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괜찮지 않다 - 자신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자들을 위한 심리처방전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강희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어느 날 모 뷰티 유투버의 동영상 덧글란을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언니 예뻐요', '화장 잘하시네요' 같은 칭찬에 대해 유투버가 '아니에요', '그런 말 마세요'라고 부정하는 덧글을 일일이 단 것이다. 직접 동영상을 찍어 올릴 정도면 자신의 외모나 화장 기술에 자신이 있는 편일 것이고, 자신이 없어도 남이 자기를 칭찬해주면 '고맙습니다' 정도로 대응하면 될 텐데 굳이 '아니에요'라고 반박하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유투버가 지나치게 겸손한 걸까 아니면 자신감이 없는 걸까.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나는 유독 그 사람이 힘들다>의 저자인 독일의 심리학자 배르벨 바르데츠키의 신작 <나는 괜찮지 않다>를 읽다가 그 생각이 났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동안 그가 천착해온 '상처받은 마음'에 관한 문제 중에서도 주로 여성들이 안고 있는 '여성적 나르시시즘' 문제를 제기한다.


여성적 나르시시즘이란 자기애적 성향을 일컫는 나르시시즘의 일종으로, 남성적 나르시시즘이 자기도취적이고 타인에게 배타적인 데 반해 자기를 비하하고 지나치게 주변 환경에 적응한 나머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특징이다.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얌전하게 순응하다가 자신의 의견을 잃어버리고 남에게 휘둘리거나 집착하는 성향을 보이는 것이 여성적 나르시시즘의 대표적인 양태다. 문제는 여성적 나르시시즘이 폭식증을 비롯한 섭식장애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여성적 나르시시즘과 폭식증이 무관하지 않은 것은 부모,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양육 방식에 문제가 있어서일 가능성이 높다. 양육 시기에 어머니가 딸의 신체적 욕구와 감정적 욕구를 혼동해 딸이 울거나 보챌 때 감정적으로 달래주지 못하고 허기를 채워주기에 급급할 경우, 딸은 성인이 되어서도 슬픔이나 분노를 느낄 때 감정을 분출하거나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폭식 또는 거식하는 방식으로 해소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여성은 또한 부모 및 사회로부터 어느 때는 '여자답게 행동하라', 어느 때는 '여성성을 드러내지 마라'는 식의 모순된 요구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여성은 자신의 여성성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거나 수용하지 못하고 여성성을 거부하거나 억압하게 되기 쉽다. 


저자는 여성적 나르시시즘의 부작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립심 향상과 긍정적 자기수용을 든다. 자립심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매사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등 수백 가지 생각을 하는 것이야말로 나르시시즘의 신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남들과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평가하는지 이야기를 들어보자. 의외로 남들은 나를 자세히 보지도 않고 주의 깊게 평가하지도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방법으로는 '칭찬 카드 모으기'를 제안한다. 대단한 성과나 업적이 아니어도 좋다. 매일 밤 그날 했던 좋은 일, 재미있던 일, 기분 좋은 일을 적어도 세 가지씩 적으면 자신의 좋은 점, 아름다운 면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폭식증도 없고 우울증도 없지만, 


