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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배신 - 시장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라즈 파텔 지음, 제현주 옮김, 우석훈 해제 / 북돋움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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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워런 버핏이 소득이 많을수록 세금을 많이 내야한다는, 이른바 '부자 증세론'을 역설하여 미국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만들어진 이 책에 워런 버핏의 발언이 실려 있는 것을 보니 갑작스런 일은 아닌 모양이다.    

 

워런 버핏은 자체 내부 감사를 한 후 자신이 사무실의 비서와 사무원보다 훨씬 낮은 소득세를 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투쟁을 벌이는 쪽은 우리 부유층 쪽이며, 부유층이 투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p.145) 

 

세금은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이슈지만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이슈다. 중학교 사회 이상을 배운 사람이라면 세금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벌어졌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경제와 정치는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상하게 우리나라는 경제와 정치가 연결되는 것에 대해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정경유착'을 비롯하여 정치와 경제가 연결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관념이 뿌리깊게 박혀있기 때문인지... 

이번에 읽은 <경제학의 배신>은 보기 드물게 경제와 정치를 연결시킨 경제학 서적이다. 경제학 신간으로 받아든 책이 궁극적으로는 정치에 대한 얘기로 끝나서 아리송했지만, 저자 라즈 파텔이 대학(옥스퍼드대)에서 정치철학과 경제학을 이중전공했다는 것을 보고 예상은 했었다.  

저자는 먼저 경제학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을 깨부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아담 스미스에 대한 믿음,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대한 믿음, 가격에 대한 믿음, 기업에 대한 믿음 등등...  하지만 대부분의 학문이 그러하듯 경제학도 여러 학파의 견해를 수렴한 결과 이룩된 학문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 대한 '믿음'만으로 판단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대 경제학에 대한 이해는 고전파 경제학에서 비롯된 이른바 주류 경제학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한 나라의 소득이 주택, 식량, 물, 에너지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킬 기본적인 수준을 일단 넘어서면, 경제가 성장한다 해도 국민의 평균적인 행복감이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점도 발견했다. 다시 말해, 일정 수준을 지나면 돈이 더 많다고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더 행복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쾌락의 쳇바퀴'에 빠져들어 친구나 이웃의 수준만큼은 소비해야 행복감을 느끼게 되어버린다. (p.73) 

 

시장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하는 책은 많지만, 이 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치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저자는 특히 서양 정치의 대표적인 특징인 공동체의 참여와 토론의 활성화를 강조한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또는 그렇다고 믿는 믿음)을 극복하고 탐욕스런 기업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이타적인 본성을 끄집어내고 시민들이 서로 연대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답인 것도 같다. 

그 사례로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레(p.282), 멕시코의 사파티스타(p.276) 등이 제시되는데, 대학교 2학년 때 배운 내용을 이 책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비싸다고만 느꼈던 등록금이 제 값을 한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 때 이후로 참신하고 획기적인 사례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사회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기대는 늘 존재하지만, 그것을 주류로 끌어올리기는 아직 역부족인 모양이다.     

 

좀 더 공정하고 온정적인 사회로 가는 과정에는 많은 장벽이 존재한다. 소수의 사람과 경제 주체의 손에 자원과 권력이 집중되면 민주주의의 성공이 가로막힌다. 우리에게는 좀 더 '유연한' 재산권 개념이 필요하다. 재산권과 시장을 항상 공정성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민주적 고려의 아래에 두어야 한다. (p.289)

 

요즘 대학생 10명 중 4명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데 전공자로서 마음이 무겁다. 경제든 경영이든 모두 정치라는 바탕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정치에 대한 관심 없이 과연 경제를, 나아가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망가진 시장을 되살려내려면 우리 모두 그 정치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저자의 부르짖음이 지금 당장은 공허하게 들릴지라도, 언젠가는, 결국은 그렇게 되리라고 그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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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꽃은 나 하나로 족하지 않아? - 데이비드 세다리스 코믹 에세이
데이비드 세다리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학고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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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너무 심각한척 하는 수사물이나 법정물, 세상을 한없이 낙관적으로 보는 로맨틱 코미디 같은 장르는 안 보게 되었다. 그보다는 헙수룩한 주인공이 자질구레한 역경을 이겨내며(?) 꾸역꾸역 살아나간다거나, 저 혼자 잘난줄 알다가 큰 코 다치는 내용의 코미디가 좋다. 허세나 환상 이런 걸 다 버렸다는 게 아니라, 조금씩 삶의 단맛보다는 쓴맛을 볼 일이 늘면서 산다는 건 그래봤자 전자 아니면 후자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너한테 꽃은 나 하나로 족하지 않아?>의 저자 데이비드 세다리스도 그런 사람인 것 같다. '잎새에 이는 바람'까지는 아니더라도, 욕쟁이 이웃 할머니, 성적인 농담으로 딴지거는 택시 기사, 기내에서 불쾌하게 만드는 옆자리 승객 등등 살면서 부딪치는 아주 사소한 문제 하나에도 그는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는 크게 반발하지 않는다. 그저 소심하게 십자말풀이에 'bitch' 다섯 글자를 쓸 뿐이고, 자기를 속상하게 만드는 연인한테 크게 화 한 번 못 내고 그가 꺾어온 꽃을 병에서 뽑아 던지는 것으로 대신하고, 행여 홧김에(또는 용기를 내어) 언짢은 말 한 마디 했더라도 밤새 죄책감에 가슴이 두근대는 이 사람, 참 나 같다. (근데 난 왜 이 사람처럼 안 귀엽지?)  

