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늘과 가죽의 시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4
구병모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4월
평점 :
안은 공방을 운영하는 수제 구두 장인이다. 구두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못이나 접착제까지 기성품을 안 쓰고 손수 제작하기 때문에 품질은 뛰어나지만 이윤은 거의 안 남는다. 주문 받은 구두를 만들거나 구두 만드는 법을 배우러 온 학생들을 가르치며 근근이 살아가는 안의 공방에 어느 날 한 손님이 찾아온다. 결혼할 남자가 신을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미아는 사실 안의 오랜 형제다. 안과 미아는 원래 정령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몸이라는 게 생겼고 그 후로 이름과 모습과 거처를 바꾸며 죽지 않고 몇 백 년 아니 몇 천 년을 살아왔다.
안은 영원히 사는 자신이 언젠가 죽을 인간과 인연을 맺는 일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고 여기고 그동안 아무와도 깊은 인연을 맺지 않고 지냈다. 반대로 미아는 어차피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운명이라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보는 게 낫다고 여기고 다양한 일을 해보았고 유진이라는 애인도 만났다. 안은 유일하게 남은 형제인 미아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유진이 신을 구두를 열심히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아와 유진의 미래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품는다. 끝이 뻔히 보이는 사랑을 하는 미아와 그런 미아의 정체를 아는 지 모르는 지 알쏭달쏭한 유진을 이해하기 어렵다.
구병모 작가가 2021년에 발표한 소설 <바늘과 가죽의 시>는 한 편의 동화 같으면서도 철학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영원히 사는 안은 현재의 기쁨보다 무한대로 펼쳐진 미래에 느낄 슬픔의 총합을 더 크게 느낀다. 그래서 최대한의 기쁨을 추구하기 보다는 슬픔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미아는 안과 같은 영생의 몸을 가졌지만 정반대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안은 그런 미아를 보면서 처음엔 복잡한 감정을 느끼지만, 나중에는 영원히 사는 미아가 언젠가 죽을 유진을 사랑하는 것과 영원히 사는 자신이 결국 낡고 망가질 구두를 정성을 다해 만드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구두만이 아니다. 유진이 추는 춤도 사라지고, 음악도 사라진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아도, 잠깐일 뿐이라도, 누군가의 미소, 누군가의 평화를 만드는 일은 소중하고 경건하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수시로 전달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어차피 모두 사라지겠지만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계속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지에 대해 이 소설보다 더 아름답게 말하는 소설을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