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센디어리스
권오경 지음, 김지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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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인 여성인 피비는 한국에서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어머니의 기대에 따라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다행히 피비에게는 재능이 있었고 일찍부터 '천재 피아니스트' 소리를 들으며 주목 받지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한다. 한때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믿음을 잃고 무신론자가 된 윌 켄달은 대학에서 피비를 보고 강하게 이끌린다. 연인이 된 두 사람은 한동안 즐거운 나날을 보내지만, 피비가 탈북민 구조 활동을 하다가 북한의 수용소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왔다는 존 릴이라는 남자에게 끌리면서 둘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소설을 쓴 권오경 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의 첫 소설 <인센디어리스>는 작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출간 직후부터 큰 주목을 받아 현재 드라마 <파친코>를 연출한 코코나다 감독의 연출로 드라마화가 확정된 상태다. 이 소설은 피비와 윌의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은 북한의 독재자를 모방해 스스로 종교 집단의 지도자가 되는 존 릴이다. 그를 추종하게 되는 피비는 임신중절 수술 찬성에서 반대로 입장을 바꿀 정도로 그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이후 피비는 9.11 테러 이후로 미국 땅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습격에 투입되고, 피비의 연인인 윌은 그의 선택을 되돌려 보려고 하지만 역부족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피아노도 공부도, 부(富)도 명예도, 신앙도 열정도 최고만을 추구하고 어중간한 상태는 인정하지 않는 한국인들의 특성이 극단적인 정치와 종교, 테러 등에 대한 강한 이끌림으로 이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인도 아니고 완전한 한국인도 아닌 어중간한 정체성 역시 한국계 미국인들에게는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선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이 복잡한 서사를 코코나다 감독은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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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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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석탄을 나르는 작업 중인 사람들은 다섯 살 소년 빈센트가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본다. 빈센트의 부모는 빈센트의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서 이혼했고, 이별의 슬픔을 견디지 못한 빈센트의 어머니는 결국 어린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빈센트의 슬픈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빈센트에게 뭐라고 위로할 말을 건네지 못하는데, 정작 빈센트가 사람들을 돕겠다는 듯이 그들 곁으로 다가온다. 작디 작은 손으로 석탄 조각을 옮기며 사람들을 거드는 빈센트는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아는 걸까. 자신도 도움이 필요한데 누군가를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유디트 헤르만. 독일의 유명한 여성 작가라고 하는데, 독서 이력이 짧은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의 책을 읽었다. 그는 1998년 <여름 별장, 그 후>로 데뷔해 <단지 유령일 뿐>, <알리스>, <모든 사랑의 시작> 등을 발표했다. 2010년에 출간한 소설집 <알리스> 이후 12년 만에 나온 소설집 <레티파크>에는 총 1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편수가 많은 만큼 한 편 한 편의 길이가 짧은데, 그만큼 서사는 약한 대신 장면 하나 하나의 인상이 강렬하다. 첫 번째로 실린 단편 <석탄>에 나오는 빈센트가 손에 쥔 석탄 조각이라든가, 이어지는 단편 <페티시>의 여자(엘라)와 소년이 모닥불 앞에서 보낸 하룻밤이라든가.


표제작 <레티파크>는 페이지 샤쿠스키라는 남자의 연인이었던 두 여자, 로제와 엘레나가 긴 시간이 흐른 후 상점의 계산대에서 우연히 재회한 상황을 그린다. 로제는 한때 놀랍도록 예쁜 아가씨였던 엘레나가 몰라볼 정도로 몸이 불고 늙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페이지와 엘레나가 사귈 때 페이지는 엘레나가 자란 레티파크라는 동네의 사진을 찍어서 앨범으로 만든 후 로제에게 먼저 보여준 적이 있다. 그때 로제는 이런 사랑을 받는 엘레나가 부럽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페이지와 엘레나는 헤어졌다.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가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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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들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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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성식은 아내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다. 얼마 전 성식의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대뜸 자신에게 꿔간 돈을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돈을 꾼 일이 없다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은 알츠하이머병을 의심하고, 정기적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날에 서둘러 어머니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교회 사람들과 기도원에 가고 없고, 예전의 총명했던 어머니라면 자신들과의 약속을 잊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두 사람의 걱정은 더욱 깊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성식과의 전화 통화에서 성식의 목소리를 죽은 형 성준의 목소리로 착각한다. 정녕 어머니는 큰아들의 죽음조차 잊은 것일까.


이승우 작가의 소설집 <목소리들>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어떤 단편은 추상적이고 어떤 단편은 구체적이라서 공통점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목소리들>이라는 제목을 보고 어느 단편에나 인상적인 '목소리'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첫 번째로 실린 단편 <소화전의 밸브를 돌리자 물이 쏟아졌다>에는 차도에 물을 뿌리고 솔질을 하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강제 연행하려고 하는 경찰, 그리고 여자를 대변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어지는 단편 <공가>에는 남편 부재 중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시부모와 시동생의 큰 목소리 때문에 고생하는 여자의 사연이 담겨 있다.


