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0년에 나온 이 소설을 2016년에 처음 읽고 2025년에 다시 읽었다. 처음 이 소설을 읽고 쓴 리뷰를 찾아 보니 그 때의 나는 일 년 전 사고로 친구를 잃은 이정희가 친구의 명예를 지켜주려고 애쓰는 이야기로 읽은 것 같다. 이번에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는 이정희와 친구 서인주의 관계가 그저 친구이기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희와 인주는 분명 친구였다. 그것도 아주 오랜. 중학생 때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성격도 취향도 많이 달랐지만 그 덕분인지 금세 친구가 되었다. 당시 정희 아버지는 일을 안하고 어머니는 식당 일 때문에 바빠서 정희는 집에 있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자주 인주네 집에 놀러 갔는데, 인주네 집에는 화가인 외삼촌이 있었다. 여느 남자들과 달리 인상이 유순한 외삼촌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정희는 곧 그림에 흥미를 느끼고 외삼촌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림보다는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인주는 정희와 외삼촌이 그림을 매개로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고 묘한 감정을 느낀다.


몇 년 후 외삼촌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 충격으로 인해 정희는 그림을 그만두고 영문과에 진학한다. 화가가 된 것은 오히려 인주인데, 미술 전공자도 아니면서 독학으로 미술을 배우고 미술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으나 일 년 전 미시령에서 죽었다. 그 때까지 정희은 인주가 사고로 죽었다고 믿었는데, 인주가 함께 미시령에 가자고 했을 때의 어조가 죽으러 가는 사람의 어조가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인주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주를 잘 안다고 주장하는 미술평론가 강석원이 조만간 출간할 인주의 평전에 인주가 자살했다고 쓸 예정임을 알게 되면서 정희의 믿음이 위협받기 시작한다.


정희는 강석원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강석원 몰래 강석원이 소유하고 있는 인주의 그림을 보러 가기도 하고, 인주의 죽기 전 행적이나 생전에 인주가 만난 사람들을 찾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정희는 인주의 오랜 친구인 자신조차 인주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는 걸 깨닫고, 좀 더 일찍 인주의 삶을 들여다보지 못한 것을 반성한다. 자신과 인주 그리고 외삼촌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본다. 정희에게 인주는 친구였고 외삼촌은 첫사랑이었다. 외삼촌에게 정희는 조카였고 인주는 조카의 친구이자 (아마도 첫)사랑이었다. 그렇다면 인주에게는 어땠을까. 인주에게도 정희는 그저 친구, 외삼촌은 그저 외삼촌이었을까. 그저 친구, 그저 외삼촌이었다면 인주는 왜 외삼촌이 죽고 정희가 그림을 그만둔 후에도 혼자서 계속 그림을 그렸을까. 그것도 외삼촌의 작업을 연상시키는 그림을.


인주가 어떤 마음으로 정희와 외삼촌을 바라보고 어떤 심정으로 그림을 그려 왔는지는 끝까지 알 수 없다. 다만 정희는 인주의 사인을 밝혀냄으로써 인주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제부터는 인주의 친구로서가 아니라 인주를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인주의 몫이었던 삶을 살기로 한다. 정희가 인주 몫의 삶을 살듯이, 인주는 외삼촌 또는 정희 몫의 삶을 살았다. 죽은 사람 몫의 삶을 대신 산다는 모티프는 한강 작가가 이 소설 이후에 발표한 <소년이 온다>에도 나온다. 타인 몫의 삶을 대신 산다는 것은 사랑인가 흠모인가 연대인가 속죄인가. 하나로 단정하기가 나로서는 아직 어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들이나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가들의 삶을 다룬 문학 작품이나 영화, 드라마 등을 접할 때마다 생각했다. 정말 대단하고 감사하지만, 내가 만약 저 시절에 태어났다면 나는 저렇게 살지 못했을 것 같다, 직접 체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대신 어디선가 초인이라도 나타나 세상을 바꿔주기를 기대하며 조용히 살았을 것 같다, 라고 말이다. 이를 다시 확인한 계기가 지난해 12월 3일에 일어난 비상계엄 선언과 그 이후의 일들이다. 그날 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잠드는 바람에 아침에 일어나 텔레비전 뉴스를 켠 후에야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뒤늦게 그간의 일들을 따라 잡으면서 나는 권력만 믿고 초법적인 행위를 저지른 대통령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한편으로 그 야심한 시각에 위험을 무릅쓰고 국회로 향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그 모든 소동이 일어나는 동안 그야말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괴로움, 죄책감 등을 느꼈다. 그러나 전날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고 깨어 있었다 한들 내가 국회로 달려 갔을까. 끽해야 텔레비전 뉴스와 SNS 타임라인을 하릴없이 들여다 보면서 사태의 변화를 기다렸을 것이다. 오래 전 서태지와 아이들이 <교실 이데아>에서 꾸짖었던,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는 사람. 그게 나니까.


