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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라, 일어나라
브루스 레빈 지음, 안진이 옮김 / 베이직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학부 때 이런 과제를 했던 적이 있다. 정치학에는 몇 가지 분석 차원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서 실제 사례에 적용해보고 그에 따른 영향을 연구해보는 것이 주제였다. 나는 개인 차원을 선택해서 모 외국 정치인을 대상으로 그의 성장 배경과 학력, 경력 등을 조사하고, 그에 따른 심리적인 특징 같은 것을 분석하여 정책에나 정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내용을 제출했다. 학부 차원에서 아주 얕게, 낮은 수준으로 배웠을 뿐이라서 '정치심리학'이라고 제대로 부를 수는 없겠지만, 학부 때 했던 과제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고 재미 있었다. 작년에 <닥치고 정치>를 읽으면서 한국의 유력 정치인 몇 명을 이념이나 정당 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에서 분석한 부분을 읽고 그 과제 생각이 났다. 사실 이념, 정당, 출신 지역... 이런 얘기 하면 어렵고 지루하지 않나? 어떤 가정에서 자랐고, 어떤 공부를 했고, 어떤 직업을 거쳤고, 교우 관계, 연인 관계는 어떠했는지, 그런 걸 알아보는게 그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려줄지 모른다. (물론 가십 수준에 그치면 안 되고, 전문적인 심리학 분석을 거쳐야 하겠지.)
비단 정치인 개인뿐만 아니라 대중의 심리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임상심리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사회 비판적인 글을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는 작가 브루스 레빈이 쓴 <깨어나라, 일어나라>가 바로 그런 책이다. 정치와 심리의 만남. 아직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분야는 아니지만, 앞으로 더 많이 발전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고나서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이 책은 미국판 <닥치고 정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정치도 간신히 관심 가지는 정도인데, 미국까지?'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미국 정치는 한국 정치와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게다가 미국 역시 올해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 또한 장기화된 경기침체와 실업난, 사회 문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4년 전 큰 기대를 걸고 뽑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는 이렇다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오바마가 나선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미국인들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대중들이 더욱 정치에 대해 관심을 잃고, 뭔가 바꿔보겠다는 기대조차 하지 않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무관심, 무기력함, 그리고 그것들의 장기화. 그것이 대의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인데 말이다.
대기업이 지배하는 미디어는 흔히 미국인들을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중도파'로 구분하는데, 이것은 다분히 기업정치에게 유리한 구분이다. 어떤 집단이 선거에서 승리하든 간에 기업정치의 권력은 변함없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기업정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엘리트주의', '반엘리트주의'라는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이 유리하다. -파편화된 사람들- (p.37)
이 책에서 저자는 정부 관료, 정치가, 대기업 등 이른바 엘리트 집단에 의해 대중이 파편화되고 있는 현실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현대 미국인의 25%가 절친이 없고,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상대나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커뮤니티가 없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루트는 제한되어 있고, 경제적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학자금 대출과 실업난 때문에 사회에 예속된 노예 상태나 다름 없고, 중장년층은 중장년층대로, 노년층은 노년층대로 세상의 변화에 대비하지 못해서 힘들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고립감을 느끼고,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있다. 의지할 곳을 잃고, 점점 무기력해지고 있다.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매스미디어와 쇼핑. TV로 남이 돈 쓰는 모습을 보고, 쇼핑센터에서 내 돈을 쓰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는 것만이 현대 미국인들의 유일한 낙이라고 한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드라마, 스포츠, 연예인 가십에 온 정신을 쏟느라 정작 내 고민,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은 없는 사람이 많다. 그런 것들이 없었던 시대, 그러니까 해 뜨면 논 매고 밭 갈고 소 여물 주고, 해 지면 일찍 잠자리에 드는 생활을 했던 조상들이, 어쩌면 마음은 더 풍요롭고, 인생에 대해서는 더 큰 지혜를 발휘하며 살았을런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는 전보다 더 발전한 것일까, 후퇴한 것일까. 나는 자꾸 후자에 마음이 기울어진다.
사람이 자립 능력이 부족하면 자존감을 잃는다. 현대 사회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간단한 요리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다. ... 소비주의 문화에서는 그런 자립능력이 별다른 의미가 없다. ... 이것이야말로 기업과 정부의 엘리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마음가짐이다. 자립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자신감도 바닥이기 때문에 수입이 끊기면 자신이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어마어마한 공포를 불러일으켜 사람을 망가뜨린다. (pp.145-6)
게다가 정신과에서는 이러한 시대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는 사람들을 정신질환을 가진 것으로 분류하여 문제를 왜곡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예전 같으면 그저 반골 정신이 투철하다거나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사람들이 이제는 정신병을 가진 '환자'로 치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극단적인 상태가 아닌, 아주 약간의 과잉행동장애, 자폐 등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도 정신병 환자로 분류하고 약물 치료를 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애초에 '정상'이라는 상태를 상정한다는 것 자체부터 잘못된 것인데도 말이다. 그러다보니 점차 다수와 다른 의견을 말하거나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을 자제하게 되고 (이상하게 보일까봐), 그러다보면 사회가 다양성을 잃고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얘기지만, 생각해볼만한 지적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