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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계급투쟁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9년 11월
평점 :

미국, 일본, 영국 등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다 잘 살 것 같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나라에도 빈부 격차가 존재하고 평균 소득 수준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브래디 미카코는 그중에서도 영국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작가다. 1965년생 일본 여성인 브래디 미카코는 젊은 시절 펑크록에 심취해 록의 성지인 영국으로 이주했다. 이주 초기에는 런던의 일본계 기업에서 일하며 소위 화이트 칼라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블루 칼라 노동자인 아일랜드계 영국인 남성과 결혼하면서 빈곤 지역에서 살게 되었고, 아이를 낳고 키우다 빈곤층을 위한 무료 탁아소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다.
저자가 일한 탁아소의 설립자인 애니는 빈곤층에 대한 정부의 무료 보육 서비스 제공이 보육 대상자인 아동뿐 아니라 아동의 부모, 가족, 이웃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장기적으로는 사회적으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이라고 믿었다. 이 믿음에 공감한 저자는 보육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정식으로 보육사가 되어 민간 보육 시설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이에 영국의 집권당이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바뀌면서 복지 예산이 삭감되고 저자가 처음 일했던 무료 탁아소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저자는 긴축 이전의 탁아소 풍경과 이후의 탁아소 풍경을 각각 '저변 탁아소 시절'과 '긴축 탁아소 시절'로 나누어 이 책에 소개한다.
저자가 일한 무료 탁아소는 원래 빈곤층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노동당 집권 시절 영국 정부는 무료 탁아소가 부유층 아이들과 빈곤층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함께 어울리면서 계급 차이를 극복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는 장이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빈곤층은 부유층에 비해 선택지가 적기 때문에 무료 탁아소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부유층은 빈곤층이 무료 탁아소를 주로 이용한다는 이유로 무료 탁아소를 꺼리고 자녀를 비싼 보육 시설에 보낸다. 이런 식으로 탁아소 단계에서 분화된 계급의 차이는 이후 상급 학교를 거치며 심화되고 극심한 계급 갈등, 사회 분열로 이어진다.
저자가 일한 무료 탁아소에는 빈곤층 가정의 아이들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가 유색인이거나 이민자이거나 성소수자인 경우 등 경제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이곳을 택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백인 아이가 유색인 또는 이민자 출신인 아이를 차별하거나 이민자 출신인 부모가 성소수자 부모를 혐오하는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했다. 보수당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언론이 나서서 빈곤층과 이민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며 갈등을 부추겼다. 아이들은 집에서 부모가 한 말이나 TV에서 들은 말을 탁아소에서 만난 다른 아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했다. 이는 한국 사회, 한국 학교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 책은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가 분명한 책이지만 어려운 정치, 사회 서적처럼 읽히지 않고 보육 교사의 일상을 소개하는 에세이처럼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뜨거울 수밖에 없었던 건, 각각의 글에서 소개하는 에피소드가 그만큼 뜨겁고 생생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영국 사회의 절망적인 일면을 고발하는 한편으로 희망적인 일면 또한 소개한다. 애니가 설립한 무료 탁아소 출신인 빈곤층 소녀가 주변 어른들의 지원과 지지를 받으며 잘 자라서 훌륭한 보육사가 된 사례다. 이런 사례를 보면 절망을 만드는 것도 인간이지만 희망을 만드는 것도 인간임을 믿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