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은 살아있다
이석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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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일종의 ‘후불제 헌법’이었고,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였다." (유시민 저, <후불제 민주주의> 중에서) 


정치인에서 지식 소매상으로 거듭난 유시민은 저서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대한민국 헌법과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후불제 헌법, 후불제 민주주의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은 밀린 외상값을 치르는 중이다. 요즘처럼 국민들이 헌법에 관심을 가진 적도, 매주 촛불집회에 참여하여 부정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을 행사한 적도 드물다. 


대한민국 최고의 헌법 전문가는 현 세태를 어떻게 볼까. <헌법은 살아있다>는 대한민국 제1호 헌법연구관 출신이며 제28대 법제처장을 지낸 이석연 변호사가 쓴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작년 10월 말부터 시작된 촛불집회-주인이 임명한 심부름꾼을 바꾸기 위한 헌법의 틀 내에서 이루어진 평화적인 저항권 행사-는 세계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저항권 행사의 모범"이라고 평가한다. 나아가 헌법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계속되어 위헌적인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은 물론, 1987년 이후 20년간 사용한 헌법을 개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길 촉구한다.


"헌법의 진정한 존재 의의는 국민 개개인으로 하여금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니고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저자는 제1장과 2장에 걸쳐 대한민국 헌법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에 반영된 이념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민주주의, 법치주의, 기본권 보장, 사회복지 등 헌법의 근간을 이루는 조문에 관한 설명 외에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 건국절 논란, 개헌을 둘러싼 쟁점 등 현재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헌법 차원의 설명을 포함한다. 


간통죄 위헌 결정, 제대군인 가산점 제도 위헌 결정, 인터넷 게시판 본인 확인제 위헌 결정 등 한국 사회를 바꾼 10대 위헌 결정에 관한 해설도 실려 있다. 제대군인 가산점 제도 위헌 결정은 저자가 직접 기획, 수행했지만, 최근에는 군필자가 받는 역차별에 공감하는 바 있어 최근에는 가산점 제도의 조심스러운 부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책의 마지막 챕터에는 저자와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의 헌법 대담이 나온다. 2013년에 이루어진 대담이지만 헌법재판과 공익 소송의 의미와 기능을 논한다는 점에서는 시의성이 부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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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3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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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가 최근에는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안목>은 <국보순례>, <명작순례>를 잇는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시리즈 3편으로, 뛰어난 안목으로 미술품을 수집한 역대 미술 애호가들의 이야기와 대가들의 회고전 순례기, 대규모 기획전에 부친 전문적 평론들을 담고 있다. 


안목은 쉽게 말해 '미를 보는 눈'이다. 안목이 높다는 것은 미적 가치를 감별하는 눈이 뛰어남을 의미한다. 안목은 예술적 형식의 틀을 갖춘 작품을 두고서는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기존 형식에서 벗어나 시대를 앞서가는 파격적인 작품 앞에서 그 차이가 완연히 드러난다. 


추사 김정희는 오늘날 추사체를 남긴 서예의 거장으로 추앙받지만 생전에는 지금처럼 모두의 공감을 얻지 못 했다. 추사의 개성적인 서체를 두고 '괴기'라며 헐뜯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환재 박규수는 달랐다. 추사체가 처음 선보였을 때 박규수는 추사가 어려서부터 쉬지 않고 서법을 고치고 개선한 것을 언급하며 '마침내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一法)을 이루었으니'라고 극찬했다. 박규수의 안목은 당대의 유행에 갇히지 않고 파격을 수용할 만큼 넓고 깊고 높았다. 


안목이 높은 대가들은 미술품을 모으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안평대군을 비롯해 석농 김광국, 송은 이병직, 수정 박병래, 소전 손재형, 간송 전형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의 기쁨을 위해 미술품을 수집했지만, 그 시대의 미술문화를 후원하고 나아가 민족문화를 지키는 데에도 훌륭한 역할을 했다.


40여 년에 걸쳐 수집한 조선백자 전부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수정 박병래,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의 손에 들어간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에 가서 되찾아온 소전 손재형, 해외 반출 문화재를 찾기 위해 전 재산을 바친 간송 전형필 등이 그렇다. 그중에서도 간송 전형필은 백범 김구가 역설한 '문화보국'을 전 생애에 걸쳐 실천한 위인(偉人)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합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입니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범 김구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중에서, 193쪽) 


이어지는 회고전 순례기의 주인공은 고려인 화가 변월룡, 비운의 화가 이중섭, 한국인의 정서를 잘 표현한 화가 박수근, 민중미술의 전설 오윤, 우리 시대의 스승 신영복 선생 등이다.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이름 중에 신영복 선생의 이름이 있는 것이 신선했다. 저자에 따르면 신영복 선생은 '전문 서예가들도 아직껏 이렇다 제시하지 못한 한글 흘림체를 독자적인 서체로 대담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신영복 선생이 글씨와 그림을 결합해 '그림 같은 글씨, 글씨 같은 그림'을 선보인 것은 가히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문인화'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저자의 설명을 읽고 보니 신영복 선생의 글씨가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고 기존 문인화의 틀을 깬 새롭고 파격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수없이 본 신영복 선생의 글씨에서조차 파격을 읽어내지 못한 걸 보면 내 눈은 아직 캄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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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02-22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책인데 좋은 서평 감사드립니다. 유흥준의 미를 보는 눈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었군요.
 