얼마 전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다시 읽었다. 2014년에 출간된 이 소설을 그동안 여러 번 읽었는데, 이번에는 5.18 당시 계엄군에 적극적으로 맞섰던, 동호와 은숙, 선주, 진수 같은 소설의 중심 인물들보다 그러지 않은, 그러지 못한, 그럴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더 눈길이 갔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정부가 계엄군을 보낸 상황. 그들을 막으려고 시위대로 나선 시민들 다수가 죽거나 크게 다쳤는데, 여기에 정부는 추가로 계엄군을 더 보내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마침내 광주에 도착한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집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오면 이유를 불문하고 사살하겠다고 위협하고, 며칠 전부터 도청을 지키고 있는 시민들은 제발 한 명이라도 더 도청으로 나와서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절규한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기를 택하는 마음은 차라리 없기를 택하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 그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들이라고 해서 불의가 좋았던 것이 아니다. 독재를, 계엄을, 폭력을, 살상을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항거하지는 못했지만, 시가전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와서 헌혈을 했다. 시위대 편에서 함께 싸우지는 못해도 조금이라도 덜 배고프라고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시위대에 보냈다. 마치 오늘날 비상계엄을 선언한 대통령을 탄핵하자는 시위에 촛불로, 응원봉으로, 선결제로, 후원으로 힘을 보태는 사람들처럼.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이 용기라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선(善)일 테니.


예전에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5.18을 주제로 한 '역사'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12.3 비상계엄 이후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모든 것이 동시대적이고 현재진행형인 것으로 느껴진다. 다시는 반복될 리 없다고 믿었던 일이 불과 몇 달 전 일어날 뻔했던 걸 상기하면 지금도 정신이 번쩍 든다. 언젠가 또 다시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어떤 감상을 느낄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50년대 이스라엘. 이십 대 초반 여성 한나는 오전에는 유치원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히브리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한다. 어느 날 계단에서 미끄러질 뻔한 한나를 미카엘이 붙들었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연인이 되고 결혼을 약속한다. 문제는 이때쯤부터 한나가 자신의 선택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미카엘과 헤어질 명분도 없어서 얼마 안 가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아버린 것이다. 한나는 결혼, 임신, 출산으로 인해 유치원 교사 일도, 문학 공부도 포기한 데다 산후 우울증까지 겹쳐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미카엘은 한나를 헌신적으로 돌보지만, 때로는 그 자신도 지치고 힘이 든다.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가 1968년에 발표한 소설 <나의 미카엘>은 한나와 미카엘 부부의 결혼 생활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부부는 남들이 보기에는 둘 다 선남선녀에 일찍 결혼해서 순조롭게 아이를 얻고 행복하게 잘 사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문제가 많다. 일단 둘 다 서로를 만나기 전에 이성 교제 경험이 없었고, 취직도 안 했고 집안이 부자도 아닌데 한 명은 공부를 계속하고 한 명은 임신, 출산, 육아로 여력이 없다. 이들의 결혼을 반대했던 집안 어른들은, 막상 이들이 결혼하자 언제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니? 둘째 소식은 없니? 등등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두 사람의 성격 차이, 가치관 차이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일단 두 사람은 부부 간의 성 생활에 대한 견해 차이가 크다. 한나는 어릴 때 '여자는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성(性)적으로 너무 밝히면 안 된다'는 식의 교육을 받은 것의 역작용으로 인해, 미카엘과 정반대로 성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남성과 왕성한 성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은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반면 미카엘은 하루 종일 학교에서 일하면서 학위 준비하고 한나 대신 집안 살림과 아이까지 챙기느라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상태다. 한나는 종종 미카엘의 외도를 의심하지만 미카엘로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술을 찬양하고 감성이 발달한 문학 전공자 한나와 매사에 과학 원리를 적용하고 이성을 중시하는 지질학 전공자 미카엘의 성향 차이 또한 날이 갈수록 두드러진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로망이 많은 한나는 점점 미카엘을 따분하고 지루한 남자로 여긴다. 근면 성실하고 목표 지향적인 미카엘은 점점 한나를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로 느낀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에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바로 전쟁이다. 1956년 수에즈 전쟁에 징집되어 한동안 집을 떠났던 미카엘은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흠모한 과학 기술의 발전과 이성적 사고의 결과가 전쟁과 그로 인한 수많은 이들의 죽음임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미카엘은 한나가 결혼 생활 초반부터 이야기했던 삶의 무의미함, 인간의 어리석음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 뭔지, 결혼이 뭔지, 산다는 게 뭔지, 인간이라는 게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일찍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인간 행세를 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이혼을 할 수도 없고, 아이는 이미 낳아버렸고, 삶은 벌써 중반부(어쩌면 후반부)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남은 생은 어떻게 살 것인가. 아 막막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적산가옥의 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4
조예은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에 사는 서른 살 운주는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걸려 온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어머니에 따르면 어머니의 외할머니, 즉 외증조모가 소유했던 적산가옥 한 채가 있는데, 외증조모께서 살아계실 때 당신의 증손녀인 운주가 이 집에서 일 년을 살면 그후에는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다는 유언을 남기셨다는 것이다. 마침 일본에서의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던 차이기도 했고, 결혼을 생각 중인 애인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서 운주는 외증조모가 생을 마감한 적산가옥에서 살게 된다.  


