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라는 나라 - 고정애의 영국 편력기
고정애 지음 / 페이퍼로드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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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다섯 살 때 경기도로 이사 가서 동생의 대학 진학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고향 이야기를 꺼내면 나는 서울을 떠올려야 할지 경기도를 떠올려야 할지 모르겠다.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기억은 희미하다 못해 없다시피 하고, 경기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기억은 선명하지만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애정은 없다. 


"영국인들은 애국심보다는 애향심이다." 중앙일보 기자 고정애가 쓴 영국 편력기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이다. 영국은 20세기 초까지 대영제국으로 불리며 세계 패권을 장악했고, 영국령에 속하는 식민지가 하도 많고 넓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랬던 만큼 영국인들의 영국 사랑, 애국심도 대단할 줄 알았는데,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영국인들의 애국심은 자신의 고향에 대한 애정보다 결코 크지 않다. 특히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등 '非 잉글랜드' 지역의 애향심은 하늘을 찌른다. 각 지방의 방언이 소멸되지 않고 아직까지 건재한 것도, 각 지방의 전통과 문화, 자연환경 등이 몇백 년 이상 그대로 보전되고 있는 것도 다 남다른 애향심 덕분이다. 


영국인들은 전통을 목숨처럼 여긴다. 영국에는 여전히 신분 제도가 존재하며, 신분에 따라 출신 학교와 직업, 인맥 등이 나뉜다. 부당하고 불합리하지만 그 나름의 장점도 있다. 상층 계급은 자신들이 누리는 권리에 상응하는 의무를 진다. 전쟁이 나면 아버지 아들 할 것 없이 한 집안의 남성 모두가 참전한다. 하층 계급이 상층 계급으로 '신분 상승' 할 수 있는 기회도 열려 있다. 대표적인 예가 데이비드 베컴이다. 전통을 수호하되 변화를 기피하지 않는 문화는 영국을 정치 선진국으로 이끌었다. 알다시피 영국은 의회 민주주의의 발상지이며, 여성 참정권 운동의 시발점이자, 성소수자, 이민자, 난민,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 문제에 대해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의원들이 650명으로 우리네(300명)보다 많다곤 해도 여당 의원의 상당수가 내각에, 또 야당 의원의 상당수가 내각을 감시하는 예비내각에 참여해 일을 덜 할 리 만무한데도 보좌진 인건비 총액은 2억 원에 불과하다. (중략) 상원 의원들에겐 기본급이란 개념조차 없다. 회의를 하게 되면 그에 따른 회의 수당을 줄 뿐이다. 최대가 300파운드다. 한 상원 의원을 의회 밖에서 만나려 했더니 만남 장소까지 이동하는 택시비를 내달라고 했다. 편도 10파운드 정도였다. (245쪽) 


저자가 정치부 기자인 만큼 영국 정치에 관한 설명도 자세하다. 저자는 만 3년 동안 영국에서 특파원으로 지내면서 영국 정치 현안을 취재하기도 하고 영국 정치인을 여러 번 직접 만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영국의 의원은 우리네 국회의원보다 결코 덜 일하지 않는데도 누리는 혜택은 적다는 것이다. 영국의 상원 의원은 기본급을 받지 않고 회의 수당을 받는다. 전용 기사도 없고 보좌진도 적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도 기본급 대신 국회 출석 여부에 따라서 수당을 주면 어떨까. 의정 활동 내역을 실적으로 환산해 시시각각 국민이 체크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괜찮겠다. 학생들은 출결 상황이 내신에 반영되고, 직장인들은 실적에 따라 연봉이 결정되는데, 국회의원은 왜 아닐까. 영국 의회 좀 본받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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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범죄피해자가 되지 않는 법 - 나를 구하는 범죄 예방 습관
배상훈 지음 / 스노우폭스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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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안전 지수는 세계 상위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성이 체감하는 안전 지수도 같을까? 대한민국 경찰청 1기 프로파일러이자 범죄분석 전문 팟캐스트 <CRIME>을 진행하는 배상훈 교수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여성에게 결코 안전한 나라가 아니다. 길거리에는 성희롱이 만연하고, 사이버 공간에는 몰래카메라 동영상이 판을 친다. 시선 폭력을 부추기는 광고와 성매매도 일상화되어 있다. 남자친구에 의한 폭력, 남편이나 아버지, 아들에 의한 폭력도 넘쳐난다. 문제는 물론 가해자에게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경찰과 검찰, 법원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이고, 남성의 편견과 성범죄에 대한 무지로 가득찬 수사를 하고 판결을 내린다. 여성인 피해자는 신고나 고소를 했다가 수사 당국으로부터 2차, 3차 가해를 당하거나, 가해자가 무죄로 풀려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렇게 될 걸 알기에 신고하고 싶어도 포기하게 된다. 고소는 언감생심이다. 미투 운동에 나서는 여성들을 보면서 대단하다, 용기 있다고 칭찬하면서도 정작 내가 당한 성희롱이나 성폭력은 쉽게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다. 


