳은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소녀도 비슷한 일을 겪은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 아침에 TV를 보니 '큰아빠'라고 부르며 따른 이웃집 할아버지가 두 자매를 성폭행해온 것이 밝혀졌다고 하는데, 참 무서운 세상이다.

 

<어쨌든, 잇태리>도 빌렸다. 아까 오는 길에 까페에서 잠깐 앞부분만 읽었는데 저자의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였다. 가볍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버드대 까칠교수님의 글쓰기 수업>과 <김탁환의 쉐이크>는 요즘 마침 글쓰기 때문에 고민이 많아서 빌려봤다. 글은 참, 쓰면 쓸수록 어려운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글 참 못 쓴다'고 늘 자학했으면서도, 아직까지도 글 잘 쓰는 사람이 최고로 부럽고 글에 대한 미련이 있는 것을 보면 나한테 글은 평생 지고 가야 할 짐, 풀지 못할 숙제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못 풀 숙제를 하고 있으니 진짜 미련한 걸까...) 이 책들을 읽고 엄청난 글재주가 생긴다거나... 하는 기대는 없지만, 우직하게 연습하는 길에 좋은 조언 정도는 되어주지 않을까 바라본다.

 

 

 

 

그나저나 책은 사서 읽어야 하는데(게다가 여긴 인터넷 서'점店'!) 빌린 책들 소개글을 쓰고 있자니 민망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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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고3 때부터 약 7년 넘게 쓴 본체가 장렬히 전사하는 바람에

컴퓨터 없이 넷북에만 의존하는 신세로 전락했던 나.

 

넷북은 쓰기가 불편해서

컴퓨터 작업을 해야 할 때면 동생 컴퓨터를 쓰거나 도서관에 가야 했다.

그 때마다 얼마나 서러웠던지...

 

아, 백수만 아니면 그깟 컴퓨터 몇개월 할부로 살 수도 있는 건데,

나는 직업도 없고 신용카드도 없구나ㅠㅠ

 

그런데 오늘 알케님 서재에서 듀얼모니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http://blog.aladin.co.kr/alkez/5291217

 

학교에서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스크린에 띄우는 건 많~이 봤는데,

정작 그게 듀얼모니터 기능이고,

노트북과 컴퓨터, 컴퓨터와 컴퓨터 간에도 된다는 건 몰랐다.

(아 나란여자 '문과여자 = 컴맹'ㅠㅠㅠ)

 

아무튼 베란다 구석에 쳐박아 두었던 모니터를 꺼내서

동생을 불러 연결을 해봤더니

 

 

오오 된다! 된다!!!

 

 

 

 

이런 모습이다.

 

널찍한 화면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 빼고는 달라진 게 없지만

그동안 작은 넷북 화면을 보느라 눈 빠질뻔 했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로도 엄청난 진화요, 발전이다.

 

인터넷 검색하면서 보니

아이패드 화면도 듀얼모니터가 가능하다고 하는데

가지고 계신 분들은 시도해보시면 좋겠다.

(난 아이패드는 커녕, 아이폰도 없으므로 패스)

 

 

기술은 참 신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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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1-12-21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축하드려요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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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정리하다가 이 책 <분노하라>가 눈에 띄었다. 저자 인터뷰에 추천사, 역자 후기, 주석을 합쳐도 채 백 쪽이 안 되는, 소책자마냥 얇은 이 책을 지난 여름에 한창 화제가 되었을 때 바로 구입해서 읽고(그것도 콩국수 집에서 콩국수 나오는 걸 기다리는 동안에 ㅎㅎ) 감상 쓰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이 글은 계절이 두번 바뀐 뒤에야 쓰는, 아주 뒤늦은 감상문이다.

 

저자 스테판 에셀은 1917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1917년생이면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에 태어나신 셈이니 저자가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더욱 묵직하게 느껴진다. 7세 때 프랑스로 이주하여 20세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저자는 선배인 사르트르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2차 대전이 발발하는 통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레지스탕스의 일원이 되었다. 연합군 상륙작전을 돕는 중에 체포 되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여 외교관이 되었다. 종전 후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인권과 환경 문제에 굵직한 종적을 남겼다.

 

이 책의 머리말에는 제일 먼저 저자가 몸담았던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구축한 개혁안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이 개혁안에는 사회보장제도 구축, 언론 독립, 평등한 교육 등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새롭고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종전 후 프랑스는 이 개혁안에 기초하여 사회제도를 만들었고, 그 결과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자는 2008년 무렵부터 프랑스 사회의 근간이기도 한 개혁안의 의지가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 묵인되고, 사회보장제도가 제 구실을 못하고, 언론이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장악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며 저자는 분노했다. 나치로부터, 전쟁의 참화로부터, 종전 후 혼란으로부터 지키고자 했던 사회의 모습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p.15)

 

저자는 사람들이 좀더 자신처럼 사회에 대고 분노하기를 바란다. 분노는 레지스탕스가 들고 일어섰던 기본동기로서, 미약한 개인을 사회에 참여하게 만들고, 투사로 만들며, 이 투사들이 역사를 만들고 자유를 쟁취한다는 것이 저자의 논리다.

 

분노와 상반되는 최악의 태도로 저자는 무관심을 지적했다. 분노는 부정적인 감정을 동반하는 것이니 결과 또한 부정적이지 않겠냐는 의구심이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분노는 지금 처한 상황을 극복해서 긍정적인 미래를 맞이하자는 의미가 담겨있는 반면, 무관심은 상황에 승복하여 아무런 희망도, 보람도 없이 살겠다는, 지극히 수동적인 감정이다. 부정에 일일이 분노하는 사회가 조금은 피곤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회보다는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저자가 전하고자 한 바가 아닌가 싶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p.22)

 

 

나이를 먹을수록 역사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더욱 경건해진다. 어릴 때부터 만화책보다 역사책을 좋아하고, 사극을 좋아했을만큼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런 내 눈에도 그 때는 역사가 그저 왕들이 나오고 신하들이 나오는 옛날 이야기에 불과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생활인으로서 살며 밥과 돈이라는 아주 근원적인 욕구에 나란 사람이 얼마나 흔들리기 쉬운가 깨달을 때마다, 그런 욕구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정의, 민족의 독립 등 대의를 위해 싸운 인물들에 대해 더욱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저자 스테반 에셀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다. 2차대전, 나치, 레지스탕스, 드골, 세계인권선언 ㅡ 이런 흘러간 역사가 이 분에게는 삶이었고, 아직도 꼬리를 길게 드리우고 있는 현실일 터. 그런 저자의 눈에는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수많은 이들이 피땀흘려 얻어낸 정의와 자유가 짓밟히고 있는 것을 보고 답답함을 느끼실까?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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