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 신영복 유고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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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직이 멀지 않은 아버지는 임금 피크제로 인해 월급이 반으로 깎였다. 환갑을 목전에 둔 어머니는 얼마 전부터 동네 아주머니들과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나간다. 서른을 넘지 않은 동생은 얼마 전 오른쪽 가슴에서 작은 혹을 발견했다. 소득이 들쭉날쭉한 프리랜서인 까닭에 20만 원이나 되는 검사비를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 대학 졸업장을 받기 위해 수천만 원을 등록금으로 쓰고, 그것으로 모자라 취업을 준비하고 스펙을 쌓는다는 명목으로 매달 수십만 원을 내고도 서른이 넘도록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나는 식구들 앞에 그저 죄인일 뿐이다. 그 흔한 배낭여행 한 번 가본 적 없고 클럽에서 밤새도록 놀아본 적도 없이 공부하고 일만 하며 살았건만 나의 20대는 빛나는 추억 하나 없다. 더 걱정인 것은 이대로라면 30대 역시 가난과 과로로 찌들 것 같다는 것이다. 대체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무엇을 꿈꿔야 하는가.

절망하는 내게 가까운 선배 하나가 책 한 권을 알려줬다. 2016년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의 유고집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이다. 평소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었던 신영복 선생의 생애를 이 책을 통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저자는 부친이 교육자인 까닭에 비교적 편안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나, 부친이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었고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가난한 가정 형편과 답답한 학교생활, 암울한 시대 상황이라는 삼중고가 저자를 옥죄었지만,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독서에 열중하고 학업에 매진한 결과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재직하며 탄탄대로를 걷던 저자는 1968년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를 맞는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사형까지 언도받은 것이다. 군인 신분인 까닭에 총살형을 받을 것이 확실해 보였지만 기적적으로 최고형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저자는 이후 20년 20일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된다. 말이 20년 20일이지, 28세부터 48세까지 인생의 황금기를 오롯이 어둡고 차디찬 감옥에서 보냈다. 게다가 죄가 있어서 죗값을 치르느라고 옥살이를 한 것이 아니라 독재 정권이 없는 죄를 지어다 구속을 시켰다. 나라면 억울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외려 감옥에서 보낸 20년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명명하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지고 귀한 시절로 추억한다. 저자가 긴 세월을 보낸 대전교도소는 정치사상범이 많은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일제 강점기 때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군 출신부터 한국 전쟁 당시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 지리산 빨치산 등 다양한 이력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책에서도 접하지 못할 귀한 이야기를 들었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절도를 하고, 목숨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인 사람들을 보며 그동안 자신의 인식이 얼마나 좁고 편협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덕분에 고 학부를 나왔다는 이유로 엘리트 의식에 젖어 살 뻔한 것을 피했고, 경제학자로서 자본주의의 실체가 무엇이고 무엇이 민중을 힘들게 만들고 무엇이 민중을 구할 수 있는지 배웠다. 그에게 예정되어 있던 탄탄대로의 인생을 그대로 살았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기쁨이자 감동이다.

임꺽정이 강한 사람입니까? 약한 사람입니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살인, 강도도 있지만 보통 사람보다 훨씬 약한 사람들입니다. 강한 사람들은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강한 사람들은 외형이 아주 공손해요. 아주 세련되고 젠틀합니다. 마치 나치스의 정치장교들이 굉장한 음악적 소양을 가지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여러분 생각에 절도와 강도 중에 누가 더 험상궂을 것 같아요? 칼 들고 있는 강도가 훨씬 사나울 것 같죠? 절도가 강도한테 그래요. "야, 너 간도 크다. 칼 들고 사람들 위협하고." 그러니까 강도가 절도보고 그래요. "야, 너 간도 크다. 사람이 자고 있는데 조용조용 다니며 일 보다니." (43쪽)

저자는 감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사람들은 대체로 거칠고 험상궂은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자의 경험에 따르면 진짜 강한 사람은 오히려 유순하고 공손하고 인상이 선했다. 진짜 강한 사람은 강도처럼 대놓고 남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절도범처럼 사람들이 부주의한 틈을 노리고 사람들의 안일한 인식을 이용했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이 꼭 그랬다.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을 학살하고도 '법을 따랐을 뿐이다', '상사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라고 천진한 얼굴로 말했다. 감옥에 끌려들어 오는 사람들은 오히려 조직 또는 사회가 떠밀어낸 약한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살기 위해 절도를 하고 살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살기 위해 죄를 짓고 감옥에 끌려들어 온 사람과 죄를 짓고도 사회에서 버젓이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가. 저자는 그 답을 감옥에서 배웠다.