어원영어
신동윤 지음 / 하다(HadA)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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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언트>의 저자 조승연은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라틴어, 중국어 등 6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비결로 단어의 어원을 공부한 것을 든다. 한국어 어휘의 70퍼센트가 한자어인 것처럼 영어 어휘의 상당수가 인도-유럽어와 관련이 있다. 인도-유럽어는 고대 인도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비롯해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를 많이 알면 한국어뿐 아니라 중국어, 일본어도 쉽게 익힐 수 있듯이, 인도-유럽어 간에 공통적으로 쓰이는 어원을 익히면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여러 언어를 빠르게 익힐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영어 단어에 남아 있고 인도-유럽어 간에 공통적으로 쓰이는 어원은 무엇이고 어떻게 공부하면 좋을까? 더욱 자세히 알고 싶던 차에 영어의 어원을 깊이 있게 다룬 책이 출시되었다. KBS, YTN 기자 출신으로 YTN 유럽 총국장을 역임한 신동윤이 쓴 <어원 영어>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도-유럽어는 가장 작은 소리의 원자인 음소에 분명한 뜻을 부여한다. 음소 중에서도 자음에만 뜻을 주고, 모음은 자음을 연결하는 기능만 한다. 각각의 자음이 가지는 뜻은 인도-유럽어족의 종교와 철학과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를테면 B는 '빛으로부터 오는 강력한 에너지가 모든 존재를 만들었다'라는 뜻을 지닌다. 존재를 의미하는 영단어 'be', 분명히 존재하는 물체의 성질을 뜻하는 'physical(ph는 b의 변형)' 등에 그 흔적이 보인다. C는 '우주는 무한히 둥글게 퍼져 나간다'라는 의미다. 원을 뜻하는 'circle', 동그란 설탕 입자를 가리키는 'sugar(s는 c의 변형)' 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D는 '우주를 만들고 통제하는 신은 오직 빛으로만 보인다'라는 뜻을 가진다. 신의 빛이 오는 시간을 뜻하는 'day', 신에게 너를 맡긴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프랑스어 'adieu'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각 알파벳 자음에 담긴 뜻과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단어들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영어 단어를 무작정 암기하기보다는 어원을 파악하며 체계적으로 익히고 싶은 학습자, 어원을 통해 영어뿐 아니라 다른 외국어도 함께 배우고자 하는 학습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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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조작의 비밀 - 어떻게 마음을 지배하고 행동을 설계하는가
오카다 다카시 지음, 황선종 옮김 / 어크로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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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20대 유망주로 꼽히던 일본 여배우가 종교 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은퇴를 선언했다. 잘 나가던 그녀가 돌연 종교에 빠져든 이유는 뭘까. 일본 정신의학계의 권위자 오카다 다카시의 책 <심리 조작의 비밀>을 읽으며 그 이유를 찾았다. 


저자에 따르면 종교에 빠지고, 불법 다단계에 들어가고, 테러리스트가 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겉보기에 아주 멀쩡하다.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명문대를 졸업하고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의 공통점은 학력이나 경제력에 있지 않다. 이들의 공통점 첫 번째는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거나 자기만의 정체성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적으로 뛰어나고 물적으로 풍족해도 살아가는 데 고통을 느끼거나 소속 집단에 대해 불신을 가지고 있으면 현재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마음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 


공통점 두 번째는 '터널'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소규모 집단이나 작은 팀에 속한 채로 외부와 차단된 생활을 한다. 이들의 시야에는 다른 선택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동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딱히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학교에서 왕따에 가담하거나 신입생을 괴롭히거나 군대에서 폭언이나 폭력을 일삼는 것은 같은 이유다. 


