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칸트인가 - 인류 정신사를 완전히 뒤바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서가명강 시리즈 5
김상환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울대에 가지 않아도 서울대 학생들이 듣는 강의를 들을 수 있는 21세기북스 '서가명강' 시리즈 제5권이 출간되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상환이 집필한 <왜 칸트인가>이다.


철학사는 왜 칸트 이전과 이후로 나뉠까.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꼽으라면 단연 칸트다. 서양철학사의 5대 천왕을 꼽으라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이고, 이 중에서 단 한 명만 꼽아야 한다면 많은 경우 칸트 아니면 플라톤을 꼽을 것이다. 그만큼 칸트가 서양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는 뜻이다. 칸트 이전과 이후의 철학은 어떻게 다를까. 이는 칸트의 3대 비판서와 이 저작들이 불러온 복수의 철학 혁명을 이해해야 알 수 있다.


칸트의 3대 비판서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다. 먼저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전도시켰다. 칸트 이전에는 인식의 출발점에 대상이 있고 주체는 그 대상을 수동적으로 비추는 거울로 간주되었다. 반면 칸트는 인식의 중심에 주체를 두고, 인식을 주체의 능동적 종합의 산물로 보았다. 칸트는 인식의 발생 조건을 주체의 내면에서 찾았고, 마음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수립해 근대 과학에 부합하는 인식론을 구축했다. 이 모델은 오늘날의 인공지능이 설정하는 인지 모델과 매우 흡사하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덕' 윤리를' 의무'의 윤리로 전도시켰다. 덕 윤리란 선 개념이 중심에 있고 그 둘레를 도덕법칙이 회전한다. 반면 의무의 윤리에선 도덕법칙이 중심을 차지하고 그 둘레를 선 개념이 회전한다. 쉽게 말해 덕 윤리에선 착하고 올바르게 사는 게 미덕이다. 의무의 윤리에선 법과 규칙을 준수하며 사는 게 미덕이다. 덕 윤리는 고대 윤리를, 의무의 윤리는 근대 윤리를 대변한다. 덕 윤리는 종교에 한없이 가깝고, 의무의 윤리는 법적 추론과 유사하다.


<판단력비판>은 취미 판단과 목적론적 판단을 분석한다. 취미 판단이란 아름다움을 감식하고 향유하는 판단이다. 목적론전 판단이란 기계론적 자연관을 대체할 유기론적 자연관의 가능성을 정초하는 판단이다. 칸트는 세 비판서를 통해 근대 과학, 근대 윤리, 근대 예술을 정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시 말해 근대 이후의 과학과 윤리(법과 정치 포함),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칸트를 배우지 않고 넘어갈 수 없고, 칸트를 배우지 않았다면 사이비라는 뜻이다. ​ 


학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내게도 칸트는 친숙한 이름이다.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다 보면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만나게 된다. 칸트는 1795년에 <영구 평화를 위하여>라는 저작을 발표했다. 이 저작에서 칸트는 역사 진보의 마지막 단계로서 세계적 단위의 영구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한다. 단일한 세계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현실상 불가능하므로 국제법과 세계 법정을 수립할 것을 촉구한다. 실제로 칸트의 이런 주장은 국제연합(UN)이 창설되는 데 모태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BI 관찰의 기술 - 몸의 신호로 상대를 꿰뚫어 보는 실전 매뉴얼
조 내버로 지음, 김수민 옮김 / 리더스북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어가 생각을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면, 몸짓은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전 FBI 특별수사관이자 베스트셀러 <FBI 행동의 심리학>의 저자이자 세계 최고의 비언어 행동 전문가 조 내버로의 책 <FBI 관찰의 기술>에 나오는 문장이다.


저자가 사람들의 표정이나 몸짓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어릴 때부터의 일이다. 저자의 가족은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쿠바에서 도망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저자의 나이 여덟 살. 영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저자가 미국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보디랭귀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저자는 사람들이 표정이나 눈길, 눈빛, 손짓과 몸짓 등을 통해 하는 이야기가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긴장한 표정, 싸늘한 눈길, 부드러운 눈빛, 과장된 몸짓 등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17살 때부터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일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야구 카드를 교환하고, 누가 타율이 가장 높고 누가 그 시즌에 가장 많은 득점을 올렸는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던 때였다. 그때 저자는 여자들은 왜 통화하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지, 서로 인사를 나눌 때 눈썹을 아치형으로 만드는지, 사람들은 왜 의심이 들 때 눈알을 굴리는지, 나쁜 소식을 접했을 때 손을 목 쪽으로 뻗는지 등을 가로 8센티미터, 세로 12센티미터 크기의 카드에 기록했다. 이 습관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그가 FBI 특별수사관으로 채용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은 저자가 40년 넘게 기록한 인간 행동 일지의 정수만 모아서 정리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머리부터 발에 이르는 신체 부분별로 인간이 보이는 행동 유형을 체계화하고, 각각의 행동 유형이 나타내는 심리 상태를 설명한다. 1장 '머리' 편을 보면 머리 장식, 머리카락, 머리카락 만지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 쓸어넘기기, 머리카락 환기하기, 머리카락 홱 젖히기, 머리카락 잡아당기기, 머리 끄덕이기 순으로 목차가 나온다. 이렇게 정리한 보디랭귀지가 총 400여 개에 달한다. ​ 


