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겐 일생에 한 번 냉정해야 할 순간이 온다
한상복 지음 / 예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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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촌 언니, 오빠나 선배로부터 결혼 소식을 들었는데, 얼마 전부터 친구가 결혼한다는 연락을 종종 받는다. 이제 결혼이 남의 일만은 아닌 셈인데, 웬일인지 아직도 결혼이 뭔지, 꼭 해야 하는지, 하고 싶은지조차 잘 모르겠다. 만나는 상대에 따라서 결혼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라면 아직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까지는 못 만난 게 확실하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연애와 결혼에 대한 희망이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상대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사그러들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처음엔 좋은 점만 보였던 그에게서 죽기보다 싫은 단점이 보일 때, 나는 그의 허물까지 안을 수 있는 여자가 못 된다는 것을 깨닫고 안타까웠던 밤이 얼마던가. 열정에서 냉정으로 마음이 돌아설 때, 겨우 붙들고 있던 사랑에 대한 환상은 처참히 부서진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제각각의 '섬'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다. 나는 이쪽 편에서, 그는 저쪽 편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데만 집중하다가, 그 사이에 심연의 바다가 놓여 있음을 까맣게 망각해버리는 것이다. ... 상대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듯 느껴지므로, 두 섬의 어딘가가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 사랑에 빠진 남녀의 눈에는 상대방 외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연인을 제외한 모든 나머지가 '흐린 배경'으로 취급된다. ... 그가 도드라져 보일수록 더욱 그렇다. (pp.4-5 [여자에겐 일생에 한 번 냉정해야 할 순간이 온다])

 

 

[여자에겐 일생에 한 번 냉정해야 할 순간이 온다]의 저자 한상복도 사랑을 하는 여자는 전보다 더 똑똑하고 지혜로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연애의 '밀당'이나 결혼과 동시에 입장하게 되는 '시월드' 같은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나가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상대의 보이는 모습말고 보이지 않는 면까지 파악해서 더욱 깊고 진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다.
 
세상 모든 남자가 똑같을 수 없다. 말 없는 남자가 있으면 말 많은 남자도 있고. 야외 활동을 좋아하는 남자가 있으면 실내를 선호하는 남자도 있고, 이벤트를 잘하는 남자가 있으면 그렇지 않은 남자도 있다. 연애든 결혼이든 관계를 슬기롭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눈에 보이는 면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면까지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말수가 적은 이유가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것인지, 실내를 선호하면 혹시 운동을 잘 못해서 콤플렉스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이벤트를 잘하면 혹시 경험이 많은 건지 등등. 그것을 읽을 수 있으면 연인과의 관계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그 사람의 어떤 점이 좋은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핑계를 곧 찾아낸 것, 그것이 그녀가 그를 사랑해온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매우 힘겹게, 사랑은 앞으로 조금씩 나아갈 것이다. 실망과 좌절을 혹처럼 주렁주렁 달고서 말이다. 그것은 언제나 사랑을 따라다니니까. (pp.69-70 [여자에겐 일생에 한 번 냉정해야 할 순간이 온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수능시험과 취업과 사람 마음은 '들어가기 어렵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디제이가 말 끝에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들어가서 잘 하기는 더 어렵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나는 이 말에 매우 공감했다. 대학도, 직장도, 사람 마음도 처음에 들어가기가 물론 어렵지만, 막상 들어가면 또 다른 문제와 고난이 이어진다. 특히 사람 마음은, 내 마음에 들어 내가 선택한 사람인데도 나날이 더 사랑하기는커녕, 언제나 처음처럼, 한결같이 사랑하기도 어려운 것 같다. 이 책은 첫 만남, 첫 마음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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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인문학 -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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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재 말고 외부에서 서평 블로그를 운영한지 이제 3년이 조금 넘었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어떤 일로 인해 만들었던 블로그가 내 첫번째 블로그다. 처음에는 일기나 사진, 최근에 본 영화나 드라마 이야기 같은 잡담을 주로 올렸다. 그러다가 점점 서평의 비중이 늘어서 3년 전에 아예 서평 위주의 블로그를 따로 만들었다. 그 블로그가 현재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다.