그렇다면 강하지 않지만 약하게 살 수만도 없는 우리는 무엇을 꿈꾸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자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면피할 요량으로 부른 동요 '시냇물'을 예로 든다. '시냇물'의 노랫말은 이러하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아무리 잘나고 대단한 사람도 광활한 우주 안에서는 물 한 방울과 다르지 않다. 물 한 방울은 금세 증발되고 그 자체로는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지만, 시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닷물이 되면 물살을 이루고 배를 띄우고 지형을 바꾼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사방이 장벽으로 가로막힌 듯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면 세상 천지에 오로지 나뿐인 것 같고 나 혼자만으로는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지만, 나처럼 힘든 사람 둘이 모이고 열이 모이고 천 명, 만 명이 모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세력이 된다.


선생은 길이 되기보다 숲이 되기를 바랐고, 홀로 우뚝 서기보다 더불어 비스듬히 기대어 서기를 꿈꾸었다. 선생의 꿈 또한 그 자체로는 아무 힘도 될 수 없었지만, 선생이 생전에 쓰신 글과 책을 통해 사람들 마음에 그 꿈이 스며들었고 이제는 세상을 바꿀 만한 물결조차 이루고 있다. 비록 나는 비루하고 암담한 삶을 살고 있지만 나에게도 꿈이 있다. 선생이 감옥에서 20년 20일을 보내는 동안에도 그 꿈을 잃지 않고 소중히 간직한 것처럼 나도 내 삶의 조건과 환경에 굴하지 않고 내 꿈을 간직하고 키워야지. 그리하여 언젠가는 목마른 사람의 목을 축일 냇물이 되고, 길을 건너고 싶은 사람을 태워줄 배를 띄울 강물이 되고, 더 큰 세상을 연결하는 바닷물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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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한나 아렌트는 미국 시사지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석한다. 전체주의와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정치사상가이자 그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독일에서 탈출, 미국으로 망명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의외로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독일에 살던 유대인 수백만 명을 강제 이주시킨 것으로 모자라 유대인 대량 학살을 손수 집행한 악인이라면 머리에 뿔은 안 달렸어도 무시무시하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흔한 중년 남성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재판 도중 드러난 아이히만의 인격도 무서운 악마나 몰염치한 사이코패스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평범하다 못해 진부했다. 식상하고 멍청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언제나 법률을 준수하는 시민'이었고,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 말은 일견 맞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제3제국 독일에선 히틀러의 말이 곧 법이었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죽이라고 명령했으니 유대인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말대로 그는 히틀러의 말, 즉 법을 준수했을 뿐이고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을 학살했을 뿐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능함 그 자체라고 지적한다. 아이히만의 무능함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자기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함이고, 둘째는 자기 힘으로 생각하지 않는 무능함이고, 셋째는 타인의 입장으로 바꾸어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함이다. 아이히만은 자기 언어가 아니라 히틀러의 언어로 생각하고 히틀러의 언어로 행동했다.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이 '살인'이 아니라 '안락사 제공'이라고 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 수백만 명에게 '안락사'를 '제공'했다. 죄가 있다면 그들에게 '안락사'를 '제공'할 때 더 편하게 해주지 못한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아이히만의 머릿속엔 히틀러처럼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능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정교 교육을 마치지도 못하고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지도 못한 그는 변변한 학벌이나 능력 없이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된 히틀러를 숭배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우상인 히틀러가 말하는 내용에 의심을 품지 않았으며 감히 거스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개인적으로 유대인을 미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대인에게 은혜를 입은 일까지 있지만, 히틀러가 명령하는 대로 유대인을 죽였고 털끝만큼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가 끝까지 열렬히 믿은 것은 성공이었고, 이것이 그가 알고 있던 '좋은 사회'의 기준이었다. 히틀러(그와 그의 동지 자센이 자신들의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를 원한 사람)에 관한 주제에 대해 그가 한 마지막 말은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히틀러가 "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니고,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000만에 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을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198쪽) 