그렇다고 더 큰 일에 '분노하라'는 것은 아니다. 자기한테 주어진 정도에 만족하며, 그러나 일상을 너무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건 닭살 돋고, 그냥 한바탕 웃음으로 털털하게 넘기는 ㅡ 이 책이 딱 그런 느낌이다. 주인공도 찌질하고, 에피소드도 찌질하고, 등장 인물도 찌질한데 읽고 있으면 웃기다. 찌질한 나의, 찌질한 일상도 누가 보기에는 이렇게 우습고 재밌겠지?

낯선 이름인데 이미 미국에서는 큰 상도 타고 '현존 미국 최고의 유머 작가'라고 불릴만큼 명성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한다. 어쩐지 제법 두꺼운 책인데 낄낄대며 웃다보니 금방 다 읽겠더라. 이 사람 책이 국내에 또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그것도 조동섭 님의 번역으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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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붕어빵>을 보는데 어머니가 그러셨다. 민서가 불쌍하다고. (참고로 민서는 붕어빵에 출연하는 박찬민 아나운서의 세 딸 중 둘째딸) 언니한테 눌리고 동생한테 치여서 얼마나 힘들겠냐고.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어머니는 아들 둘 딸 셋인 집의 둘째로 태어나, 그것도 어렸을 때 몇 년동안 어머니(나에게는 외할머니)와 떨어져 시골에서 할머니 손에 자라셨다고 하니 민서 맘을 아시겠지.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 자기한테 보이는 것만 본다고 했던가. 나는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첫째딸 민진이가 안쓰럽다. 아들 없는 집의 장녀로 태어나 아들노릇 해야한다는 부담을 알게 모르게 받다보니 또래보다 어른스럽고 똑똑해진 그 애가 기특하면서도 안됐다. 아빠가 좋아하는 테니스도 열심히 하고, 반장을 할 만큼 학교 생활도 열심히 하고, 여동생 둘을 챙겨야 하는 그 아이의 마음을 나는 안다. 내가 그랬으니까. 

심리학 책을 읽다보면 자기 안의 아이와 만나야 한다는 문장을 많이 접한다. 그 문장을 접할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아이를 본다. 저게(내가) 아들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친척 어른들의 말을 듣는 나, 아빠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나, 일 나간 엄마 대신 동생을 돌보아야 하는 나, 부모님, 선생님 마음에 들려면 성적을 더 잘 받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공부하는 나, 어른스러운 척 하는 나, 강한 척 하는 나... 

며칠전 문득 나는 한번도 운동회나 소풍, 수학여행 같은 이벤트에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은 내 기억속에서 단 한번도 즐거운 행사였던 적이 없다. 반장으로서 반 아이들을 잘 이끌어야 한다든가, 선생님 도시락을 챙겨야 한다든가 하는 부담, 걱정 그런게 전부다. 가장 즐거워야 할 행사 때에도 그랬는데 보통 학교 생활 때는 오죽했을까. 괜찮은척 웃고있지만 속은 늘 우울했다. 한번도 행복했던 적 없다. 

다행히 대학 입학과 함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부모님, 선생님 모두 기대에 못 미치는 대학에 들어갔다고 재수를 권유했지만 나는 좋았다. 다른 학교들처럼 선후배 관계가 돈독해서 학풍이 권위적인 것도 아니고, 학교 행사가 너무 많아서 내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수업 듣고, 도서관에서 책 읽고, 관심있는 외부 활동 하며 '나의' 시간을 채우기만 하면 되었다.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성적을 잘 받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내가 여자라서, 장녀라서 어떻다는 소리도 들을 일이 없었다.   

그렇게 지낸지 약 6년. 이제 내 안의 아이가 조금씩 웃을 줄도 알게 되고, 진심으로 다른 사람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난 늘 내가 불쌍하고 안됐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행복이라는 말도 입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아이를,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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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얀 마텔 지음, 황보석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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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지만, 나는 여성이니까...흠흠...) 

 

<베아트리스와 버질>을 읽고 필 받아서 얀 마텔의 초기작인 <셀프>를 읽었다. 내친 김에 그의 작품을 다 읽어버릴까 싶었는데 <셀프>를 읽고 나니 어려워서 엄두가 안 나네... 

