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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가분 - 마음주치의 정혜신의 나를 응원하는 심리처방전
정혜신.이명수 지음, 전용성 그림 / 해냄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심리나 정신분석에 대한 책은 한 달에 한 권만 읽자, 는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데(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나한테는 그 정도가 딱 적당한 것 같아서...) 이번달은 예외로 해야겠다.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몇 번이나 결제할까 말까 고민한 책이, 도서관 신간 코너에,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깨끗한 상태로(물론 책을 정리하는 사서님들의 손은 탔겠지만... 그리고 배달하신 분도, 서점 직원도... 음음...) 놓여있는데 어찌 안 읽을 수 있으랴... ㅎㅎ
<홀가분>은 정신과의사 정혜신과 그녀의 남편 심리기획자 이명수가 함께 쓴 책이다. 부부가 같은 분야에서 때로는 동료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밀고 당기고 보완하며 활동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는데 이렇게 책까지 같이 쓰시다니, 부러움을 넘어 배가 슬슬 아프다.
이 책은 두 사람이 지난 5년간 나눈 고민과 생각의 결실을 화가이자 아트디렉터인 전용성의 그림과 함께 담아낸 그림 에세이로, 제목대로 '홀가분'하게 읽기 좋다. 나도 잠자기 전이나 이동할 때 틈틈이 여러 편씩 읽었는데 마음이 차분해지고 개운해져서 좋았다. 시간도 훌훌 잘 갔다.
한 초등학생은 백 점을 맞았는데도 아빠한테 눈물이 쏙 빠질만큼 혼이 났답니다. 백 점은 맞았지만 글씨가 삐뚤빼뚤해서 앞으로 글씨를 똑바로 쓰지 않는 나쁜 버릇이 생길까봐요. - 모진 사랑(pp.144-5)
박태환을 축구장으로 데려가 박지성만큼 뛰지 못한다고 윽박지르고, 김연아에게 골프채를 쥐어주고 미셸 위처럼 스윙을 못한다고 한숨 쉬고, 조용필의 글발이 양인자만 못하다고 혀를 차기 시작하면, 견뎌낼 장사가 없지요. - 자책은 이제 그만(pp.44-5)
사회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인간이자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사는 시민으로서 이러한 사회적인 압박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어렵다. 먹고 살려면 수없이 다치고 깨지면서 좀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고, 그런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 점을 맞아 기분이 좋은 아이를 글씨가 안 예쁘다는 이유로 야단을 친 아버지의 이야기를 읽으니 맥이 탁 풀린다. 열심히 했는데도 칭찬은커녕 생각지도 못한 트집이 잡혀 혼이 나는 아이의 모습은, 안 놀고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갔는데 취업이 어렵고, 취업을 해도 버티기가 힘들고, 높기만 한 집값에 물가인상에 교육비에 등록금에 노후대비 등등 갈수록 걱정이 태산인 대한민국 보통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닮았다.
게다가 한 번뿐인 인생 내 맘대로 살 권리가 있는데도 친척, 이웃, 지인 등등 감 놔라 배추 놔라 오지랖 넓은 사람도 많은 게 우리 사회의 특징이자 문제다. 진짜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이 대개 비슷비슷하다는 것. 대학은 어디 이상 가야 한다, 결혼은 언제까지 해야 한다, 애는 몇 이상 낳아야 하며 연봉을 얼마를 받아야 어쩌고저쩌고... 왜 그 이상을, 그 너머의 것을 생각하지 못할까.
제 경험에 의하면,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든 힘의 근원은 자기를 절절하게 느끼는 행위에서 비롯합니다. 잘나든 못나든, 상처투성이든 아니든 그 안에서 내 본래의 모습이 이랬구나, 내가 그래서 힘들었구나, 나한테 이런 욕구가 있었구나...... 를 알아차리고 발견하기. 그럴 때 인간의 자기치유력은 극대화됩니다. - 자기치유력의 근원(pp.194-5)
이 책의 저자들은 답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아보자고 말한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처가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 마주하는 것을 꺼린다. 아마도 입시에 취업에 경쟁에 숨 쉴 틈 없이 살다보니 자기를 돌아볼 시간이 없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귀중한 시간을 놓쳐서는 인생 자체에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주변을 보면 재수, 삼수를 하거나 입대, 유학 중에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는 사람이 제법 있다. 시간도 남고, 원래 생활에서 비껴나 있다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 결과 자기가 진짜 원하는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거나, 전역 후 전보다 치열하게 살게 되었다거나, 유학 후 진로를 변경하는 등 인생의 반전을 이루었다는 스토리도 심심찮게 듣는다.
나는 재수도 안 했고 1년 휴학 기간도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건만 대학 졸업 후 취업을 못해 인생 최초로 여유로운(또뜨는 '잉여'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나한테는 지금이 그 재수, 삼수, 입대, 유학 같은 기간인 것 같다. 이 시간 덕분에 나는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고, 그 결과 평생을 걸고 싶은 공부도 찾았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특히 심리학 책에 눈을 뜨면서 내 안의 상처와 욕구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고나니 첫째, 화내는 일이 줄었다. 덤으로 화내고 나서 후회하는 일도 줄었다. 둘째, 자신감이 생겼다. 나조차도 몰랐던 콤플렉스들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셋째, 여유가 생겼다. 아픈 말들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고, 그 사람 마음에 병이 있나보다 하며 넘기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신경쓰이는 일이 줄고 마음 다치는 일도 별로 없게 됐다. 어쩌면 누구보다 날 괴롭히고 힘들게 한 건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살다 보면,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인에게 억하심정이 있던 설렁탕집 주방장이 주인에게 손해를 끼칠 요량으로 뚝배기에 고기를 듬뿍듬뿍 넣었더니 '고기 반 국물 반'이라는 소문이 나서 최고의 설렁탕 전문점이 되었다는 전설처럼요. 그래서 모자람이 성취의 가장 중요한 동기라는 성공신화는 어떤 경우엔 가장 마음에 와 닿는 잠언이 됩니다. 지금 무언가 모자란다고 느낀다면 '조만간 무엇을 이루겠구나' 하는 신호일지도요. - 결핍 동기(pp.58-9)
먼저 나부터 돌보자는 말에는 심리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바로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하나 이상의 결핍 요소와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나 '나는 완벽하다, 내 말이 곧 법이요, 진리다.' 라는 식으로 믿을 때 문제가 생기고 사람들과 갈등이 생긴다. 먼저 자신의 존재의 불완전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기라는 철창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세상을 이해하게 될 수 있는 것 같다.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는가' 라는 유명한 노랫말도 있지만, 때로는 내가 바꾸지 않아도 시간이나 상황이 저절로 바꾸어주는 때가 있고, 내가 굳이 말하고 행동하지 않아도 남이 저절로 깨닫고 바뀌는 때가 있다. 또 내가 맞다고 여긴 것이 훗날 틀리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도 있다. (그런 때는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자다가 하이킥한다는 말이 절로 이해가 된다.)
그저 홀가분하게 모든 걱정근심을 내려놓고 세상을 향한 안테나를 조금 접어두는 것이 필요한 때도 있는 법이라고, 조금만 덜 빡빡하게 살자고 말하는 이 책, 참 홀가분하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 나희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