머리카락 만지기와 머리카락 홱 젖히기는 비슷해 보이지만 사뭇 다르다. 머리카락 만지기(돌리기, 비틀기, 쓰다듬기)는 대체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하는 행동이다. 머리카락을 만질 때 손바닥이 머리 쪽을 향한다면 이는 진정하는 행동일 가능성이 있다. 손바닥이 밖을 향한다면 자신이 편안한 상태에 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즉, 호감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머리카락을 젖히거나 만지거나 잡아당기는 행위는 마음에 드는 사람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할 때 흔히 나타나는 행위다. 자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뽑는 행위는 스트레스를 낮추기 위한 행위다. 머리카락을 뽑으면 신경 말단을 자극해 안정이 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해지면 의학적 치료가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공감의 두 얼굴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 지음, 두행숙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감 능력은 좋기만 한 감정일까? 독일 출신의 심리학자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는 이 책에서 공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공감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각종 비인간적인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감에는 분명 좋은 효과가 있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을 관찰하고, 그들에게 자극받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느끼는 즐거움을 나도 느끼고, 다른 사람이 느끼는 괴로움을 나도 느끼는 경험은 인간의 정서적 성숙에 큰 영향을 준다. 그뿐만 아니라 공감은 인간으로 하여금 대의에 헌신하고 공동체에 봉사하게 만든다. 인명 사고가 발생하거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까지 발 벗고 나서는 건 남의 일을 마치 내 일처럼 여기는 공감 능력 덕분이다. 불평등, 독재, 불의에 항거하고 평등, 민주주의, 정의를 위해 앞장서는 사람들의 원동력 중 하나는 공감 능력이다.


하지만 그 반대 효과도 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연구에 따르면, 공감은 자아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공감은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흑백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울 때 사람은 자신을 구원자이자 조력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즐겁겠지만 도움을 받는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남을 모욕하고 깎아내리고 폭로해서 웃음거리로 만드는 행위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디스트'는 공감의 부작용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을 자식들을 통해 체험하고 싶어 하는 '헬리콥터 부모'와 '스테이지 맘'도 대표적이다.


저자는 책에서 니체의 저서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를 여러 차례 인용한다. 이들 저서에서 니체는 주인과 노예의 개념을 통해 선과 악의 진정한 의미를 모색한다. 귀족적인 주인들은 자기 자신과 적들마저 긍정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노예 상태의 인간들은 모든 것, 특히 주인이 가진 속성을 강하게 부정한다. 노예들은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조차 부정적이어서 결국에는 자기 자신마저 미워한다. 노예들은 자기 자신 안에 안주하지 못하고 마치 객관적인 인간이 강한 존재를 관찰하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의 초점을 맞춘다.


연결해서 생각해볼 만한 것이 스톡홀름 증후군이다. 스톡홀름 증후군에서 인질은 납치범에 의해 제압되며, 납치범의 소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니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질이 스스로 복종하고, '나'를 내던지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인다고 본다. 이러한 스톡홀름 증후군은 국가, 교회, 정당, 회사, 클럽, 집단 같은 현대 사회의 수많은 제도와 조직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결혼 제도, 헬리콥터 부모, 스테이지 맘, 파파라치, 스토커, 가스라이팅도 그렇다. 이들 행위의 ' 가해자'들은 단순히 '피해자'의 정서적인 반응이나 고통을 예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체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서 기쁨을 느낀다.


저자는 이런 부작용을 막으려면 공감의 밝은 얼굴 뒤에 숨어 있는 어두운 면을 이해하고, 자신이 잘못된 공감으로 인해 타인에게 불편함을 준 일은 없었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읽기가 마냥 쉬운 책은 아니지만, 저자의 주장이 워낙 참신해서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 사회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위한 빈곤의 인류학
조문영 엮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조문영의 책. 저자는 대학에서 폐강이 될까 염려하며 '빈곤의 인류학'이라는 수업을 개설했다가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수업을 찾은 것을 보고 놀랐다. 수업을 찾은 학생들은 대개 두 종류의 빈곤에 관심이 많았다. 하나는 글로벌 빈곤이었고, 다른 하나는 청년 빈곤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른바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들에게도 빈곤은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해도 값비싼 등록금과 월세를 감당하기 힘든 경제적 빈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마음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감정적 빈곤, 여기에 실존의 빈곤, 마음의 빈곤까지 느끼고 있다고 많은 학생들이 호소했다.


