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그럼에도 친구가 되는 여자들
서한나 지음 / 글항아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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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많은 여자들을 만났다(참고로 나는 여자다). 그중에는 친구가 된 여자도 있고, 친구였다가 더는 친구가 아니게 된 여자도 있고,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친구가 되지 못한 여자도 있고, 친구가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한 여자도 있다. 나는 왜 어떤 여자와는 친구가 되고 어떤 여자와는 친구가 되지 못했을까. 나는 왜 어떤 여자와는 친구가 될 수 있고 어떤 여자와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서한나의 산문집 <드라마>를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 그것이 자신에 관한 질문을 마주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말해준다. 궁금해 하는지 어색해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여기는지, 판단하는지 활용하는지, 변화를 지켜보는지, 기대 따윈 없는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지 믿어보기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는지...... 직면은 어려운 일이다." (185쪽)


이 구절을 읽고 생각해 보니 예전에 나는 주로 취향이 맞는 친구들을 만났던 것 같다. 이를테면 나처럼 독서가 취미이거나 같은 영화, 드라마, 연예인을 좋아하는 친구들. 대화의 주제도 늘 그때 그때 재밌게 본 콘텐츠에 관한 것이었지 각자의 내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그렇게 사귀었던 친구들 대부분과 지금은 만나지 않는다. 서로의 취향이 바뀌면서, 취미가 달라지면서, 취업이나 결혼, 육아 등으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면서 공통의 화제가 사라지고 더는 만나도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취향도 취향이지만 그 취향을 가진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 만나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이가 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적어지다 보니 그런 친구를 사귈 계기도 만나기 어렵다. 계기를 만난다 한들 내향인인 내가 먼저 다가갈 리 만무하고...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작가님과 작가님의 친구들이 무척 부러웠다. 좋은 친구들을 많이 가진 것도 부럽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나눠받을 에너지가 많은 것도 부럽고.


에너지라는 단어가 나와서 말인데, 요즘의 나는 에너지가 정말 부족하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는데,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만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안 해서 그런가 싶다. 여행 가고 싶어도 안 가고, 콘서트 가고 싶어도 안 가고, 가방 사고 싶어도 안 사고, 영화 보고 싶어도 안 보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일들을 안 하니까 '하고 싶은' 에너지가 안 생기는 거다. 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어차피 안 할 텐데 뭐하러 하고 싶어해, 그러니까 애초에 하고 싶어하지 말자, 이런 사고랄까.


이렇게 나 자신에게 우호적인 존재가 못 되니까 친구한테도 우호적인 존재가 못 되어주고, 그래서 친구들이 다 내 곁을 떠나갔나 싶다. 나처럼 많은 여자들이 자기 자신에게 우호적인 존재가 못 되니까 다른 여자들에게도 우호적인 존재가 못 되고, 그래서 친구가 없거나 친구가 있어도 '진정한 친구'는 없고, 여성들만의 연대나 협력 같은 걸 기대할 수 없으니 존재할 수도 없어서 급기야 '여자의 적은 여자' 같은 말이 나도는가 싶다. 근데 또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같은 책이 나오는 걸 보면 남자도 친구가 없는 것 같고... 


아, 대체 이 현대 사회에서 친구 많은 자는 누구인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친구가 많아 보이는 사람 몇 명이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막상 그 사람들한테 친구 많으냐고, 어떻게 해야 그렇게 친구가 많으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손사래칠 것 같다. 친구가 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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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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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한국어판은 2010년)에 출간된 책의 개정판인데 지금 읽어도 매우 재미있다. 책에 실린 단편은 모두 다섯 편으로 각기 다른 이야기로 읽히지만 다 읽고 나면 '바벨의 모임'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바벨의 모임은 상류계급의 영애들만 가입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독서 모임으로, 각각의 단편에는 바벨의 모임 소속이거나 모임의 존재를 아는 인물이 한 명 이상 나온다. 독서모임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에드거 앨런 포, 체스터턴, 요코미조 세이시 등 다양한 (미스터리) 문학 작품이 언급된다는 점에서 비블리오 미스터리 소설로 보아도 좋겠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이 고르게 좋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표제작 <덧없는 양들의 축연>이다. 얼마 전까지 바벨의 모임 회원이었던 오데라 마리에의 아버지는 유산을 물려 받아 부자가 된 케이스로, 돈은 많지만 부자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는 부자들만이 고용할 수 있는 세상에 몇 없는 특별한 요리사인 '추냥(廚娘)'을 중개업자의 소개로 고용하는데, 이 추냥의 행실이 여간 특이한 것이 아니다. 최고의 요리사답게 요리 실력은 우수하지만, 한 끼 식사를 차리는 데에만 엄청난 양의 식재료를 소비하고 (당연히) 엄청난 액수를 청구한다. 대체 그의 비밀은 무엇일까.