잘못한 건 가해자이고 바꿔야하는 건 법이고 시스템이지만, 그 전까지 버티려면 나를 잘 지켜야 한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배상훈 교수의 신간 <대한민국에서 범죄 피해자가 되지 않는 법>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여성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범죄 예방 습관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소개한다. 혼자 살든 가족과 같이 살든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무조건 안전하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방범창도 높은 창문도 CCTV도 방범 설비도, 범죄를 저지르려고 마음 먹은 범죄자한테는 별 것 아니다. 문단속 잘 챙기고, 호신용 호각을 항상 소지하고, 택배 기사, 배달원, 경비원, 관리인, 옆집 사람 등등 집을 찾아오는 사람은 무조건 경계부터 하고 본다. 경계해서 손해볼 것 없다. 


공공장소에서 안전을 지키는 방법도 자세히 나와 있다. 지하철을 탈 때는 맨 앞 칸이나 맨 뒤 칸에 타는 습관을 들인다. 범죄자는 도망갈 곳이 없는 맨 앞 칸이나 맨 뒤 칸에 잘 타지 않는다. 택시를 탈 때는 영업용 택시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탄다. 영업용 택시는 번호판이 '아', '바', '사', '자'로 시작된다(나는 20대 초반에 택시에서 안 좋은 일을 몇 번 겪은 이후 절대로 택시를 타지 않는다). 주차장은 공간 특성상 인적이 드물고 어둡고 사각지대가 많다. 가능한 한 유동 인구가 많은 입구나 출구, 엘리베이터 근처에 주차를 하고, 크기가 큰 차량이나 기둥 옆에 주차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남자와 단 둘이 타는 상황을 가능한 한 피하고 층수 버튼 앞 상대가 시야에 들어오도록 비스듬히 선다. 엘리베이터가 다른 층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다음 현관문을 연다. 


범죄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가해자에게 다음 범행에 대한 용기를 주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피해자에 대해 '평소 행실이 어떻다든지, 칠칠치 못하다든지' 등의 표현을 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것일 뿐 아니라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고 회피할 퇴로를 만들게 한다. 피해자의 가족은 가해자에 대해 명확하고 단호하게 처벌 의지를 보이고, '너는 아무리 초범이라도 범인이고 내 가족은 피해자이므로 절대 비난받을 것이 없다'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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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 인지 과학이 밝힌 진보-보수 프레임의 실체
조지 레이코프 & 엘리자베스 웨흘링 지음, 나익주 옮김 / 생각정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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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아기가 한밤중에 울 때, 안아올릴 텐가?" 프레임의 중요성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의 신간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에 나오는 질문이다. 


정치에는 크게 두 개의 도덕적 세계관이 있다. 하나는 진보적인 세계관이고 다른 하나는 보수적인 세계관이다. 사람들은 으레 자신의 정치 성향에 대해 '진보적이다' 또는 '보수적이다'라고 답하는데, 구체적인 정책이나 개별 사안에 대해 자신의 정치 성향과 무관한 입장을 견지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를테면 진보 성향인 사람이 대북 이슈에 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취한다거나, 보수 성향인 사람이 노인 복지 확대는 찬성한다거나. 이런 사례를 볼 때마다 대체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정확한 기준은 무엇인지, 나아가 어떤 사람이 진보 성향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보수 성향을 가지는지 궁금했는데 저자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나 보다. 이 책에 그 답을 제시한 걸 보면. 