나도 가끔씩 내 의견을 표현하지 못해 끙끙 앓고 그런 나 자신을 비하하게 되는 때가 있다. '남들이 보는 나'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진정한 나'를 아껴주지 못하는 때는 더더욱 많다. 누가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에도 주눅 들고 상처받는 나를 위해, 나도 오늘부터 '칭찬 카드 모으기'를 해보련다. 매일 밤 일기에 오늘 했던 좋은 일, 재미있던 일, 기분 좋은 일을 적어봐야지. 그리하여 '괜찮은 나'뿐만 아니라 '괜찮지 않은 나'도 사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력적인 심장 여행 - 생명의 엔진, 심장에 관한 놀라운 지식 프로젝트 매력적인 여행
요하네스 폰 보르스텔 지음, 배명자 옮김 / 와이즈베리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식구들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 창밖으로부터 들어오던 소음도 잔잔해지고 귀에 들리는 소리라곤 시계의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와 왼쪽 가슴에 있는 심장이 열심히 펌프질하는 소리뿐일 때가 있다. 온몸에 힘이 없고 의식마저 몽롱할 때도 심장은 어쩜 그리 힘이 넘칠까. 크기는 고작 손바닥만 한데 매일 8500리터의 혈액을 펌프질해 15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혈관에 공급하고 평생 30억 번 이상을 뛴다지? 이렇게 원기 넘치는 녀석이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내 몸 안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독일의 심장 전공 의학도 요하네스 폰 보르스텔이 쓴 <매력적인 심장 여행>은 원기 넘치는 심장의 비밀을 재미있게 풀어서 설명한다. 저자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주제를 대중 앞에서 10분간 자유롭게 발표하는 과학대회인 '사이언스 슬램'에 참가해 지역 대회만 35회 우승하고 독일 대표로 선발된 이력의 소유자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심장의 형성 과정과 구조, 기능은 물론 심근경색, 관상동맥질환, 동맥경화, 심부전 등의 심장질환을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한다. 흡연, 음주와 심장 건강의 상관관계, 운동, 섭식, 수면, 섹스 등 일상생활에서 심장을 건강하게 돌보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어 심장이 건강한 일반인도 읽어볼 만하다. 

나는 의학 책을 썩 즐겨 읽는 편이 아닌데 이 책은 비교적 수월하게 읽었다. 심장의 일생을 5막으로 구성된 연극에 비유하니 알기 쉬웠고, '발가락에서 심장으로 가야 하는 피는 어떻게 130센티미터 정도 되는 오르막 구간을 거슬러 오를 수 있을까?', '심장은 1분에 5~6리터의 피를 쉼 없이 펌프질하는데, 도대체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얻는 걸까?' 등 누구나 한 번쯤 해볼 법한 심장에 관한 궁금증에 답변하는 형식이라 재미있다. 

참고로 발가락에서 심장으로 가야 하는 피가 130센티미터 정도 되는 오르막 구간을 거슬러 오를 수 있는 건 정맥 판막이 피가 역류하는 걸 막기 때문이고, 심장이 1분에 5~6리터의 피를 쉼 없이 펌프질하는 건 좌심실을 떠난 혈류가 대동맥판막과 관상동맥을 지나 다시 심장조직에 피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자급자족한다. 여기에 열다섯 살 때 동네 응급 외과에 부탁해 심장 전문의가 되는 첫 단추를 끼운 일, 응급병동에서 일하며 겪은 일 등 저자가 직접 겪은 에피소드가 더해져 읽는 재미를 더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맛을 더하고 글맛을 깨우는 우리말 어원 이야기
조항범 지음 / 예담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외국어 공부를 하다 보면 단어의 어원과 유래에 대해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우리말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릴 때부터 배웠고 오랫동안 익숙하게 사용해온 탓에 자주 쓰는 단어라도 언제부터 어떻게 지금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지 알게 될 기회가 많지 않다.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항범 교수의 <우리말 어원 이야기>에는 개구리, 건달, 고뿔, 곱창, 김치, 누나, 담배, 대머리 등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지만 유래는 잘 모르는 우리말의 어원을 사전 형식으로 설명한다. 이를테면 '건달'은 수미산 남쪽 금강굴에 살면서 하늘나라의 음악을 책임진 신을 일컫는 범어(고대 인도어) 'Gandharva(간다르바)'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은 고려 시대까지 큰 사찰의 각종 의례에 동원되는 악사 집단을 가리키다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 불교 탄압이 시작되고 일자리를 잃은 악사 집단이 방랑을 하며 재주를 팔아 먹고 살게 되면서 오늘날의 '건달'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밖에 '곱창'의 '곱'과 '눈곱'의 '곱'이 똑같이 '동물의 지방, 기름'을 일컫는다는 것, '꼬마'와 '첩(妾)'이 같은 부류라는 것 등이 쉽고 재미있게 설명되어 있다. 