컬트 종교에 빠지지 않더라도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할 수 없다면 그것은 누군가에게 심리가 조작되어 살아가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뒤집어 말하자면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어떤 인격을 만들어왔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심리를 조작 당하기 쉬우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78쪽)


앞서 언급한 일본 여배우는 연예계라는 경쟁이 매우 치열한 세계에 속해 있었다. 갓 데뷔한 신인 여배우로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는커녕 연예계에서 탄탄한 자리조차 확보하지 못 했다. 설상가상 그녀의 소속사는 수면 시간을 3시간 이하로 제한하고 한 달 내내 휴일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열심히 일한 결과 인기가 상승해도 보너스는커녕 급료 인상도 없었다. 가정불화로 인해 의지할 대상도 없었고, 연예계에서 일하다 보니 친구나 애인도 마음대로 사귈 수 없었다. 요컨대 치열한 경쟁과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 협소한 인간관계까지 종교에 빠질 조건이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심리 조작에 걸려들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외부와 접촉하며 끊임없이 다른 활동을 병행하라고 조언한다. "딴짓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거나 돌림길을 가는 듯이 보여도 결국은 그것이 지름길이 된다." 한정된 정보만 접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과잉된 정보에 노출되는 것도 위험하다. TV, 인터넷, SNS 등을 통해 과잉된 정보에 노출되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과중한 학업과 업무의 압박도 심리 조작에 걸릴 가능성을 높인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라는 서양 속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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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편집자 - 어느 여가사회학자의 행복에 관한 연구
최석호 지음 / MBC C&I(MBC프로덕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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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에 '현대미술사'라는 강의를 들었다. 전공은 정치외교학, 복수전공은 경제학. 미술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 취업도 결정되지 않았다. 취업 준비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현대미술사 강의를 들은 건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 강의가 내 인생을 바꿨다. 강의를 들으면서 미술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결국 전공과 무관한 문화예술 방면으로 취업했다. '먹고 사는 일'과 관련이 없어 보였던, '먹고 사는 일'에 방해가 될 줄 알았던 일이 '먹고 사는 일'이 되었다.


복권 사듯이 인생을 살 순 없다. 드라마를 꿈꾸지 말고 인생의 안목을 기르자. 문화 자본을 늘리고, 상징 자본에 투자하자. 어떻게? 이제는 여가 시대다. 당신의 여가가 당신을 말한다. 여가를 잘 경영하면 인생이 행복해질 수 있다. 시간은 계획하는 데서 나아가 즐겨야 만이 비로소 내 것이 된다. (12쪽)


여가사회학자이자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 최석호가 쓴 <시간편집자>를 읽으며 '먹고 사는 일'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먹고 사는 일'에 골몰하는 한국인들이 여전히 불안하고 불행한 이유로 제대로 된 여가 문화의 부재를 든다. 저자는 여가의 개념과 유래, 역사등을 살피고 일과 역사의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어떻게 여가를 보내야 하는지 해답을 제시한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여가란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재밌게 놀거나 피로에 지친 몸을 푹쉬게 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일이 끝나면 폭음을 하면서 몸을 해치고, 밤새워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면서 정신을 혹사한다. 그리스어나 라틴어에서는 여가를 '노동을 해야만 하는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또는 조건'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취미든 운동이든 일단 하나 시작했다 하면 장비부터 갖추느라 금전적으로 힘들어져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는 경우도 한국에선 빈번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에 대해 '그 자체로 바람직한 어떤 것에 골몰하는 상태'로 정의했다. 하지만 도박이나 지나친 음주 등은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으로 볼 수 없고 골몰해선 안 된다.


상층 계급에서도 분파별로 많이 읽는 책의 종류가 다른 이유는 재생산과 관련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것이 다르다는 말이다. 교수는 자식에게 문화 자본을 물려주려고 한다. 그래서 교육과 문화 실천에 투자한다. 전문직 종사자는 사회 자본을 물려주려고 한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선뜻 도와줄 수 있는 사회적 관계 자본으로서 상류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신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본이다. 사회 자본을 물려주면 상류 사회 구성원과 쉽게 사귈 수 있다. 그래서 전문직 종사자는 라이프스타일과 소비 행동에 투자한다. 반면 고용주들은 돈을 몰아주려고 한다. 경제 자본을 상속함으로써 대를 이어 고용주로 살기 위해서다. (190쪽)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과 취향에 달린 것으로 보기 쉽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형편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인들의 독서 취향에 관한 연구가 대표적이다. 책의 경우, 학력이 높은 교수와 전문직 종사자들은 철학, 정치, 경제, 문예 소설, 예술 분야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책을 읽고, 전문직 종사자와 엔지니어는 경제 도서를 많이 읽고, 제조업 고용주와 서비스업 고용주는 책 자체를 읽지 않는다. 책뿐만 아니라 음식, 문화 교양, 외모 등의 항목에서도 취향과 선택이 갈린다. 