 

서평 블로그라고 해도, 읽은 책에 대해 쓴 글을 보통 서평이라고 해서 서평 블로그지, 엄밀히 말해 내가 쓰는 글은 서평이 아니다. 사전에서 서평의 정확한 뜻을 찾아보니 '서적에 대한 비평과 평가, 주로 해당 서적의 내용에 관계된 전문가가 집필한다'고 나오는데, 내가 쓴 글은 비평도, 평가도 아니요, 더군다나 나는 어느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그러니 지극히 비전문적인 사람의 시선에서 보고 느낀 감상을 적은 글이라고 할 수 밖에. 학교 다닐 때 쓰던 독후감의 연장이라고 하면 되려나.

 

그러면서 굳이 서평 블로거이고자 하는 이유는 그나마 내가 세상과 소통하고 싶고, 할 수 있는 방식이 책이고 글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고 속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아날로그 매체인 책과 느림의 예술인 글을 좋아하면 아웃사이더 취급 받기 딱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책을 읽고 글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는데 주변에는 그 책을 읽은 사람이 없어서 답답한 사람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 창에 책 제목을 검색했을 때 우연히 내 블로그가 눈에 띄어 내 글을 읽게 되고, 이로 인해 아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공감에 대한 갈증이 해소된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서평 쓰기는 메마른 작업이다. 공력은 많이 들지만 청고한 인격을 만드는 데도, 지식의 성채를 짓는 데도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그건 사랑 없는 섹스는 아닐지언정 출산이 배제된 섹스와 닮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p.107 서평, 그 사소한 정치, [일상의 인문학])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문장노동자인 장석주의 서평집 [일상의 인문학]을 읽으면서 나에게 서평이란 어떤 의미인지 되짚어 보았다. 장석주는 1955년생으로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및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입상하면서 시인 겸 비평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출판사 대표 겸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일상의 인문학]은 저자가 2010년 3월부터 세계일보에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원고를 모아서 만든 책이다.

 

일단 본격적인 인문학 서적이 아니라 저자가 읽은 인문학 서적에 대한 서평 칼럼이라서 읽기에 쉬웠다. 저자의 글도 수려하고, 롤랑 바르트, 발터 벤야민 등 유명한 학자부터 알랭 드 보통, 김훈, 한강 등 최근 작가까지 다양한 저자들의 책이 망라된 점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저자의 책을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대학교 1학년 인문교양 시간에 배운 롤랑 바르트, 20세기 사회과학을 설명하는 데 있어 빼놓아서는 안 되는 인물인 미셸 푸코, 자크 아탈리, 발터 벤야민, 지그문트 바우만 등 평소 이름과 주요 사상만 알았지, 정작 그들이 쓴 책을 읽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장석주 저자의 평을 먼저 읽으니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고 이해하면 좋을지도 알겠다. 가장 좋은 서평은 책을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라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장석주 저자의 서평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먹고사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인문학은 사람이 개별자에서 벗어나 나와 세계를 총체적으로 보는 것, 즉 사람과 문화, 그것을 둘러싼 우주와 생명 세계, 그 현상과 본질을 깊이 보게 한다. 필요와 욕망은 가깝고 근원은 멀다. 통찰이란 목전의 필요와 욕망을 넘어서서 근원을 꿰어 봄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인문학의 큰 미덕은 창의성, 통찰력, 소통의 힘을 키워 준다는 점이다. 현실이 던적스럽고 갈 길이 흐릿할 때 인문학은 필요하다. (p.5 일상을 떠난 인문학은 없다, [일상의 인문학])

 

 

내친 김에 이 책에 소개된 책 몇 권을 구입했다. 저자의 말대로 '서평 쓰기는 메마른 작업'이지만, '현실이 던적스럽고 갈 길이 흐릿할 때' 책만한 등대가 또 없다. 그의 서평이 나에게 그동안 몰랐던 책으로의 길을 터준 것처럼, 나의 서평도 누군가에게 불빛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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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청소법 - 걸레 한 장으로 삶을 닦는
마스노 슌묘 지음, 장은주 옮김 / 예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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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집안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빨래, 그 다음이 청소다. 빨래는 너무 쉽다. 세탁기가 알아서 다 해주는 데다가, 잘 빨아진 세탁물을 탁탁 털어 널고, 마르면 잘 접어서 서랍에 넣으면 끝이다. 그에 비하면 청소는 먼지 털기, 쓸기, 닦기, 유리창이나 거울 닦기, 걸레 빨기 등등 거쳐야 하는 단계도 많고, 요즘 나오는 로봇 청소기는 알아서 청소를 한다지만 우리집 청소기는 구형이라 사람 손을 꼭 타야 된다. 하지만 청소를 마쳤을 때의 기분은 빨래를 마쳤을 때 느끼는 보람에 비하면 몇 배는 더 되는 것 같다. 오래 산 집도 마치 새 집처럼 깨끗하고 상쾌하게 느껴지고, 반짝반짝 빛나는 바닥과 물건들을 보면 행복하기까지 하다. 청소라는 것이 단순히 물건을 정리하고 공간을 쓸고 닦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단정히 하는 효과까지 있다는 걸, 제 손으로 청소를 해 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아름답게 정돈된 공간은 그곳에 머무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아름답게 합니다.

