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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들이나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가들의 삶을 다룬 문학 작품이나 영화, 드라마 등을 접할 때마다 생각했다. 정말 대단하고 감사하지만, 내가 만약 저 시절에 태어났다면 나는 저렇게 살지 못했을 것 같다, 직접 체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대신 어디선가 초인이라도 나타나 세상을 바꿔주기를 기대하며 조용히 살았을 것 같다, 라고 말이다. 이를 다시 확인한 계기가 지난해 12월 3일에 일어난 비상계엄 선언과 그 이후의 일들이다. 그날 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잠드는 바람에 아침에 일어나 텔레비전 뉴스를 켠 후에야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뒤늦게 그간의 일들을 따라 잡으면서 나는 권력만 믿고 초법적인 행위를 저지른 대통령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한편으로 그 야심한 시각에 위험을 무릅쓰고 국회로 향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그 모든 소동이 일어나는 동안 그야말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괴로움, 죄책감 등을 느꼈다. 그러나 전날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고 깨어 있었다 한들 내가 국회로 달려 갔을까. 끽해야 텔레비전 뉴스와 SNS 타임라인을 하릴없이 들여다 보면서 사태의 변화를 기다렸을 것이다. 오래 전 서태지와 아이들이 <교실 이데아>에서 꾸짖었던,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는 사람. 그게 나니까.
얼마 전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다시 읽었다. 2014년에 출간된 이 소설을 그동안 여러 번 읽었는데, 이번에는 5.18 당시 계엄군에 적극적으로 맞섰던, 동호와 은숙, 선주, 진수 같은 소설의 중심 인물들보다 그러지 않은, 그러지 못한, 그럴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더 눈길이 갔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정부가 계엄군을 보낸 상황. 그들을 막으려고 시위대로 나선 시민들 다수가 죽거나 크게 다쳤는데, 여기에 정부는 추가로 계엄군을 더 보내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마침내 광주에 도착한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집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오면 이유를 불문하고 사살하겠다고 위협하고, 며칠 전부터 도청을 지키고 있는 시민들은 제발 한 명이라도 더 도청으로 나와서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절규한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기를 택하는 마음은 차라리 없기를 택하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 그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들이라고 해서 불의가 좋았던 것이 아니다. 독재를, 계엄을, 폭력을, 살상을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항거하지는 못했지만, 시가전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와서 헌혈을 했다. 시위대 편에서 함께 싸우지는 못해도 조금이라도 덜 배고프라고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시위대에 보냈다. 마치 오늘날 비상계엄을 선언한 대통령을 탄핵하자는 시위에 촛불로, 응원봉으로, 선결제로, 후원으로 힘을 보태는 사람들처럼.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이 용기라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선(善)일 테니.
예전에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5.18을 주제로 한 '역사'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12.3 비상계엄 이후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모든 것이 동시대적이고 현재진행형인 것으로 느껴진다. 다시는 반복될 리 없다고 믿었던 일이 불과 몇 달 전 일어날 뻔했던 걸 상기하면 지금도 정신이 번쩍 든다. 언젠가 또 다시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어떤 감상을 느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