이 적산가옥은 본채와 별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채는 적산가옥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본식 가옥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카페나 레스토랑으로 개조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반면, 별채는 외관이 흉흉하고 내부도 어두워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꺼려진다. 운주는 말년에 거동이 불편해 본채에서 주로 지냈던 외증조모가 사망 당일 별채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외증조모와 적산가옥과 별채의 관계를 궁금해 하기 시작한다.


조예은의 소설 <적산가옥의 유령>은 오랫동안 서양 문학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던 고딕 호러 소설의 양식을 한국문학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작품이다. 물론 이 작품 이전에도 고딕 호러 소설의 특징(음산한 배경, 미스터리한 사건, 불안에 떠는 인물 등...)을 계승한 작품들이 한국문학에도 있었지만, 이 작품만큼 고딕 호러 소설의 요소를 잘 간직하면서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과 현대적 의미까지 포용한 작품은 보지 못했다.


이 소설은 2020년대를 살아가는 증손녀 운주와 1940년대를 살아가는 외증조모 준영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처음에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인 가정의 입주 간호사로 일하며 가족들을 부양하는 준영의 처지가 하도 가혹해서, 그에 비하면 현대를 살고 있는 운주의 처지는 훨씬 더 유복하고 평안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일본인 가정의 외아들 유타카의 삶이 겉보기와 달랐던 것처럼, 운주의 삶도 보이는 것과 달랐다. 우리는 과연 타인의 삶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사람이 나쁘고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도 있었지만, 이 소설은 준영과 유타카가 땅콩빵 하나로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사이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놓아버리고 싶은 인류애를 다시 움켜쥐게 만든다. 돈 때문에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을 해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빵 하나로 잘 모르는 사람을 살게 하는 것 역시 인간이다.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 어떤 인간으로 기억될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어 속담 중에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가 있다. 일(공부)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뜻으로, 학창 시절에는 이 속담의 방점이 'play'에 찍혀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이 문장의 방점이 'dull'에 찍혀 있다고 느낀다. dull의 사전적 의미는 '따분한, 재미없는'인데 '흐릿한, 칙칙한, 윤기 없는'이라는 뜻도 있다고 나온다. 윤기 없이 삐걱거리는 삶을 살고, 존재감이 흐릿해 남들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제대로 놀지 않고 일만 하면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청예의 소설 <오렌지와 빵칼>의 주인공 오영아는 일만 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매사를 일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오래 사귄 친구가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친구가 좋아서 만나는 게 아니라 그 친구라도 없으면 친구가 한 명도 없는 사람이 될까봐 불안해서 의무적으로 만난다. 5년 가까이 사귄 애인이 있지만 애정은 예전에 식었고, 헤어지자고 말하면 나쁜 여자로 여겨질 게 두려워서 계속 사귀고 있을 뿐이다. 직업은 유치원 교사인데 아이들을 진심으로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근무 환경에 불만이 많지만 입 밖으로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영아의 일상에는 만나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일은 없고 만나기 싫은 사람, 하기 싫은 일뿐이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상대하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니 짜증, 분노, 우울,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계속 쌓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오영아 자신이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배출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보통은 취미 생활이나 사교 활동, 여행, 운동 등으로 이런 감정을 분출하고 해소하며 새로운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데, 오영아는 돈이나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자기만의 스트레스 해소법 찾기를 미룬다. 오히려 건전함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나 영상을 인터넷에서 보면서 자신의 감정 또는 행위를 정당화, 합리화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영아는 어떤 계기로 인해 이제까지의 자신과는 다른 자신이 될 기회를 얻고, 이 기회를 통해 전에는 해본 적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서 그동안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느낀다. 그 감정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 좋은 사람, 착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나쁜 면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로움, 쾌감이다. 치팅 데이 없이 식단 조절을 하면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것처럼, 우리네 일상도 의무와 부담, 규율과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 필요하다. 몸만 아니라 머리도, 마음도, 의식도, 가치관도. 작가의 다음 소설이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