또한 청소를 하는 행위, 그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빛나게 합니다." [스님의 청소법] p.16 

 

 

 

마스노 슌묘의 [스님의 청소법]은 몸의 편안을 좇느라 마음의 안식을 얻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청소'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불가의 가르침을 얻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쓰여진 책이다. 저자는 일본 겐코지의 주지스님이자 선 사상과 일본 전통 문화를 바탕으로 한 '선의 정원'으로 유명한 정원 디자이너이며, 다마미술대학 환경디자인과 교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특별교수로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는 인물이다. 스님이 디자이너라...... 언뜻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일본에서는 정원을 가꾸는 것이 전통 문화이자 불가의 수행법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고 하니 생각만큼 생경한 일은 아닌가보다.

 

 

 

"집 밖에서 우리는 많든 적든 격식을 차리게 되는데, 말하자면 '임전태세'입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누구나 밖에서 몸을 감싸고 있던 갑옷을 벗고 한숨 돌리겠지요.

공(公)의 얼굴에서 사(私)의 얼굴로 되돌아오는 공간, 그곳이 자신의 집입니다.

절이나 신사에서는 정역(淨域)이라고 합니다. '신불(神佛)이 계신 청정한 공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신불을 섬기는 자는 고귀한 신불에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그 장소를 철저히 쓸고 깨끗이 닦아 청결하게 합니다.

소중한 자신과 가족이 사는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청결하고 신성한 장소가 되어야만 합니다."

[스님의 청소법] p.22 

 

 

 

내 방의 모습은 마음의 모습이다. 방이 지저분하고 복잡하면 내 마음도 지저분하고 복잡하다는 뜻이고, 청결하고 단정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면 마음도 단정하고 청결하다는 뜻이다. 쌓여있는 옷, 쌓여있는 책,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과 휴지, 방구석의 먼지... 이런 것들이 내 방만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그걸 보는 내 마음도 괴롭고, 그걸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또 괴롭고...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되면 부담이 되고 피로가 된다. 하루에 몇 분이라도 청소를 하는 시간을 내어보면 어떨까? 불가에서는 오전 중과 점심 후, 최소한 하루 세 번은 청소를 한다고 한다. 각자 방을 정리하고 마당을 쓸고 마루를 닦는 과정이 수행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일과 중 일부러 청소하는 시간을 따로 둔 것이다. 속세에서 사는 사람도,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청소를 할 때마다 나름의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생각해보면 청소를 할 때마다 얼마나 마음공부가 되는지 모른다. 청소하기가 싫고 귀찮지만 마음을 다잡고 빗자루를 들고 걸레를 빨 때 마음공부 한 번, 놓치기 쉬운 곳까지 구석구석 집중해서 쓸고 닦을 때 마음공부 두 번, 더러워진 걸레를 헹굼물이 맑아질 때까지 빨고 또 빨 때 마음공부 세 번, 그리고 깨끗해진 집 안을 다닐 때, 반짝반짝 빛나는 물건을 대할 때의 기쁨이 또한 마음공부다. 불경 공부를 하고 말씀을 듣는 것만큼 귀한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열심히 무심한 듯 청소를 할 때, 누구나 시원하고 개운해짐을 느낍니다.

그 감각이 이미 깨달음의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스님의 청소법]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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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철들지 않는다 -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을 통한 삶의 위로
이성규 지음 / 아비요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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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하면 비싼 보석이나 돈, 재산 같은, 금전적인 가치로 따질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보물은 '추억'이 아닐까? 특히 어린 시절의 추억은 그 어떤 보석이나 재산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이다. 여름날 밀린 방학 숙제를 하기 위해 친구집에 모였다가 떠들고 놀기만 했던 기억, 겨울날 눈쌓인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며 놀던 기억, 조금 커서는 쉬는 시간, 점심 시간마다 좋아하는 연예인 이야기에 열광하던 기억...  그런 기억들이 모여 만들어진 추억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값지고 소중하다. 

