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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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소설 <흰>을 언제 처음 읽었는지 확인해 보니 초판이 나온 2016년이다. 읽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9년 전. 그 사이 한강 작가의 다른 책도 몇 권 나왔고,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한강 작가가 2024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기쁨도 있었다. 예전에 쓴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 낯설다, 벅차다 같은 단어들을 자주 쓴 것이 눈에 띈다. 이번에 <흰>을 다시 읽으면서는 고요하다, 차분하다 같은 감정들을 자주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속 화자가 처한 상황은 사실 고요함이나 차분함과는 거리가 멀다. 


낯선 외국에 혈혈단신으로 와서 얼마간 살기로 한 '나'는 익숙지 않은 생활에 적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지저분한 벽과 문을 다시 칠하고, 무겁게 가져온 짐을 정리하고, 새로운 음식과 언어, 문화를 배워야 하는 압박을 느낀다. 어느 날 '나'는 자신이 살게 된 도시가 2차 대전 때 히틀러에 의해 심하게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사람들이 열심히 복구해 현재에 이르렀음을 알게 된다. 도시가 한 번 죽었다가 새로 태어났다는 생각을 하던 '나'는 어릴 때 어머니가 해줬던 죽은 언니 이야기를 떠올린다. 태어난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죽은 언니. 그 언니를 품었던 포궁에서 태어난 '나'는 언니의 죽음과 자신의 삶이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잊지 않았다.


같은 삶이라도 간단한 말조차 배우지 못하고 죽은 언니의 삶과 언니가 살았더라면 너는 태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말들 속에서 산 '나'의 삶은 다르다. 그러나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채 끝나버린 언니의 삶이나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생겨난 나의 삶이나 삶이기는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마치 어떤 흰 것은 아무것도 묻은 적 없어서 희고, 어떤 흰 것은 색이 있던 자리가 바래서 희고, 어떤 흰 것은 색이 있던 자리를 덮어서 희지만, 흰 것들은 똑같이 흰 것처럼.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흰 것들 - 또는 산 자들 또는 살았던 자들 - 을 헤아리는 동안 내 마음은 모처럼 흰 것들처럼 평온하고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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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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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하지만, 인간이 태어나면 죽는다는 사실만은 예외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될 죽음 직전에 각자가 보게 될 것은 무엇일까. 2023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데뷔 40주년을 맞은 해인 2023년에 발표한 소설 <샤이닝>을 읽으며, 어쩌면 이 소설에 그려진 상황이나 풍경이 우리가 죽음 직전에 겪거나 보게 될 것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한 남자가 운전을 하다가 아무것도 없는 숲 앞에서 차를 세우며 시작된다. 차를 돌려서 돌아가려고 하지만 바퀴가 길바닥에 처박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전화를 걸 만한 집도 안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내리자 남자는 눈이라도 피하려고 숲속으로 들어간다. 숲에서 그는 실제인지 허구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구분하기 힘든 존재들과 마주치고, 그 결과 도달하게 된 어떤 경지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 책에는 2023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문도 실려 있다. 어릴 때 큰소리로 책을 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욘 포세는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자신에게 더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글을 쓰면 다른 감정들이 생겨나 두려움을 몰아낸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글을 썼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은 오직 글로 쓸 수 있다"라는 믿음을 자신의 작가 인생을 통해 관철했다.


그동안 욘 포세의 작품들 - <3부작>, <아침 그리고 저녁>, <멜랑콜리아 I-II> - 을 읽으며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느꼈는데, 작가 자신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글로 써왔다고 하니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게 당연하구나 싶다. 삶의 끝 또는 죽음의 시작을 경험하는 인간의 심리를 상상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아침 그리고 저녁>의 2부와 유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의 대표작 <7부작>의 내용을 압축한 것 같다는데, 분량이 무려 1200쪽에 달한다는 그 책을 과연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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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세트] 전생에 효녀 (총22화/완결)
야상 / 투비닷(TOBE.dot)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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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전래 동화가 있다. 흥부 놀부, 콩쥐 팥쥐, 금도끼 은도끼 같은 것들이다. 효녀 심청도 빼놓을 수 없다. 효녀 심청은 눈이 안 보이는 아버지 심봉사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금의환향한 심청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이 효(孝)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해 본 적 없었다. 야상 작가의 <전생에 효녀>를 읽기 전까지는. 