한국에선 어떨까. 가장 최근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여가 활동은 TV보기, 휴식, 게임 순이다. 프랑스에선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들이 가진 문화 또는 사회 또는 경제 자본을 물려주기 위한 기회로서 여가를 활용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전 국민의 대표 취미라 해도 과언이 아닌 독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순위에 없다. 역대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아도 양서보다는 소설, 자기계발서, 실용서가 대부분이다. 프랑스처럼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형편에 따라 독서 취향이 분화되는 상태에 도달하기란 아직 요원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읽어야 한다. 무엇을? 제대로 된 '책'을 말이다. 왜 책이냐? 왜 책이냐는 차치하고라도, 그럼 어떤 책 말이냐! 소 털 같이 많은 책 중에서 제대로 된 책이라니?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 어제 생각으로 오늘을 살 수 없고, 오늘 생각으로 내일을 준비할 수 없다. 우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더 이상 먹고살 수 없다. 남다른 시각이 필요하다. 창의적인 발상이 필요하다. 또다시 책에서 길을 묻는다. (117쪽)


저자는 좋지 않은 여가와 좋은 여가의 예를 제시한다. 좋지 않은 여가의 대표적인 예는 TV 시청과 쇼핑이다. TV 시청은 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 재미와 오락을 추구할 수 있는 여가 활동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TV를 끄면 우리는 독서, 음악 감상, 산택, 운동 등 다양한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고, 가족, 친구, 이웃들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쇼핑 또한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한 활동으로서 그 당위를 인정받지만, 쇼핑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불필요한 소비가 늘어나고, 늘어난 소비를 충당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노동하느라 여가를 박탈당하는 참사가 생길 수 있다.

 

좋은 여가의 대표적인 예는 책이다. 저자는 과거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지기 위해 책 읽기를 권한다. 하퍼 리의 장편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사회의 불평등을 이해하고 현실을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이다. 저자는 또한 미래를 지향하는 창의적인 시각을 열기 위해 책읽기를 권한다. 조지 리처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와 알란 브라이만의 <디즈니화>는 세계화라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책이다. 인간의 두뇌를 표준화, 동질화 시키는 TV 시청 대신 독서를 한다면 같은 시간 동안 보다 많은 지혜와 관점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도 좋은 여가의 한 예다. 그림은 '이미지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좋은 도구다. 저자는 갤러리에서 그림은 보지 않고 그림 제목과 작품 해설을 읽느라 정신 없는 남자의 사례를 소개하며 '이미지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근대화가 한창이던 때에는 언어만 구사해도 충분했다. 근대화가 끝나고 새로운 기술과 산업이 시대를 지배하게 된 지금은 다르다. 글자로 된 언어뿐 아니라 이미지로 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능수능란하게 소통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이미지 언어들을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 가다."


행복으로 가는 다섯 가지 생활 습관 중에서 힘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매일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TV앞에서 보내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한결같이 어려운 일이다. 소중한 사람들과 같이 TV를 보더라도 내 에너지와 시간을 그들에게 쏟을 수 없다. TV만 켜면 옆에 누가 있든 바로 침묵하게 되니 말이다. TV를 보고 있으니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본 적이 없고, 연인이 얼마나 예뻐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깨알 같은 재미를 안겨 줄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눠 줄 수 없다. 당연히 불행할 밖에! (78~79쪽)


저자는 영국 정부가 실시한 '2008 정신 자본과 웰빙 프로젝트'의 결론으로 제시한 다섯 가지 행복 비결을 소개한다. 함께 하라, 밖으로 나가라, 호기심을 가져라, 계속 배우라, 아낌없이 주라. 돌이켜 보면 8년 전 현대미술사 강의를 들으면서 나에게 생긴 변화는 미술에 관심이 생겼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미술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그 친구들과 시간만 나면 전시회나 갤러리를 찾았으며, 새로운 화풍이나 작품이 없나 호기심을 가졌고, 부족한 지식을 보충하기 위해 계속 배웠으며, 배운 지식을 활용하고 싶어서 블로그에 글을 썼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여가라고는 TV를 보거나 끽해야 영화를 보는 게 전부였는데 말이다.


얼마 전에는 언론에 익히 아는 그림 한 장이 나와서 반가움의 탄성을 질렀다. 그 그림은 바로 인상파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1863년 작품 <올랭피아>다. 마네는 여성의 누드화를 그릴 때 여신 또는 요정으로만 묘사해야 했던 관습을 깨고 현실의 여성, 그것도 매춘여성을 묘사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마네가 작품을 통해 의도한 것은 현실의 여성을 바로 보지 않고 관념 속의 여성상을 강요하고,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이용하는 귀족들을 풍자하는 것이었음을 당대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미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당시 프랑스 귀족들처럼 그림의 선정성에만 주목하고 그림의 '진짜 의미'는 간과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가 사용한 개념을 빌리자면 그 그림에 담긴 '이미지 언어'를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계획하는 것이 아닌, 즐기는 자의 것이다!" 장래에 대한 계획을 미루고 오로지 즐기기 위해 배운 미술이 내 인생을 바꾼 것처럼, 아무런 목적이나 소용 없이 시작한 여가가 당신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 <시간편집자>는 그 길잡이가 되기에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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