앞에 서술한 <마음의 부력>에는 죽은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목소리를 혼동하는 어머니가 나오고, 이어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어야 했다>에는 갑질 및 성추행의 가해자로 지목된 회사 후배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를 피하는 남자가 나온다. <귀가>에는 재건축을 위해 비워진 건물 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한 소리를 들은 남자가 나오고, 표제작 <목소리들>에는 아들이 죽은 후 계속해서 목소리를 듣는 남자가 나온다. <물 위의 잠>은 또 다시 죽은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마음의 부력>과 겹쳐 보인다. 시인 이상의 이야기를 다룬 <사이렌이 울릴 때―박제가 된 천재를 위하여>도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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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미야모토 테루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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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세 남성 마키노 고헤는 도쿄 이타바시 구의 상점가에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중화소바를 운영하며 평생을 보냈다. 오랫동안 휴일도 없이 일만 했던 그는 아내 란코가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난 이후로 만사에 의욕을 잃었다. 어느 날 고헤는 책장에서 읽지 않은 책 한 권을 발견하고 펼쳤다가 오래된 엽서 한 장을 발견한다. 30여 년 전 고사카 마사오라는 남자가 란코 앞으로 보낸 이 엽서를 보고 란코는 분명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째서 모르는 사람이 보낸 엽서를 란코는 버리지 않고 간직했을까.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던 란코의 말은 거짓일까. 애초에 이 사람은 왜 란코에게 엽서를 보냈을까...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등대>는 우연히 발견한 엽서 한 장으로 인해 죽은 아내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된 남자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갑작스럽게 등대 여행을 하게 된 이야기를 그린다. 하필 '등대' 여행을 하는 이유는 엽서 앞면에 등대 사진이 있고, 엽서를 보낸 남자가 "등대 여행을 잘 다녀왔다."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사진만으로는 일본의 수많은 등대 중에 어느 등대인지 특정할 수 없어서, 고헤는 우선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등대부터 하나씩 가보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대화가 뜸했던 자식들과 뜻 깊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아내와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환갑을 넘긴 아저씨의 일상 이야기가 뭐 그리 재미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일단 고헤 씨는 엄청난 독서광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을 배운 고헤 씨는 명문대를 나온 친구 간짱의 권유로 책을 읽기 시작해 나중에는 책이 너무 많아서 2층 바닥이 내려앉겠다는 타박을 들을 정도가 된다. 그 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고헤 씨가 유일하게 끝까지 읽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 '문제의 책'이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인데, 책 정보를 찾아보니 출간 이후 30년 동안 종교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군림해 온 명실상부한 고전이며, 마침 작년에 개정판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언젠가 읽어보는 것으로.


친구한테 '은둔형 외톨이'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아내가 죽은 후 사람도 안 만나고 바깥 출입도 안 했던 고헤 씨가 여행을 통해 기력을 회복하는 과정도 감동적이었다. 소설에 따르면 오랜 세월 바다를 지켰던 등대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더 이상 효용이 없게 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추세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등대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수수하지만 진국인 고헤 씨와 란코 씨의 중화소바 역시 찾는 사람이 있을 터. 그 맛을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다시 한 번 가게 문을 연 고헤 씨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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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잉 홈
문지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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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계 백인인 브래드는 한국계 미국인인 아내의 아버지 호철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미국 뉴욕의 JFK 공항으로 향한다. 문제는 팬데믹으로 인한 격리 의무 때문에 한국에 도착해도 곧바로 장인을 만나러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아내와도 떨어져 호텔에서 격리 생활을 하게 된 그는 기내에서 썼던 미국 이민 1세대인 장인 이호철의 일대기를 이어서 써보기로 한다. 1942년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신세가 되어 결국 미국 이민을 택했고, 그야말로 밑바닥에서 시작해 종국에는 사업체를 여러 개 거느릴 정도로 큰 성공을 한 그가 한국에서 말년을 보내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초급 한국어>, <중급 한국어>를 쓴 문지혁 작가의 소설집 <고잉 홈>은 미국으로 이민 또는 유학을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다. 문지혁 작가는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해 뉴욕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어 강사로 일한 경험이 있다. 그는 미국에서 외부인이 되어보고, 외부인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았던 경험을 반영한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대표작 <초급 한국어>, <중급 한국어>가 작가 자신의 경험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느낌이라면, <고잉 홈>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초월해 미국 이민자, 유학생 전반의 이야기를 폭넓게 다룬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책에는 총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미국 이민 1세대인 장인의 생애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백인 사위의 분투를 그린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를 시작으로 시카고에서 뉴욕 집까지 이동하는 차에서 진행되는 실험에 참가한 현의 이야기를 담은 <고잉 홈>, 결혼 1주년 기념일을 맞아 플로리다의 한 호텔로 여행을 떠난 부부의 이야기인 <핑크 팰리스 러브>, 고모 가족과 함께 디즈니 월드에 갔다가 생긴 일을 그린 <크리스마스 캐러셀>, 저널리즘 수업 과제를 위해 단골 세탁소 주인을 인터뷰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골드 브라스 세탁소> 등 한 편 한 편의 설정이 다채롭고 내용도 재미있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한인 교회에서 운영하는 한글 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게 된 남성과 '맹 선생님'으로 불리는 여성 사이의 짧지만 깊은 우정을 그린 단편 <뷰잉>이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에는 매운 음식을 먹어야만 풀리는 감정이 있고, 아메리카노가 아닌 믹스 커피를 마셔야만 달래지는 허기가 있음을 아는 건 한국인들뿐이지 않을까. 한 해의 마지막 날 응급실 병원을 찾게 된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나이트호크스>,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건물에서 벌어진 일을 그린 <뜰 안의 볕>, 아버지를 찾아 한국에 온 한국계 미국인 자매의 다큐멘터리 제작기를 담은 <우리들의 파이널 컷>도 하나 같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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