저자는 수업에서 대다수 학생들의 관심사를 좇아 글로벌 빈곤과 청년 빈곤 문제를 오가던 중, 살짝 방향을 바꿔서 우리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빈곤 문제를 살펴보기로 했다. 반(反)빈곤 활동가들과 학생들의 만남을 주선해 한국 사회에서 가시화되지 못하고 점점 타자화되고 배제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저자는 복지 수급자, 홈리스, 철거민, 장애인, 영세 상인, 노점상, 쪽방촌과 저소득층 밀집 지역 주민과 함께 해온 반빈곤 활동가 10인을 선정해 '청년, 빈곤을 인터뷰하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학생들을 열 팀으로 나눠 활동가와 그가 속한 단체의 활동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를 한 뒤 저자와 동행하여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로젝트에 초빙된 반빈곤 활동가 10인의 면면은 이렇다.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김윤영, 논골신용협동조합 유영우, 난곡사랑의집 배지용, 관악사회복지 은빛사랑방 김순복, 동자동 사랑방마을 주민협동회 선동수, 홈리스행동 이동현, 노들장애인야학 한명희,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최인기,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 공기 등이다.


책을 읽으면서, 대학을 졸업한 지 십여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식이 대학생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고 여러 번 반성했다. 논골신용협동조합 유영우 이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학생들은 이렇게 물었다. "처음 주거권 투쟁을 벌일 때 '저 사람들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서 가난한 건데 왜 떼를 쓰느냐'는 다른 주민들의 반응도 있었다 들었습니다. 주거권을 모두의 '권리'로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유영우 이사장이 내놓은 답변의 요지는 이렇다. 한국 사회는 가난을 사회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다. 하지만 실제로 가난은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더 크다. 이런 식으로 매사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면 권리의식이 줄어든다. 주거권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누려야 할 권리'다.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지, 대통령이나 권력자가 아니다. 남의 권리가 박탈당할 때 나의 권리도 박탈당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함께 연대할 때 비로소 권리가 인정된다.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학생들은 또 이렇게 물었다. "젊은 세대들은 무임승차 문제에 상당히 민감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이 기여하면 손해를 본다는 인식이 있기도 하고요. 실제로 그런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나요?" 이에 대해 유영우 이사장은 "무임승차? 요즘 애들이 협동조합하려면 힘들겠다, 참."이라며 웃은 후, '협동조합은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을 기반으로 운영된다'는 가치와 원칙을 이해해야 한다고 답했다. 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 같다. 나의 권리에는 민감하면서 남의 권리에는 무관심했던 내가 한심해서, 나의 손익은 따지면서 공동체의 손익은 따지지 않았던 내가 부끄러워서. 이 밖에도 어깨를 죽비로 내리치듯 깨달음을 주는 대목이 많아서 두고두고 찬찬히 읽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 - 김대식의 로마 제국 특강
김대식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을 읽어내는 과학>,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등을 쓴 KAIST 김대식 교수의 새 책이다. 과학과 인문학 모두에 통달한 저자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하필 지금 '로마 제국'에 관한 책을 들고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로마 제국에 관한 책을 쓴 이유는, 단순히 모든 길은 로마로 가고 서양 문명의 대부분은 로마 제국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책은 놀랍게도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를 기술하기 이전에 인류 문명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알다시피 현재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계 조상이라고 볼 수 있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인류, 즉 '호모'와 분류되기 시작한 300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30만 년 전 동아프리카 초원에 처음 등장한 이후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주하며 퍼졌다. 아프리카 대륙을 떠난 호모 사피엔스는 기원전 3000년경 야생마를 가축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호모 사피엔스는 유랑하고 목축하는 생활에서 정착하고 농사짓는 생활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점차 사회적 협업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사회적 협업에 필요한 언어 능력이 발달되며 뇌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예술, 종교, 문화 등의 현상도 생겨났다.


이후 세계 각지에서 문명이 발생했고,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미케네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융성했다. 로마는 카르타고가 그리스를 멸망시키고, 그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면서 사실상 지중해의 패자(覇者)로 자리매김했다. 로마의 강점 중 하나는 현실주의다. 로마는 전통을 고수하기보다는 지금 도움이 된다면 바로 바꿔버리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치르는 해전에 이기기 위해 전쟁에 필요한 배를 열심히 개발했고, 다양한 전술을 만들어내 전투력을 높였다. 이 과정에서 로마의 기술이 크게 발전하고 정치, 사회, 문화가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그랬던 로마가 결코 영원한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멸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불평등'이라고 답한다. 로마는 직업군인이 아닌 시민군인으로 군대를 운영했다. 그조차도 경제력이 있어서 스스로 무기와 갑옷을 조달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시민군인이 될 수 있었다. 전쟁이 터지면 중산층 가정의 아버지 또는 장남이 참전했고, 그동안 수입원이 없어진 가족들은 세넥스(일종의 귀족)의 노예로 전락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엄청난 수의 노예가 생기는데 이 또한 세넥스의 차지가 되었다. 중산층 누구도 무료로 일하는 노예보다 더 저렴하게 일할 수 없으니 실업난이 극심해졌다. 공화정 마지막 시기에 로마의 실업률이 70~80퍼센트에 육박했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공화정이 몰락하고 삼두정치 끝에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잡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사실상 왕 또는 황제였으나 스스로를 왕 또는 황제라고 칭하지 않고 아우구스투스라고 칭했다(아우구스투스란 최고 존엄이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이렇게 아우구스투스의 시대가 개막되고 제국이 보수화되면서 로마는 기존의 활력을 잃고 멸망을 향해 치닫게 되었다. 내용이 마냥 쉽지만은 않지만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