저자는 인간의 가치관은 언어로 형성되어 언어로 표현되며, 정치 성향 또한 언어로 형성되고 언어로 표현된다고 설명한다. 정치 성향이 형성되는 것은 대체로 어린 시절 가정 내에서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부모를 통해 권위나 권력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고 그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 쉽게 말해 엄한 부모 밑에서 자랐고 부모의 양육방식이 옳다고 느낀 경우 자녀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자애로운 부모 밑에서 자랐고 부모의 양육 방식이 옳다고 느낀 경우 자녀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엄한 부모는 아기가 한밤중에 울 때 안아주지 않고 내버려 둔다. 이들은 자녀가 잘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하지 않지만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을 내린다. 그런 부모의 양육방식이 옳다고 믿는 (보수 성향의) 자녀는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부와 명예를 차지하고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이 부와 명예를 차지하지 못하는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자애로운 부모는 아기가 한밤중에 울 때 얼른 달려가 안아준다. 이들은 자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게 해주고, 잘못하거나 실패했을 경우에는 처벌을 내리지 않고 재기할 기회를 준다. 그런 부모의 양육 방식이 옳다고 믿는 (진보 성향의) 자녀는 가난한 사람들이 복지제도의 혜택을 받고, 병든 사람이 공공건강관리 체계의 혜택을 받고, 교육적 배경이 전혀 없는 사람이 공립학교의 수혜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보수주의자들이 자유를 수호한다고 말하면서 성차별, 인종 차별, 성소수자 차별, 이민자 차별, 장애인 차별을 옹호하는 것 역시 부모의 양육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사회의 다수(majority)가 아닌 사람들이 사회의 다수인 사람들이 나누어 가지기에도 모자란 부와 명예를 나누어 가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전통을 무시하고 관습을 파괴하는 -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아이인 - 사람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한때는 보수였지만 지금은 진보로, 또는 한때는 진보였지만 지금은 보수로 자신의 정치 성향을 바꾼 이들은 어떤 부모 밑에서 자랐고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연구해 볼 만한 주제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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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짐을 수업하다 - 나를 지키면서 사랑하고 헤어지는 법
쑨중싱 지음, 손미경 옮김 / 미래의창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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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연애하는 동안의 관계와 이별을 충분히 돌아보고 곱씹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별의 단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헤어짐을 수업하다>의 저자 쑨중싱은 타이완의 사회학자이자 저명한 연애 카운슬러이다. 저자는 타이완 대학교에서 '사랑의 사회학'이라는 수업을 10년 이상 하고 있다. 저자는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연애 다이어리 쓰기'라는 과제를 내준다. 지나간 연애든 현재 진행 중인 연애든, 짝사랑이든 열애든 삼각관계든, 사랑의 경험이라면 무엇이든 좋으니 마음껏 쓰도록 한다. 


연애 다이어리를 쓰면서 학생들은 자신의 지난 연애 경험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때는 상대한테 이별의 원인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나한테 이별의 원인이 있었다거나, 그때는 내가 무조건 잘못한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상대한테도 책임이 있었다거나. 그렇게 지난 사랑을 돌아보고 현재의 사랑을 진단하는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사랑과 이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고, 더 나은 사랑, 더 나은 이별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된다. 


나아가 저자는 사랑이란 무엇이고 이별이란 무엇인지, 사람은 왜 사랑에 빠지고 이별을 결심하는지,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나는지, 잘 사랑하는 법은 무엇이고 잘 이별하는 법은 무엇인지, 이별 후의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한때는 서로를 지독하게 사랑했던 사람들이 돌연 이별을 결심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별의 이유를 크게 외재적 요인과 내재적 요인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외재적 요인은 나이, 사회계층, 종교, 교육 정도, 가정환경, 성격 차이, 연인 간의 소통 및 상호작용 부족, 가족이나 친구의 반대 또는 더 나은 사람의 등장 등이다. 내재적 요인은 상대에 대한 열정 또는 연애에 대한 낭만 감소("너에 대한 감정이 식었어."), 연인 간의 친밀감이나 포용력 감소("너 변했어. 예전엔 이렇지 않았잖아!"), 역할의 증가("나는 결혼을 하는 거지, 당신 집에 팔려가는 게 아니야!"), 점점 줄어드는 대화 등이다. 