이 중에 특히 가족 관계를 나타내는 말의 어원에 대한 설명이 흥미로웠다. 불과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누나'는 손위의 여자 동기뿐 아니라 손아래의 여자 동기까지 아울러 지시하는 말로 쓰였다. '오빠' 역시 손위, 손아래를 가리지 않고 남자 동기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여성이 손위의 여자 동기를 부르는 말로 사용하는 '언니'는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남성이든 여성이든 동성의 손윗 사람을 부르는 말로 폭넓게 적용됐다. 1946년 윤석중 선생이 작사한 졸업식 노래의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가 그 증거다. 조상들은 손아랫사람에 대해서도 누나와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요즘에는 사용하지 않게 된 이유는 뭘까. 남성과 여성을 분리하지 않았던 언니라는 호칭이 여성에만 적용되도록 바뀐 이유는 뭘까. 우리말의 어원을 추적하는 일이 웬만한 추리 소설보다도 흥미진진한 것 같다. 


위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쓴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가만한 당신
최윤필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그들이 왜 끌렸는지 한두 마디로 설명하긴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차별과 억압과 무지와 위선에 맞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가치와 권리를 쟁취하고자 우리 대신 우리보다 앞서 싸워준 이들이라고 하겠다. 글을 깊이 읽은 내 친구는 그들을 "생을 거의 완전연소한" 이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글보다 먼저 사진 속 표정과 미소와 주름살들을 먼저 '영접'하곤 했다고 말했다. 나는 낯선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책머리에 중에서)


어린 시절 나는 위인전 읽기를 좋아했다. 어떻게 하면 위인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해서 위인전을 읽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들이 '어쩌다' 위인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시류에 영합하고 주류에 편승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더 잘 산다. 그런데도 굳이 남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고 비주류를 자처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를테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글자를 만든 세종대왕이라든가, 왕마저 자기를 견제하는 걸 알면서도 전장에 나선 이순신이라든가,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의 모습을 따르며 편하게 살지 않고 혹독한 예술가의 삶을 택한 황진이라든가,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목숨을 내던져가며 독립운동을 감행한 수많은 열사들, 의사들의 마음... 나는 이들이 굳이 이렇게 살다간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고 여전히 궁금하다. 


<가만한 당신>의 저자인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도 나와 비슷한 궁금증을 안고 있지 않았을까. 이 책은 저자가 2014년부터 연재하고 있는 동명의 기획물 중에서 서른다섯 편을 선별해 묶었다. 저자는 인권과 자유, 차별 철폐와 페미니즘, 조력 자살과 동성혼 법제화 등 우리 사회에 여전히 상식으로 자리 잡지 못한 가치를 위해 투쟁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부고 기사에 관심을 가졌고 이를 지면을 통해 소개해왔다. 처음엔 부고는커녕 종이 신문도 읽지 않는 나로선 콘셉트도 낯설고 책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 또한 생경했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업적은 결코 낯설지 않다. 그중에는 내가 오늘날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왜 쉽고 편한 길을 두고 어렵고 불편한 길을 택했을까. 왜 자기 "생을 거의 완전연소"하면서까지 고단하게 살았을까. 그 답이 있을 거란 기대를 안고 책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ABC 블로그의 한 칼럼에서 그는 "장애인을 가장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냐"라고 물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아니라 전면적 캐릭터로서 장애인을 본 적 있느냐고, 몇 번이나 봤냐고 물었다.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시청이나 도서관 혹은 극장에서 장애인을 얼마나 자주 보느냐고도 물었다. (중략) "내 장애인 친구는 자기가 성인이 되면 죽거나 장애가 사라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애를 지닌 성인을 단 한 번도 못 봤기 때문이다." (p.35-6)