<다마노 이스즈의 명예>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연상케 하는 백합(GL) 느낌이 가미된 고딕 미스터리 소설로, 이 작품 또한 상당히 매력적이다. 고다이지라는 지방 도시에서 이름난 가문의 외동딸인 스미카는 엄한 외할머니와 유순한 어머니의 비호 아래 부족함 없이 자랐다. 스미카가 열다섯 살이 되던 생일에 외할머니는 스미카와 동갑인 여자아이 다마노 이스즈를 선물로 주었고, 스미카와 이스즈는 외할머니 앞에선 아가씨와 시녀를 연기하지만 단둘이 있을 때에는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이후 대학에 진학한 스미카는 그토록 동경한 바벨의 모임에 가입하지만,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생사의 기로에 선다.


앞에 서술했듯이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은 바벨의 모임이 등장한다는 것 외에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인(또는 타자)의 '목숨'을 희생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또 다른 공통점이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산장비문>의 화자인 야시마 모리코다. 야시마는 깊은 산속에 있는 무역상 가문의 별장을 관리하는 별장지기 일을 맡는데, 일 년이 지나도 별장을 찾아오는 손님이 없자 어떤 일을 벌인다. 이런 식으로 남이야 죽든 말든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악(惡)의 시작점이자 핵심인 것 같고, 이를 잘 보여주는 단편들을 읽으니 기분이 오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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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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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옷 정리는 식목일 즈음에 하려고 했지만 3월 중순인데도 날씨가 퍽 따뜻해서 패딩과 니트 등 한겨울에 입는 옷은 미리 정리했다. 이렇게 겨우내 입었던 옷들을 세탁하고 접어서 서랍에 넣고, 봄에 입을 옷들을 서랍에서 꺼내어 옷장에 걸다 보면 완연한 봄이 되고 또 여름이 올 것이다. 작년보다 일찍 찾아오고 더 길어질 거라는 이번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까. 더위 때문에 힘이 들 때마다 나는 이 봄의 선선한 날씨를 그리워하겠지. 어쩌면 차라리 한겨울이기를 바라기도 할 것이다. 정작 한겨울에는 한여름의 무더위를 그리워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렇게 그리워하기만 하다가 흘려 보내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한강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은 작가가 2003년부터 2012년까지 쓴 일곱 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이 책은 한강 작가가 이전에 발표한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는 물론이고, 비슷한 시기에 출간한 장편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등과 비교해 분위기가 훨씬 밝고 희망적이다. 한강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나 상흔을 가지고 있다. 그로 인해 정신적 붕괴나 인간 관계의 단절 같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회복의 계기를 만나고 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선택을 한다.


이러한 전개를 따르는 대표적인 작품이 표제작 <노랑무늬영원>이다. 소설 속 여자는 교통사고로 양손을 다친 이후 이 년이 다 되도록 작업실 출퇴근은 물론 일상 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이대로 손이 낫지 않으면 화가로서의 이력도 결혼 생활도 끝이 날 가능성이 높은 상황.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친구가 사는 동네에 있는 사진관에 자신의 사진이 걸려 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듣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러면서 떠올리게 된, 사진을 찍어준 남자에 관한 기억과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아이들로부터 전해 받은 긍정적인 에너지는 여자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 여자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운을 준다.