 

[소년은 철들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마치 저자 이성규의 보물상자를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바로 추억이 곧 보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1950년대 말에 태어나 60년대 중반에 유년기를 거친 전형적인 베이비부머 세대인 저자 이성규가 면소재지의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어머니의 교육열에 이끌려 서울로 전학을 가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에세이다.  나는 저자와 같은 세대도 아니고 시골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지도 않았지만, 마침 저자가 나의 아버지와 같은 세대이고, 아버지 또한 학생수가 몇 안 되는 시골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분이라서 아버지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푹 빠져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이건만, 나의 유년시절 모습과도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예방주사 맞는 날이면 학교 가기 전부터 두려움에 벌벌 떨었던 기억, 주사를 먼저 맞은 친구가 대단하게 보였던 기억, 소풍날 메인 이벤트인 보물찾기 시간에 기를 쓰고 보물을 찾아다녔던 기억, 교실에 커튼을 해올 사람을 찾는 선생님의 모습, 실컷 놀다가 방학 끝 무렵에 태산 같이 쌓여있는 숙제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 시험 성적 때문에 고민하던 기억 등등... 어쩌면 요즘 아이들도 공감할지 모르겠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어느 한 구석 그런 성숙한 모습이라곤 전혀 없다. 언제나 생각은 유치찬란했고, 어려운 일이라면 몸을 사리고 늘 피해다녔다. 가끔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뻔한 거짓말도 했다. 심지어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까지도.' [p.8]

 

 

 

본문의 에피소드도 재미있지만, 책 도입부의 '글을 시작하며'의 구절들이 나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왜곡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가족들이나 친구들, 선생님들에게 내 어린 시절의 모습에 대해 물어보면 뜻밖에도 내 기억과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오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자기 모습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인식과 기억도 왜곡되거나 오해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 보다 성숙한 시선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은 중요한 경험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나는 한없이 유약하고 무력한 아이였는데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면 그 때 이미 꽤 성숙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고, 반대로 제법 조숙했다고 느꼈던 자신이 얼마나 유치하고 어렸는지도 알 수 있다. 또한 좋게만 생각했던 사람의 나쁜 면을 떠올린다든지, 반대로 나쁘게만 생각했던 사람의 좋은 면을 알게 되는 경험도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며, 저자처럼 나도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돌이켜 보았다. 유치찬란하고 이기적인 아이였다던 저자의 고백처럼 나 또한 내 기억처럼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 순간으로 돌아가 지우고 싶고, 바꾸고 싶은 기억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 또한 나이고, 그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다. 소년처럼 소녀도 영원히 철들지 않는 존재이기에, 나이드는 줄 알면서도 시간을 추억이라는 보물로 바꾸기를 그치지 않을테니 말이다.

  

  

 

겨울은 양말 속의 발가락이 시릴 정도로 추웠고, 여름은 종일 냇가에서 놀고 또 놀아도 하루가 무척이나 길었다. 엄청나게 멀어 보이던 윗동네도 지금 와서 보면 겨우 500미터도 안 되는 짧은 거리일 뿐이다. 그때는 윗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왜 그리 먼 곳에 사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같은 장터, 한 동네에 살아도 학교 너머에 사는 아이들과는 쉽사리 어울리질 못했다. 모든 것이 물리적으로 아주 좁은 세계였건만, 그때에는 심정적으로 너무나도 넓은 세상이었다. [p.7 글을 시작하며]

 

 

"해당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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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2-11-05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왜곡된 기억이야말로 작가 고유의 빛깔이 될 수 있으니 고마워해야 할 듯.
왜곡되지 않은 실체적 기억이야말로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키치님,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키치 2012-11-05 23:54   좋아요 0 | URL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라는 관점으로 작가를 봐도 재미있겠네요.
작가의 성격이나 세계관을 읽는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ㅎㅎ
귀한 덧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 *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 김수영이 만난 25개국 365개의 꿈
김수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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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때,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가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동화 같기도 하고 우화 같기도 한 파울로 코엘료 소설의 매력에 빠져 한동안 그의 책을 즐겨 읽었지만 최고의 작품은 여전히 [연금술사]라고 생각한다.

 

그 소설의 백미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는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는 문구가 아닐까 싶다. 그 문구를 떠올리면,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마음에 간직한 꿈을 향해 꾸역꾸역 걸어가는 인간의 모습과 잔혹하게만 느껴졌던 운명이 어느 순간 나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온 우주의 에너지를 모으는 이미지가 연상되어 가슴이 뭉클하다.

