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러네이 엥겔른 지음, 김문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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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탈코(탈코르셋)' 열풍이 불기 이전부터 코르셋 따위 입지 않고 살았기에 탈코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책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을 읽기 전까지는. 


저자 리네이 엥겔른은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여성 심리학과 젠더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자는 강의실과 연구실, 일상생활 속에서 수많은 여성들을 만나며 그들이 얼마나 심한 외모 강박에 시달리는지 조사했다. 결과는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성들은 대체로 자신이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생각한다. 덜먹어야 하고 살을 더 빼야 하고 성형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고 좋아해 주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로 인해 일부 여성들은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강박, 식이 장애, 성형 중독 등에 시달리기도 한다. 


저자는 여성의 외모 강박과 관련된 여러 문제점을 차례로 지적한다. 하나는 남성과 달리 여성의 외모는 직업 선택 및 생계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여자든 남자든 암묵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예쁘고 날씬한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더 많은 직업 기회와 보수를 제공받는다는 것을. 여자아이들조차 예쁘고 날씬한 여성이 취업도 잘 되고 돈도 더 많이 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에 외모를 가꾸고 자기 계발을 할 돈으로 옷과 화장품을 산다. 그렇게 취업에 성공한 여성들은 남성이 받는 급료의 60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 급료를 받으면서 그중 일부를 옷 사고 화장품 사고 다이어트 보조제 사는 데 쓴다(그래야만 회사에 계속 다닐 수 있고 승진도 할 수 있으므로). 


또 하나는 여성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운 외모가 전적으로 남성들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긴 머리와 흰 피부,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는 남자들이 '보기에나' 아름다운 것이지, 여자들이 실제로 그 몸을 가지고 '살기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런 몸이 편하다면 남자들부터 머리를 기르고, 피부를 하얗게 유지하고, 가슴을 키우고, 허리 사이즈를 줄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여성들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려고 할까. 외모를 꾸미는 여성들 다수가 '내가 좋아서', '내가 즐거워서' 한다고 하지만, 속내를 들어보면 관심받고 싶어서, 인기 있고 싶어서,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인 경우가 더 많다.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의 관심을 끌고 싶은 마음은 결코 잘못된 게 아니지만, 여성의 미를 판단하는 기준이 단일하고 여성이 아닌 남성의 선호에만 치우쳐 있다는 것은 재고해볼 일이다. 


"오늘날 여성은 매력적이되, 위험한 관심을 받지 않을 위태로운 경계를 찾고 있다." 


앞서 나는 '탈코' 열풍이 불기 이전부터 코르셋 따위 입지 않고 살았기에 탈코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썼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보니 나 역시 엄청난 양의 코르셋을 껴입고 있었다. 뚱뚱해, 다리가 너무 굵어, 팔뚝살 좀 봐, 코가 낮아, 살 빼야 돼, 렌즈 껴야 돼, 제모해야 돼 등등의 생각을 시도 때도 없이 하면서 나 자신을 비하하고 학대했다. 다행히(!) 나는 답답하고 불편한 건 1도 못 참는 성격이라서 다이어트도 못 하고 몸에 꽉 끼는 옷도 못 입고 하이힐도 못 신다 보니 자연스럽게 탈코의 경지에 이르렀을 뿐, 만약 내가 답답하고 불편한 걸 잘 참는 성격이었다면 누구 못지않게 코르셋을 입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도 코르셋이 코르셋인 줄 모르고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사실 지금도 all-time 탈브라는 못하겠고, 치마와 화장품도 버릴 수 없다...ㅠㅠ). 


다행히 이제는 탈코 열풍도 불고, 나보다 앞서 탈코를 시도한 사람들의 사례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천천히 부지런히 내가 원하는 것, 내게 잘 맞는 것을 찾아가야지. 그리고 언젠가 거울 앞에서 내 모습을 보고 남보다 내가 더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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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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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용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도, 가스라이팅을 당해본 사람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부모로부터 "넌 아주 못된 아이야.", "넌 머리가 나빠.", "넌 뚱뚱해", "넌 조심성이 없어." 같은 부정적인 말을 지속적으로 들은 아이는 자기 자신을 정말 못되고, 머리고 나쁘고, 뚱뚱하고, 조심성이 없는 아이로 인식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렇게 형성된 부정적인 자아는 아이가 자존감이 높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한다. 