얀 마텔의 소설을 몇 권(이라고 해도 세 권이다. 파이 이야기, 베아트리스와 버질, 셀프) 읽어보니 책 제목이 내용에 대한 힌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파이 이야기>의 원제는 'Life of Pi'인데 말 그대로 파이를 통해 생의 강인함 내지는 잔인함에 대한 책이고,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죽음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셀프>는 감을 잡기가 어려운 제목인데, 읽어보니 영어의 'himself', 'herself'에서 성별을 나타내는 him과 her를 지운, 무성(無性)(혹은 그냥 성)의 존재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공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남성이었다가 성인 이후로는 여성으로 살게 된다. 란마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데, 남성과 여성 모두를 아울러 성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저자 나름의 설정인 것 같다.  

성인 이전의 남성으로 살았던 부분은 부모가 외교관이라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외국어를 배우고 낯선 친구들을 사귀는 모습은 저자 자신의 어린 시절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라서 그런지 묘사가 구체적이고 실감났다.  

성인 이후 여성으로 사는 부분은 앞부분보다 매력이 덜하지만 월경에 대한 묘사만큼은 기가 막히다. 남성이었을 때는 월경을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했던 주인공이 여성이 되어 직접 경험하게 되자 '고무줄로 불알을 꽁꽁 동여매놓은 것 같은 통증'이라며 기겁을 하는 장면은 최고였다. (고무줄로 불알을 동여매놓은 통증은 뭘까? 내가 매달 겪는 고통이 그런 고통이란 말이지...?)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내용이기는 했지만, 읽다보니 살면서 성의 신비를 반절 밖에 경험해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성과 정체성, 인생의 연관성이라면, 여성으로서 나는 삶을 딱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 불완전함이 내 성적 정체성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갈구하도록 만들고, 반쪽을 찾게 만드는 것일테지만... 

<파이 이야기>, <베아트리스와 버질> 등 근래작들과는 분위기가 달라서 놀라웠지만, 얀 마텔 특유의 독창적인 문장과 섬세한 묘사가 살아있는 점은 그의 소설 다웠다.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한데다가 문장까지 아름다운 작가를 발견하는 일은 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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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스와 버질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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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에 관한 이야기라는 배경지식이 없었더라면 사실 이 책이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작가인 주인공 헨리가 홀로코스트에 관한 소설을 쓰려다가 퇴짜맞는 부분 이후로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언급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데다가, 다짜고짜 등장하는 단편과 희곡, 이야기 전체의 접점도 알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저자는 유대인도 아니요, 독일인도 아닌, 홀로코스트와 상관이 없는 캐나다 출신의 작가인데 굳이 홀로코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택한 이유는 뭘까.  

 

하지만 끝까지 읽으면서 그것이야말로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닐까 싶었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사람과 겪지 않은 사람의 경험의 간극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직접 경험한 사람의 기억에 더 무게가 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접 경험한 사람의 경험만이 소중한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인류 전체의 상흔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뚝뚝 끊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의 단편들은 모두 그 상흔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캐나다인이고 홀로코스트를 겪지 않았다고 해서 인류 전체가 가지고 있는 고통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며 홀로코스트는 물론 6.25도 겪지 않은 나도.)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다른 나라 일이라도 고통을 겪은 이들의 증언에 공감하고 계속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은 후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몫이며 이것 또한 소중하다. 전후 세대가 전쟁과 무관하다고 해서 책임을 방기하면 될까? 고국의 일이 아니라고 해서 제 3국들이 모두 등을 돌리면 될까? 모른다고 해서 알려는 노력을 덜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파이 이야기>에 비해 주제의식은 강한 반면 파격은 덜 한 작품이지만(그래서 실망했다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공부하고 있는 학문과 연관되는 부분도 있고, 앞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식으로 국내 문제뿐 아니라 국제 문제에 대해서도 발언하는 소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먼저 이런 시도를 한 이 소설이 인상적이었다.   

그러고보니 얀 마텔은 아버지가 외교관이라서 고국인 캐나다를 떠나 스페인, 프랑스,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 거주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나 시대라는 굴레로부터 더 자유롭고, 전 세계, 인류 전체라는 시각으로 조망하는 것이 더 편하지 않나 싶다. 캐나다인으로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소설도 쓴 김에, 일제의 조선에 대한 만행에 대해서도 소설을 써주면 좋을 것 같은데(얀 마텔 정도면 전세계에서 관심을 가져줄텐데...)... 무리려나?

 

<파이 이야기>를 나는 엄청 쇼킹한 반전이 있는 비극적인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른 리뷰를 읽어보니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평한 분들이 많으셔서 놀랐다. 신의 존재를 믿게 된다고? 내 기억엔 거의 공포 소설이었는데...내가 소설을 읽는 관점이 남들하고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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