 

김수영의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를 읽으며 인간과 운명, 그리고 꿈에 대해 생각했다. 저자 역시 [연금술사] 속 소년처럼 꿈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잔혹한 운명에 맞선 결과 '온 우주가 도와준 것 같은' 기적을 만났다.

 

저자는 학창시절 학교에서는 일진으로 불리고, 가정에서는 가출을 밥먹듯이 하는 문제아였다. 서태지의 '컴백홈'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후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실업계 학생이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대학에 가겠다는 그녀를 주위 사람들은 말리고 '미쳤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이 풀고 버린 문제집을 지우개로 지워서 공부할 정도로 독하게 노력한 결과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했고, 1999년 KBS '도전!골든벨'에서 최후의 1인으로 뽑히는 기적을 낳았다.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수십개씩 하며 대학을 졸업, 세계적인 금융회사 골드만삭스에 입사한 그녀는 신체검사에서 돌연 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초기라서 가벼운 수술로 치료할 수 있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꿈 73개를 적은 뒤 현재까지 그 꿈들을 이뤄가는 삶을 살고 있다.

 

여기까지가 저자의 전작인 베스트셀러 [멈추지마, 꿈부터 써봐]에 실린 이야기라면, 두번째 책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는 저자 자신보다도 저자가 만난 사람들, 저자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르포 같은 책이다. 저자는 2011년 6월부터 1년 동안 영국 런던을 시작으로 365일간 25개국을 여행하며 365명의 삶과 꿈을 담은 ‘꿈의 파노라마’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녀는 사람을 만나면 한결같이 물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사는 곳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고, 역사와 문화, 종교도 다르지만 사람들은 모두 꿈이 있었다. 성공하고 싶다, 부자가 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등 개인적인 꿈부터 조국의 독립, 자유 등 꿈의 내용도 다양했다. 저자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은 누구나 꿈이 있으며, 꿈을 알고 그것을 실천할 때 행복하며, 꿈 앞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힘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저자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저자와 만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지 얼마 안 되어 꿈을 이룬 사람들이 꽤 많다. 정부의 압제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이란의 부부는 저자를 만난지 얼마 안 되어 그토록 원하던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생계를 잇기에 바빠 노래할 시간도 없었던 킬리만자로의 셰르파는 음반을 내게 되었다. 저자와의 만남 후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에 골인한 커플도 있고, 언론인의 꿈에 한 발 더 가까워진 여성도 있다.

 

 저자 또한 세계를 누비며 많은 사람들의 꿈 이야기를 듣는 한편 틈틈이 자신의 꿈도 이루었다. 부모님 성지순례 시켜드리기, 킬리만자로 등정하기, 발리우드 진출까지...! 고작 1년 안에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도 꿈을 품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일으킬만큼 굉장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다시한번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는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 는 [연금술사]의 문구가 떠올랐다.

 

나는 [멈추지마, 꿈부터 써봐]를 읽고 저자의 블로그를 이웃으로 추가하고, 저자가 나온 방송을 빠짐없이 보았을 정도로 그녀의 팬이다. [멈추지마, 꿈부터 써봐]를 읽고 꿈을 썼다면, 신작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를 읽고나서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하고 있는 노력들을 되짚어 보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품어온 꿈이 있는데 꿈을 품은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영 이뤄지지를 않는다. 가까이 다가간 듯 하다가도 멀어지고, 남들은 쉽게 이루는 것 같은데 나만 안 되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블로그나 책, 방송을 통해 직장인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작가에서 대한민국 꿈 멘토로 나날이 발전하는 저자를 보면서 힘을 냈다.  그녀는 '꿈이 이루어졌다'고 말하지만 이번 책만 봐도 그녀가 꿈을 이루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꿈만 해도 그 꿈을 이루는데 몇 달이라는 시간과 엄청난 돈이 들었고, 몸도 많이 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직 그 꿈 하나에 간절히 매달린 결과 높은 경쟁률을 뚫고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고 그녀의 우상 샤룩칸으로부터 손등 키스까지 받았다. 그녀를 보면 온 우주가 소망이 실현되도록 돕기 전에 먼저 간절히 원해야 하고, 간절히 원하기 전에 그만한 노력으로 증명을 해야 한다는 걸 느낀다.

 

온 우주가 내 꿈을 이뤄주기 전에 '나'는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다음 책을 만나기 전에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그 답을 얻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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