미국의 정신분석가이자 심리치료사인 로빈 스턴이 쓴 책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는 주로 연인 또는 배우자 관계에서 발생하는 가스라이팅 사례와 치유 및 극복 방법을 소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단순한 정서 학대가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관계다. 저자는 이를 '가스등 탱고'라 부르는데,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해자가 상황이나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해 피해자가 자신의 현실감과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일차적인 원인이지만, 피해자 역시 가해자의 인정을 바라고 가해자를 이상화하면서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가스라이팅의 문제는 정서적 학대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력이 없는 아내는 남편 없이 독박 육아를 하면서 경제적 불안감이나 정서적 불안감에 시달릴 수 있다. 남편이 자신에게 신체적 또는 정신적 학대를 가할 경우, 아내는 결혼 생활을 끝내는 것보다 자신과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게 된다. 이는 고용주와 고용인, 상사와 부하의 관계와 차라리 더 비슷하다. 부하는 상사에게 대들었다가 직장에서 보복을 당하거나 해고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이들은 가스라이팅을 하는 가해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벌주려 한다. 


저자는 '가스라이팅을 차단하는 6단계'를 제시한다. 첫째, 문제를 확인하자. 애인이 내가 원하지도 않는 선물을 준 경우, 문제는 '그 선물을 원하지 않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는 선물을 준 애인'에게 있다. 나를 배려하지 않는 상대에게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둘째, 스스로를 동정하자. 누구나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면 실망하고 상처입는다. 절대로 자신이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셋째, 희생할 각오를 하자. 세상에 공짜는 없다. 가스라이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세상에 남자는 많다. 나를 아끼지 않는 남자 때문에 고생하느라 나를 아끼는 남자를 놓치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된다. 


넷째, 자신의 감정과 통하는 연습을 하자. 절대로 나의 감정을 타인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다섯째, 자신에게 힘을 부여하라. 가스라이팅 상태에서는 자신이 무능하고 무기력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사소한 일이라도 스스로 해보고 도전하면서 자신에게 현실을 바꿀 힘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여섯째, 우선 한 걸음을 내딛어라. 애인이나 배우자가취미 생활을 방해한다면 굴복하지 말고 작게라도 지속해야 한다.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하는 일이 하나라도 있으면 관계를 변화시킬 힘을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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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왠지 떳떳하지 못합니다 - 공정하지 않은 세상을 향한 인류학 에세이
마쓰무라 게이치로 지음, 최재혁 옮김 / 한권의책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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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사회에 속하지 않고,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사회가 나와 맞지 않으면, 사회가 나를 구속하고 억압하기만 한다면, 그래도 그 사회에 속하고 동화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걸까. 


일본의 문화인류학자 마쓰무라 게이치로의 책 <나는 왠지 떳떳하지 못합니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정신적으로 아프다는 것은 그 한 사람의 내면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타인을 '정상' 혹은 '이상함'으로 규정하는 일과 관계된 것은 아닐까?" 저자는 문화인류학자로서 에티오피아의 농촌 마을과 중동의 여러 도시에서 현지 조사를 펼치면서 부의 소유와 분배, 빈곤과 개발 원조, 해외 이주 노동과 같은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경제, 감정, 관계, 국가, 시장, 원조 등 여섯 가지 주제에 대해 이제껏 관찰하고 연구한 바를 중심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커피를 마실 때 으레 이웃을 초대한다. 집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면 "저 사람은 집에서 혼자 몰래 커피를 마신대요."라고 동네방네 소문이 난다. 혼밥, 혼술도 아니고 혼커피가 안 된다니. 뭐 이런 풍습이 다 있나 싶지만, 저자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공적인 사실로 만들어 '유대감'을 과시하는 효과를 가지는 수단이다.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낯설고 어색하다고 해서 다른 나라나 문화, 종교, 취향 등을 함부로 비난해선 안 되는 이유다.


