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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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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의 여자들은 임신하는 순간 자신의 삶도 끝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임신을 하고 나면 지혜가 필요하다고, 뭔가 쉽지 않은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얼마 동안 그녀는 가정과 남편과 아이들이 보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그런 것들이 평범하지 않은 일이고, 인간의 경험을 좀 더 세련되게 만들어 주는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것들을 가지고 나서는 그녀의 혈관 안에 매일 조금씩 납덩이가 쌓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장을 보지 않으면 집 안에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바나비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베네딕트가 다시 직장에 나가 버리고 자신이 혼자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처리해야 할 집안일들이 너무 많아서, 베네딕트에게 부탁하느니 직접 하는 것이 더 편하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일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 그런 생각이 처음 들었을 땐 그녀도 많이 놀랐고, 거의 분노를 느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정의에 따르면 그런 일상적 폭력의 흔적은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가족들도 알아차려야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불평을 한 것은 실수였다. 어머니의 얼굴에 떠올랐던 그 기쁨의 표정, 사악한 기쁨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pp.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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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인근의 베드타운 알링턴파크에 사는 중산층 여성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위 문장에서 '런던'을 '서울'로, '알링턴파크'를 '분당'으로 바꾸면, 그러니까 '서울 인근의 베드타운 분당에서 사는 중산층 여성들의 삶'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나의 어머니의 삶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어머니는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에 들어가 친정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일만 하다가 옆 부서에서 일하던 신입사원, 그러니까 지금의 나의 아버지와 1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을 하면 여자가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그 때의 상식이었고, 어머니도 자연스럽게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그 때부터 오로지 나와 동생을 키우고 내조를 하는 데에만 전념하며 25년을 보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머니의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까지 어머니는 과연 행복하셨을까? 당신 입으로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좋은 남편, 안정적인 생활, 부족하지 않게 키운 자식들... 하지만 어머니 인생에도, 자식인 나는 감히 짐작하지도 못할 만큼의 권태와 괴로움, 갈증이 있었을 것이다. 높은 학업, 직장에서의 성공 같은, 어머니 인생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소망들... 못난 딸은 이제서야, 그것도 소설을 읽으며 겨우 그것들을 헤아릴 정도가 되었다.
이 책에는 다섯 명의 중산층 여성이 나온다. 각각 캐릭터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라는 점은 같다. 그리고 지겹도록 단조롭고, 숨막힐듯 갑갑한 남편의 속박, 아이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리고 있다는 점도. 그러나 세상이 그녀들에게 허락한 것은 얼마 안 된다. 기껏해야 근처 쇼핑몰에서 사지도 못할 야한 옷을 입어보며 여성성을 확인하고, 쉬는 시간마다 한 집에 모여 수다를 떠는 정도이다.
그 수다 조차도 처녀 때 같지 않은 몸매와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는 남편, 말 안 듣는 아이들 얘기를 하고나서, 그래도 자신들에게는 따뜻한 집이 있고 가족이 있으니 낫다는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수다 끝에 자기 삶을 합리화하기 좋아하는 크리스틴이 던진 말은 그 중 압권이다. "하긴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면, 저기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지진이나 그런 거 말이에요. 그런 생각을 하면 우리는 불평하면 안 돼. 그렇죠?" 크리스틴이 말했다. - p.140 뉴스나 신문을 보면서, 하루에도 얼마나 자주 이런 생각을 했던가!)
배경은 비슷하지만 이 소설이 '위기의 주부들'과 다른 점은 여성들 스스로 삶의 전환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누구는 문학에 대한 사랑, 문학반에 대한 열정을 확인하고, 누구는 딸에 대한 사랑을 다짐하고, 또 누구는 어머니의 삶을 반추하면서 권태감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자세를 찾는다. 특히 솔리가 파올라를 홈스테이 게스트로 맞이하면서 여성성을 되찾게 되는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파올라는 친구나 가족, 물건 등 세속적인 것에는 전혀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만끽하면서 사는 여성이다. 솔리는 그런 파올라를 보면서 한없는 부러움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의 인생이 '에사타멘테(Esattamente)', 즉 눈가리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파올라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가리개. 결핍과 상실감을 가리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사는 인생이라니,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 아내들은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의 삶을 희생하여 가족을 위해 눈가리개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는 여전히 많은 딸들, 며느리들에게 그런 삶을 강요하고 있다. (물론 아버지, 남편, 아들, 사위들의 삶도 고단하긴 마찬가지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영화 제목에 이어 노래, 그리고 이제는 '결혼은 무덤'이라고까지 말한다. 기술이 발달하고 생활이 편리해져도 가족, 부부 관계는 여전히 불합리하고 불편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지만 소설 속의 여성들이 끝내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나 또한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불완전한' 생활이 그녀들의 변화로 인해 '완벽한' 모습이 될 수 있었듯이, 나의 삶 또한 내가 변하면 달라질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지혜가 필요한 날이 왔을 때 꼭 이 책을 떠올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