한강 작가가 2010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책에 실린 2006년에 발표한 단편 <파란 돌>을 발전시킨 것이라는데, 얼마 전에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은 나로서는 <파란 돌>이 <바람이 분다, 가라>의 에필로그처럼 느껴졌다. <밝아지기 전에>와 <회복하는 인간>은 둘 다 가까운 언니 혹은 친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혼란스러워 하는 여성 화자의 이야기를 그리는데, 어쩌면 이 언니가 타인이 아니라 화자의 또 다른 자아를 상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일 수도 있었던 어떤 존재의 죽음을 겪으며 그 존재의 몫까지 살아내겠다고 다짐하는 화자의 모습은 한강의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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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피아드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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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부와 독서는 페미니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페미니즘을 만나기 전에는 그동안 내가 읽고 배웠던 것들이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것들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남성 작가가 쓴 남성 중심의 서사, 남성 학자가 쓴 남성 중심의 역사와 학문을 배우는 것이 여성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걸 읽고 배우는 것 자체가 남성 중심주의와 가부장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강화하는 건 아닐까. 대부분의 남성들은 하지 않을 이런 고민을 여성인 나는 해야 하는 것 자체가 불평등 아닐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읽을 거리, 공부할 거리를 찾아다니는 요즘이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페넬로피아드>를 읽어보길 권한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 대부분이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것들이지만, <페넬로피아드>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그리스신화의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이야기를 여성의 시각으로 '다시 쓰기'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하느라 이십 년 동안 집을 떠나 있으면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힘들게 집으로 돌아오는 영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아내 페넬로페와 함께 성을 지킨 시녀들 입장에서도 그가 정녕 '영웅'일까. 작가는 이런 의문으로부터 이 소설을 착안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 이 소설의 형식이다. 이 소설은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페넬로페의 시점에서 다시 쓰기한 이야기와 시녀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코러스라인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페넬로페와 시녀들은 오디세우스의 이중적인 잣대(남자는 열 여자를 거느려도 괜찮지만 여자는 순결해야 하고, 남자는 살인을 저질러도 처벌 받지 않지만 여자는 대의를 위한 행위일지라도 처벌받는)를 비난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왕비인 페넬로페와 시녀인 그들의 말로가 다르다는 점에서 같은 여성들 안에서도 지위와 계급의 차이에 따른 차별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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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하스 소년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유리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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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면 봄이고, 봄이 오니 식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식물 하면 나에게 식물의 매력을 알게 해준, 지금은 종영한 라디오 프로그램(이자 팟캐스트로도 방송되었던) <임이랑의 식물수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임이랑의 식물수다>는 나에게 식물의 매력뿐 아니라 식물이 등장하는 좋은 책도 여러 권 알게 해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유리 작가의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이다. <브로콜리 펀치>에는 아버지의 유골을 묻은 화분에서 자란 식물이 딸에게 말을 거는 기발한 설정의 단편 <화분> 외에도 작가의 상상력과 문장력이 돋보이는 여러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 책으로 '이유리 월드'에 입덕해 이제는 이유리 작가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하고 있다.


2024년에 출간된 이유리 작가의 소설집 <웨하스 소년>은 마음산책 짧은소설 시리즈로 출간된 만큼 길이가 짧은 소설 열네 편을 담고 있다. 길이는 짧아도 한 편 한 편의 울림은 상당하다. 가장 좋았던 소설은 목뒤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평생 한 번만 저장할 수 있는 하루를 몇 살이 되어도 재생할 수 있는 미래를 그린 <돌이키는 하루>와 하루 동안 도파민 수치가 높았던 순간을 캡처해 주는 목걸이가 개발된 미래를 그린 <기쁨 목걸이>이다. 두 작품 모두 새로운 기술의 발명을 통해 시간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현재의 소중함을 깨닫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루 종일 신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이런 매일매일이 앞으로 계속 반복된다고 상상하면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분에게 이 두 작품을 권하고 싶다.


밝고 유쾌한 분위기의 소설이 대부분이지만, 대재앙 때문에 하루 중 5분 동안만 눈을 뜰 수 있는 미래를 그린 <5분 동안>이나 대중의 비틀린 관심 때문에 고통 받는 아역 배우의 삶을 그린 <웨하스 소년>처럼 어둡고 냉소적인 분위기의 소설도 있다. 연인의 몸이 따개비로 변하는 상황을 그린 <따개비>라는 작품도 인상적이다. 연인 또는 배우자의 신체가 다른 종의 그것으로 바뀌는 상황을 가정한 유사점 때문에 최근에 읽은 한강 작가의 단편 <내 여자의 열매>가 떠오르기도 했다. <내 여자의 열매>의 남편은 아내의 몸이 식물의 그것으로 바뀌는 상황에 대해 난처함, 당황스러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주로 느끼는 반면, <따개비>의 연인은 똑같이 난처함, 당황스러움을 느끼면서도 (<내 여자의 열매>의 남편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는 점이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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