책에 나오는 이들 대부분은 (당연하게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사회의 차별과 불합리에 맞서는 삶을 살았다. 호주의 코미디언 겸 방송인이자 칼럼니스트였던 스텔라 영(1982-2014)은 불완전골형성증이란 희귀 유전병을 갖고 태어난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1미터가 되지 않는 키에 골절상을 달고 지내야 했지만 장애인 인권운동가이자 인기 코미디언 겸 방송인, 칼럼니스트로 맹활약하며 눈부신 삶을 살았다. 영국의 여성인권운동가 데니즈 마셜(1961-2015)은 어렸을 때 지속적으로 양부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양할아버지로부터 강간을 당했다. 집에서 도망쳐 나온 그녀는 이후 영국 젠더폭력 피해 여성 구제 단체 '이브스'를 설립했고 자신처럼 성폭력, 가정폭력에 시달린 여성들뿐 아니라 강제 성매매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구제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돌보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처럼 고통받는 이들을 돕거나 이들을 대변해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용감하고 위대하다.


1970년대 이와나미 문고에서 열린 한 연구회 일화도 있다. 당시 우자와는 근대경제학의 모델과 수식으로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명쾌하게 분석해 경제, 사회학자들을 매료한 뒤 칠판에 커다란 X표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모델로는 일본 사회의 진정한 모습을 포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경 파괴나 공해 등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 모델에는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p.85)


기득권층으로서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데도 굳이 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는 삶을 택한 이들도 있다. 우자와 히로후미(1928-2014)는 일본의 최고학부인 도쿄대 교수라는 지위와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의 높은 명성을 누리며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70년대에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 <나리타란 무엇인가> 등 일본의 산업화와 도시화의 폐해를 지적하는 책을 연이어 발표하며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각종 기업 및 단체로부터 괴롭힘과 협박을 당하고 외출할 때마다 경찰의 비호를 받아야 했다. 근대경제학을 옹호하지 않고 오히려 한계와 폐해를 지적하는 연구방향 때문에 결국 노벨경제학상도 수상하지 못 했다.


저자는 만일 우자와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의 대학에서 연구 활동에 전념했더라면 이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고 노벨경제학상도 수상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환자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없었지만 사회를 위해 자신에게 더 유리한 자리를 포기했다. 그는 학문의 보수적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자신이 설정한 경제학자로서의 경계를 지켰고, 그건 그에게 노벨상으로도 채울 수 없는 커다란 야심이었다." 자신이 사회의 차별과 불합리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어도 간접적인 피해를 인식하거나 피해자인 타인의 아픔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고 같이 투쟁했다는 점에서 이들 또한 용감하고 위대하다.


<월경의 꿈>에는 하렘의 여성들이 춤을 추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그중 가장 부드러운 춤사위를 자랑하던 '미나'라는 여인에게 화자가 요령을 묻는 장면이 나오는 모양이다. 미나는 "저 여인들은 자신들의 삶에 화가 나 있고, 그 분노의 인질이 되어 있어. 그건 슬픈 운명이지. (비록 여기는 감옥이지만) 더 열악한 감옥은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이야"라고 답한다. (p.281)


파테마 메르니시(1940-2015)는 현재 지구 상에서 여성의 인권이 가장 낮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집에는 여성들의 감옥으로 불리는 하렘이 있었고 여기에는 그녀의 외조모와 어머니, 친척 여성들이 '갇혀' 있었다. 이들은 나이가 들고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어도 남자 가족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혼자 외출하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언젠가 그녀의 어머니는 "이른 새벽 인적 없는 거리를 걸어볼 수만 있다면...... 그 무렵 도시의 색깔은 푸르스름하겠지? 아니면 노을 질 때처럼 불그레할까?" 하고 물었다. 하렘의 여자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유학하며 어머니와 달리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유를 이슬람 문화권에서 온갖 성 억압 제도들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바쳤다. 돈 있지, 학벌 좋지, 꿈에 그리던 자유 얻었지. 나 같으면 실컷 돈 쓰고 하고 싶었던 것 해보면서 살 텐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메르니시는 말했다. "더 열악한 감옥은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이라고. 더운 여름에 히잡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외출할 때 남자 가족을 동반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른 새벽 인적 없는 거리를 걸을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뭘 하고 뭘 보고 뭘 느끼든 오로지 비용만을 따지고 사회적 인정을 고려하는 나야말로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에 갇혀있는지도 모른다. 제 발로 걸어 나온 감옥으로 다시 들어간 그녀야말로 진정 자유롭고 주체적인 영혼인지도. 옳다고 믿고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 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눈 돌리지 않은 이들이야말로 지옥 같은 세상을 조금이나마 천국에 더 가깝게 만든 진정한 위인들이 아닐까. 결코 '가만한' 삶을 살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가만한' 삶을 살고 있는 나의 가슴을 뜨겁게 울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의 탐험 - 최재천 교수와 함께 떠나는
최재천 지음 / 움직이는서재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늘 성공한 사람들의 완성품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할 때도 그처럼 처음부터 완성품을 내놓아야 되는 줄 압니다. 그런데 사실 그 완성품은 수많은 수정과 덧붙임 끝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다 이쯤 되면 괜찮다고 생각해서 세상에 내놓은 것들이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무언가를 할 때는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 나가야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길 바랍니다. 단번에 눈에 띄는 성과를 내려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면 결국 아무것도 만들 수 없거든요. (p.9) 