에티오피아는 호적이나 주민등록이 정비된 제도로 잘 갖춰져 있지 못하다. 출생 신고도 하지 않고, 이름도 부모와 조부모가 각자 마음대로 지어서 부른다.'나'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이름이 없기 때문인지,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낮고 통제보다 자유를 선호한다. 주민등록이 잘 정비되어 있기 때문인지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고 사회가 개인보다 우위에 있는 일본의 문화와 정반대다. 만약 국가 권력보다 개인의 자유가 먼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일본에서 살면 얼마나 답답할까. 자기 이름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믿는 사람이 에티오피아에서 살면 얼마나 답답할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에게 맞는 장소가 어디인지 모르고 세월아 네월아 살아가는 것도 '떳떳하지' 못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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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훙빙 지음, 차혜정 옮김 / 와이즈베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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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도대체 어떤 미래를 구상하고 있는 것일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화폐전쟁>의 저자이자 중국 최고의 국제경제학자 쏭훙빙의 신작 <관점>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저자는 2015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10개국 연합군이 예멘의 후티 반군에 대규모 공습을 개시한 사건을 제시하며 책의 포문을 연다. 저자는 당시 대다수의 중국인이 예멘에서 중국 교민을 철수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쏟았는데, 진정 관심을 쏟아야 할 부분은 전쟁의 배경과 이를 둘러싼 각국의 이익 관계라고 지적한다. 


예멘 전쟁은 중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의 충돌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정치, 경제, 역사, 외부 세력의 개입 등 여러 요인이 복합된 지정학적 충돌이다. 저자는 중동 문제의 근원으로 잘 알려진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갈등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비롯해,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겪으며 주변 강대국들이 중동 지역을 어떻게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했는지를 차례로 소개한다. 이 과정에서 아랍-이스라엘 분쟁,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주도권 다툼, IS 테러 조직의 탄생, 이란 핵 협상 타결 등 굵직한 국제 정치 이슈가 한 큐에 정리된다. 


저자는 중국의 학자로서 앞으로 중국이 이러한 국제 환경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2013년 중국은 미국을 추월하여 세계 최대 화물 수출입 무역 국가가 되었다. 그 이면에는 중국의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심각하다는 사실이 숨어 있다. 에너지 안전 확보를 위해 중국은 '뉴 실크로드 전략'을 수립해 시행하는 중이다. 뉴 실크로드 전략은 해상 루트와 육상 루트를 아우르는 총 다섯 개의 에너지 루트를 개발하기 위한 계획이다. 전략이 성공하면 중동과 유럽, 러시아, 카자흐스탄, 미얀마 등의 석유가 송유관을 통해 중국에 공급된다. 


뉴 실크로드 전략의 목적은 단순히 에너지 공급을 원활히 해서 에너지 안전을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는데. 중국은 뉴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거대한 지역을 연결하고 각 지역의 경제를 통합하는 구상을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해상권을 장악해 세계 제1의 군사 대국인 미국과 경쟁해 압도하는 것이 목표다.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중국의 송유관이 북한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연결되면 우리나라 역시 뉴 실크로드 전략에 포섭되는 게 아닐까 - 미국이 이 상황을 가만둘까 -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그것은 우리나라의 국익에 도움이 될까 안 될까. 가볍게 여기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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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 - 리스본에서 만난 복수의 화신 클래식 클라우드 4
김한민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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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이다. 