<전생에 효녀>는 토론 수업이 한창인 교실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토론의 주제는 '심청이는 과연 효녀인가'. 주인공 은박하는 다른 학생들이 "맹인 아버지를 두고 물에 빠지면 아버지는 홀로 어떻게 하나", "당시 유교 사상적으로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을 함부로 바다에 내던지는 건 불효로 느껴지고" 같은 말을 하는 걸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분노를 조절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졸지에 '과몰입녀'라는 별명까지 얻은 박하는 흑역사를 안은 채 중학교를 졸업하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박하의 흑역사를 아는 이옹주가 나타나 인사를 건넨다.


이 만화는 효녀 심청과 바리데기 공주 설화를 축으로 진행된다. 둘 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효녀 이야기이고, 어려서 이 이야기들을 읽을 때에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이번에 이 만화를 보면서 효녀 심청과 바리데기 공주 설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니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젖동냥에 응해준 이웃들이 사실은 심봉사와 심청 부녀를 마을의 골칫거리로 여기지는 않았을까.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약을 구해 병든 아버지를 살린 바리데기에게 정녕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을까. 자식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부모들의 이기심을 효로 포장하는 것이 온당할까. 


외전에는 콩쥐 팥쥐 이야기도 나오는데, 콩쥐는 착하고 팥쥐 모녀는 나쁘다는 생각이 정말 옳은가, 내가 직접 책을 읽고 한 생각이 아니라 주변 어른들에 의해 주입된 생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어려서부터 익히 듣거나 읽은 이야기들의 숨은 의미, 진짜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작가님의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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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치·더·록! 외전 히로이 키쿠리의 과음일기 1 : 특별판 1st DRUNK EDITION - 아크릴 스탠드 + 아크릴 코스터 + 콜라보 비주얼 보드 + 시크릿 포토 카드 3종 + 홀로그램 일러스트 카드 2종 + 초판한정 포토카드
하마지 아키, 쿠미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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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치 더 록!>이 고토 히토리와 결속 밴드의 성장을 그린다면 <봇치 더 록! 외전 히로이 키쿠리의 과음일기>는 고토 히토리의 멘토 역할을 하는 선배 히로이 키쿠리와 그가 속한 밴드 식 핵(SICK HACK)의 일상을 그린다. 식 핵은 리드 베이시스트 겸 메인 보컬인 히로이 키쿠리, 드러머 이와시타 시마, 기타리스트 시미즈 일라이자 3인으로 구성된 밴드다. 멤버 전원이 학생이고 밴드로서 이제 막 시작한 단계인 결속 밴드와 달리, 식 핵은 멤버 전원이 성인이고 실력도 인기도 꽤 높다. 문제는 밴드의 리더이자 간판인 키쿠리가 술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는 거... ​ 


공연이 있는 날은 공연이 있어서 마시고, 공연이 없는 날은 공연이 없어서 마시고. 곡이 잘 써지는 날은 곡이 잘 써져서 마시고, 곡이 안 써지는 날은 곡이 안 써져서 마시고. 때로는 술에 취해 모르는 동네에 가기도 하고, 돈이 없는데 술을 마시고 싶을 때는 단골 술집에 가서 다른 손님들에게 얻어 마시고. 어떻게 보면 진상이고 민폐인데 그래도 다행인 건, 그런 키쿠리를 돌봐주는 듬직한 멤버들이 있다는 것이다. 리더보다 더 리더 같은 시마와 밴드와 만화를 겸업하는 일라이자가 여러모로 못 미더운 -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리더를 서포트하는 모습이 재밌다. 2권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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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모든 것을
시오타 타케시 지음, 이현주 옮김 / 리드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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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소설의 오랜 팬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범죄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범죄의 방법을 배우고 싶은 것도 아니고 범인을 알아내면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대체 왜, 무엇을 위해 범죄 소설을 읽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범죄 소설을 손에서 놓았던 시기도 있었다. <존재의 모든 것을> 읽어보고 싶었던 건, 책 소개 글을 보고 작가 시오타 다케시가 나와 비슷한 의문을 품었던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상 초유의 아동 동시 유괴 사건이라는 소재 자체는 시오타 다케시의 전작 <죄의 목소리>와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공백의 3년' 동안 그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는 문장을 보고, 이 소설은 범죄의 과정을 따라가며 범인을 찾아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닐 것 같았다. 그보다는 범죄로 인해 피해자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을 것 같았고, 어쩌면 이것(피해자의 삶에 대한 관심)이 기존의 범죄 소설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소설을 읽어보고 싶었다. 