'통섭의 거장' 최재천의 <생각의 탐험>을 읽는 내내 지나간 학창시절을 되돌리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저자는 한국의 많은 청소년들이 대학입시를 준비하느라 정작 인생을 살면서 꼭 필요한 공부는 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이미 대학에서 배운 전공만으로는 먹고살기가 힘들어졌는데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육은 오로지 명문대 간판 학과에 들어가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시행착오적이다. 저자는 한 사람이 최소 여섯 개 이상의 직업을 전전하게 되는 미래에 대비해 보다 폭넓은 공부와 독서를 할 것을 권한다. 이른바 '문과적 소양을 갖춘 이과형 인재'가 되기 위한 공부다. 왜 나에겐 이런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없었을까. 아쉬울 따름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 생물 다양성, 기후 변화, 그린 비즈니스, 의생학, 반려동물, 통섭, 배움과 교육, 기획 독서, 남녀의 콜라보 등 청소년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은 10가지 의제를 제시한다. 이는 저자 자신이 지난 10년간 중요하게 생각하고 해결하기 위해 매달려온 의제이기도 하다. 한국에 처음으로 통섭이라는 개념을 소개한 학자이자 그 자신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다양한 책을 펴낸 작가답게 이 책의 내용도 이것과 저것을 '믹스'한 것이 많다. 가령 그린 비즈니스는 더 이상 환경 문제와 기업의 비즈니스가 별개가 아니며 융합되어야 한다는 내용이고, 의생학은 생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시장에서 거래되는 제품을 개발하는 학문을 일컫는다. '환경 따로 경영 따로', '과학 연구 따로 이윤 추구 따로'라는 통념으로부터 벗어나길 촉구한다. 

그래서 더욱 독서를 일로 삼아야 합니다. 일이라 생각하고 꾸역 꾸역 억지로라도 읽어 나가야 이 장벽을 뚫을 수 있습니다. 국사를 전공한 사람이 나노과학 책을 읽게 되면 당연히 안 읽힙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꾹 참고 두 번, 세 번 책을 읽고 나면 조금씩 아는 것이 생기고, 책장이 술술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신문을 읽다가 나노과학 기사가 불현듯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그 분야에 대해 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 과정을 이뤄 내려면 취미로는 되지 않습니다. (p.146) 

이 책은 청소년 독자를 위한 책이지만 성인 독자에게도 유용한 내용이 적지 않다. '기획 독서'에 대한 내용이 그렇다. 기획 독서란 흥미 위주의 취미 독서와 달리 '계획성 있게 공략하는 독서로, 전문 분야 외에 관심이 가는 분야가 있으면 그 분야에 대해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관련 도서를 읽는 것'을 말한다. 오로지 흥미 위주로 읽을 책을 정하는 나의 독서 방식을 반성해본다. 이 책에는 본문의 내용을 요약 확인하고 자신의 생각을 서술해보는 '생각 노트'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청소년 독자라면 논술과 면접 준비에 활용하면 좋을 것이고, 성인 독자라면 주변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이용하면 좋을 듯하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