저자는 만약 자신이 연애를 할 때마다 거듭 차이고 연애 관계를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면 지난 연애부터 돌아보라고 조언한다. 지난 연애를 돌아보고 문제점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는 과정 없이 무작정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것은, 마치 노트북을 포맷하지 않은 상태에서 윈도우를 새로 설치하는 것과 같다. 연애를 할 때 나는 주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어떤 특성을 보이며, 상대는 나의 어떤 점을 좋아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지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한다. 


이별에 대한 분석과 학습은 점점 늘어나는 이별 범죄를 예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저자는 특히 남자가 연인에게 차여 울고 있을 때 가족이나 친구들이 "사내자식이 그깟 일로 눈물을 흘리고 그래, 못난 놈!"이라며 비난하는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헤어진 것도 서러운데 남들이 욕까지 하면 이 남자는 자신의 고통에 공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끼게 되고, 심하게는 범죄나 자살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지나간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잊혀진다' 같은 말도 이별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한테는 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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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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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이 나라에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가 없었다. 오직 소수의 권력자와 자본가와 지식인들을 위한 정치, 비통한 자들을 만드는 정치만 있었다. 그리고 4년 전 오늘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시끄럽다, 그만하라 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함께 울었다. 더 이상 비통한 자들을 만드는 정치는 없어져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그 결과 정권이 바뀌었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파커 J. 파머의 책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대립과 분열의 정치를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정치로 나아가는 방안으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를 제시한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란 쉽게 말해 '마음을 다친 사람, 상처 입은 사람을 위한 정치'다. 정치적 입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통합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비통함'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기 어렵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 큰 사고를 당하거나 병에 걸렸을 때,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생계의 위협을 받을 때, 불합리한 차별이나 편견에 부딪힐 때, 사람은 누구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과 아픔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을 보면 연민을 느끼고 도와주고 싶은 감정이 드는 것도 '인간이라면' 당연하다. 


문제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느껴야 할 연민이나 동정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몰인정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우리는 그 예를 '너무 많이' 안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타인의 슬픔이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을 잃거나 무관심한 이유로 '소비주의'와 '희생양 만들기'를 든다. 모든 것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는 소비주의는, 세월호 사고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의 목숨보다 사고 처리에 드는 세금이나 유족들에게 주어지는 보험금에 주목한 당시 일부 언론의 행태에 잘 드러난다. 또한 당시 정부가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에게 사과하기는커녕 유가족을 정부에 반항하는 반동분자 취급한 것은 희생양 만들기의 전형적인 예다. 소비주의와 희생양 만들기가 반복되면 사람들은 자연히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거나 정치 혐오에 빠진다. 인간관계와 시민 공동체는 금세 무너진다. 


자아와 세계의 관한 지식을 온 마음으로 붙든다면 마음은 때로 상실, 실패, 좌절, 배신, 또는 죽음 등으로 인해 부서질 것이다. 그때 당신 안에 그리고 당신 주변의 세계에 무엇이 일어나는가는 당신의 마음이 어떻게 부서지는가에 달려있다. 만일 그것이 수천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흩어진다면 결국에는 분노, 우울, 이탈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경험이 지닌 복합성과 모순을 끌어 앉을 위대한 능력으로 깨져서 열린다면, 그 결과는 새로운 삶으로 이어질 것이다. 마음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 (57쪽) 


저자는 민주주의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가치는 결국 화해와 통합이며, 화해와 통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서 가장 많이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결코 '그들'과 화해하거나 통합할 마음이 없지만, 그들과 화해하고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비통한 자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만약 그들이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다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서 돌아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의 무너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지고 위로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호 4주기인 오늘. 어떤 언론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정치 이용은 할 만큼 하지 않았나'라는 사설을 실었고, 어떤 정당은 추도식에 참석하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가 제대로 자리 잡을 날은 아직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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