은퇴를 앞둔 신문기자 몬덴 지로는 30년 전인 1991년 일본 가나가와 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아동 유괴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나카자와의 부고를 받는다. 과거 나카자와가 자신에게 한 질문 - "결국 자네는 왜 신문기자를 하는 건가?" - 을 숙제처럼 여기고 살았던 몬덴은 나카자와가 죽기 전까지 해결하고 싶어 했던 사건을 다시 취재해보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몬덴은 최근 주목받는 화가 기사라기 슈가 유괴를 당했던 아이 중 한 명인 나이토 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보통 유괴 사건이 발생하면 돈을 챙긴 범인이 아이를 돌려주지 않거나 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이하게도 나이토 료는 사건 발생 3년 후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 데다가 '공백의 3년'에 대해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한편 아버지가 소유한 신주쿠의 한 화랑에서 일하는 쓰치야 리호는 화제의 화가 기사라기 슈의 그림을 보고 고등학교 동창 나이토 료의 화풍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고교 시절 료를 짝사랑했던 리호는 료가 30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동 유괴 사건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로 인해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한 것도 알았다. 오래지 않아 기사라기 슈가 나이토 료임을 폭로하는 뉴스가 주간지에 실리고, 료가 걱정된 리호는 오래 전 료가 보여준 그림 속 풍경들을 힌트로 그의 행적을 찾아나선다.


이 소설은 중심에 아동 유괴 사건의 피해자이자 현재 가장 주목 받는 화가인 나이토 료(기사라기 슈)가 있고, 그의 과거와 현재를 신문기자인 몬덴 지로와 화랑 운영자 겸 료의 고등학교 동창인 쓰치야 리호가 각각 다른 목적으로 다른 루트를 따라서 추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몬덴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부분은 <죄의 목소리>나 다른 범죄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에만 집중하는 반면, 리호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부분은 백화점과 미술계의 뒷면을 폭로하는 사회 소설 같기도 하고 청춘 남녀의 풋풋한 사랑을 그린 로맨스 소설 같기도 해서 전체적으로 다양한 재미가 있다.


나카자와로부터 "결국 자네는 왜 신문기자를 하는 건가?"라는 질문을 받았던 몬덴은 취재원으로부터 "자네는 지금 뭐가 알고 싶어서 취재를 하나?"라는 질문을 받고 또 다시 고민에 빠진다. 어차피 시효가 다해서 범인을 찾아도 처벌할 수 없고, 피해자는 무사히 돌아와 화가로 활동하며 잘 살고 있는데 대체 뭘 위해서 진실을 찾느냐는 물음에 좀처럼 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료의 경우에는 '공백의 3년' 동안 대단한 드라마가 있었지만(소설이니 당연하다), 대단한 드라마가 없었다고 해도 열심히 찾은 보람이 없다고 느끼지는 않았을 것 같다. 진실을 추구하는 목적은 진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경우 '공백의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가장 중요한 미스터리이고, 소설 초반에는 이 미스터리를 밝힐 사람이 피해자인 나이토 료 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읽다 보면 의외로 여러 사람이 겹겹이 진실을 둘러싸고 있고, 최종적으로는 그 여러 사람이 피해자 한 사람을 위해 다양한 측면으로 보호와 지원과 관심과 애정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과 결말을 보면서 범죄 피해자에게 필요한 건 신속하고 정확한 수사로 범죄자를 찾아내서 처벌하는 것만이 아니라 피해자가 피해를 입은 환경에서 벗어나 다시는 피해를 입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범죄 소설을 읽지 않아도 할 수 있겠지만, 범죄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사연이 가능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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