이는 우리가 만든 개념이므로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_ <불안의 책>, 텍스트 112 


페소아에 대해 잘 모른다. 페소아가 쓴 책은 물론 시 한 줄도 읽어본 적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한민 작가가 쓴 <페소아>를 읽는 내내 잘 아는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페소아가 생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 포르투갈 리스본이 배경인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설에 나오는 아마데우 프라두라는 작가의 삶이 어딘가 페소아의 삶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 아는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과 실제로 잘 아는 것은 다르므로, 이 책을 통해 페소아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다. 첫째는 페소아가 전무후무한 이명(異名) 작가라는 것이다. 실제 이름과 다른 이름을 사용해 창작하는 방식으로 활동한 작가는 페소아 말고도 많이 있다. 예이츠, 엘리엇, 키르케고르, 로맹 가리 등이 그렇게 했다. 하지만 페소아처럼 약 120개나 되는 이름을 사용한 작가는 드물다, 아니 없다. 대표적인 것만 꼽아도 알베르투 카에이루, 리카르두 레이스, 알바루 드 캄푸스, 알렉산더 서치, 안토니우 모라 등등. 페소아가 왜 본명이 아닌 이명을 사용했는지, 각각의 이명의 뜻은 무엇이며 유래는 무엇인지 등은 페소아의 작품 세계와 더불어 후대 연구자들의 큰 관심사다.


둘째는 페소아의 연애 사정이다. 페소아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알려진 연인은 단 한 사람뿐인데, 바로 오펠리아 케이로즈다. 여자는 적당히 교육받고 집안일을 돕다가 좋은 데 시집가는 것이 정해진 인생 코스이던 시절에, 오펠리아는 중산층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직업을 가지고 싶어 했고 결국 일간지를 만드는 회사에 취직했다. 마침 이 회사의 동업자 중 한 사람이 페소아의 친척이었고 이따금 페소아가 일을 거들러 갔기 때문에, 오펠리아와 페소아는 자연히 서로를 알게 되었고 부지불식간에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오펠리아가 결혼을 하고 싶어 하자 페소아의 마음이 급히 식었고,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후대 연구자들은 이 연애에 대해서도 다양한 분석을 내놓는다. 과연 페소아는 오펠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어떤 연구자는 페소아가 오펠리아와 진심으로 사랑에 빠졌다기보다는 '문학적 게임'을 즐겼다고 분석한다. 마침 오펠리아는 페소아의 문학적 영웅인 셰익스피어의 작품 여주인공 이름인 데다가 페소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사기까지 했으니 페소아로서는 이보다 황홀한 일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혹자는 페소아의 '진짜' 사랑은 동성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아직 명백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의 성적 취향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작품에는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셋째는 페소아가 가진 여행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다. "여행은 무엇이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모든 석양은 그저 석양일 뿐인데 그것을 보러 콘스탄티노플까지 갈 필요는 없다. 여행을 하면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나는 리스본을 떠나 벤피카에만 가도 자유를 느낀다. 리스본을 떠나 중국까지 간 어느 누구보다 강렬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 안에 자유가 없다면 세상 어디에 가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의 책>, 텍스트 138) 


리스본에서 보는 석양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보는 석양과 다르지 않다는 페소아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스카이라인부터 다르잖아요), '내 안에 자유가 없다면 세상 어디에 가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에는 크게 동의한다. "풍경이 풍경이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다. ... 마드리드, 베를린, 페르시아, 중국, 그리고 남극과 북극, 어디서든 나는 나 자신 속에, 나만의 고유한 유형의 감정 안에 있을 뿐이 아닌가? 삶이란 우리가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행이란 결국 여행자 자신이다." (<불안의 책>, 텍스트 451)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페소아를 좋아하고 페소아의 자취를 보기 위해 포르투갈 리스본을 찾을 생각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저자에 따르면 여행 가이드가 '페소아의 집'이라고 소개하는 곳은 페소아가 실제로 살았던 집이 아니다. 페소아에 대해 알고 싶다면 페소아의 몸이 머물렀던 공간보다 그의 마음이 머물렀던 글과 시, 책을 읽어보는 것이 훨씬 낫다. 저자 역시 페소아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어 포르투갈에서 살기까지 했으나 페소아를 완전히 알게 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럴 수밖에. 페소아에 말에 따르면 - 우리는 타인을 보고 있어도 결국 타인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보고 있는 셈이니, 페소아를 보고 있어도 보이는 건 우리 자신이지 페소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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