아렌트는 이 책에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말은 평범함 속에 악이 있다는 뜻으로 잘못 전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마음산책에서 나온 <한나 아렌트의 말>이라는 책에 실린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악의 평범성'에서 평범은 차라리 진부함, 멍청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즉 악은 자기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생각하지 못하며, 타인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사람들에게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드러난 박근혜,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이후 우리는 죄를 저지르고도 '법을 지켰을 뿐이다',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악인'들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대선을 며칠 앞둔 지금도 박근혜,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의 잔당들은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고 악을 악으로 부르길 거부하며 가뜩이나 어지러운 정국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사진으로 보기엔 평범한 중년의 얼굴을 한 이들에게서 아이히만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나로서는 세월호 사고로 수백 명의 목숨을 희생시키고도 사죄하기는커녕 세월호 배지를 그만 떼라고 타박하고, 국정 농단으로 수천만 국민을 실망시키고도 권력 복귀를 꿈꾸는 이들의 죄나 아이히만의 죄나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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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설계자들 -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김건우 지음 / 느티나무책방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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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터진 '박근혜 - 최순실 게이트'는 한국 보수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틈만 나면 국가를 비상사태에 몰아넣고, 자유를 명분으로 재벌의 배를 불리고 권력자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언론을 이용해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아온 이들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끄러운 줄 모르고 반성조차 하지 않는 보수 정치인들을 보면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난다.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염치도 모르면서 무슨 보수인가. 한국 보수의 수준이 고작 이 정도란 말인가. 


한국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은 사실 보수가 아닌지도 모른다. 이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는데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을 읽고 확신했다. 한국 우익의 기원을 추적하는 책이라고 해서 친일파나 수구 반공주의자들의 계보를 담은 줄 알았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저자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세력들 중에 진정한 우익이라고 자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첫째, 일제에 부역한 사실이 없거나 그 사실을 철저히 참회할 것. 둘째, 북한과 일정 정도 이상 거리를 둘 것. 이에 따르면 이승만, 장면, 박정희 등 친일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은 인물들과 이들을 계승하는 인물들은 스스로를 우익으로 칭할 (상대를 좌익이라고 부를) 자격조차 없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진정한 우익, 진정한 보수는 누구인가. 저자는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백낙준, 장기려, 선우휘, 김성한, 양호민, 류달영, 김수환, 지학순, 조지훈, 김수영 등 의외의 인물들을 거론한다. 이들 중에는 소위 '좌익 인사'로 분류되는 인물들도 있는데 사상적 배경이나 활동 내용을 보면 우익으로 분류될 만하다. 이른바 '학병 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1920년 전후 다섯 해 정도에 출생해 일제 시대 최고의 고등교육을 받았으나 나이가 어린 관계로 친일 전력은 없다. 이북 출신으로 반공 이데올로기가 투철하며, 기독교 신자로서 미국 문화에도 개방적이다. 친일 전력을 청산하지도 않고 독재를 한국식 민주주의로 왜곡한 가짜 우익 말고, 자유를 갈망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추구한 이들이야말로 한국 보수의 원조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학병 세대는 또한 대한민국이 서구와 유사한 발전 수준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산업화, 세계화를 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정부 수립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친일 세력을 철저히 배격했으며 자유를 억압하는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에 항거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고 한국 보수의 원조인데도 역사 교과서에서 이들의 이름을 찾기가 힘들고, 그나마 이들의 이름이 나오는 책에서는 이들을 보수가 아닌 진보, 우익이 아닌 좌익 인사로서 소개한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의 보수, 우익을 자처하는 이들은 누구를 계승하고 있는가. 누구를 대표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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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 세트 (전3권) (반양장) - 전체주의의 기원 + 인간의 조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박미애.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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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라고 착각한다. 사실 민주주의는 정치 용어, 공산주의는 경제 용어로 분야부터 다르다.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정치 체제를 뜻한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에 입법부를 구성하는 국회의원과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을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다수의 국민이 아니라 소수의 권력자가 나라의 주인이다. 쉽게 말해 독재다. 독재자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로 권력 기관을 장악하며 선거를 치르지 않거나 방해한다. 대한민국은 헌법이 보장하는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지난 4년 동안 박근혜-최순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로 권력 기관의 빈자리를 메우고 선거에 부정 개입한 의혹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사실 독재 국가, 전체주의 체제 안에서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전체주의는 무엇으로부터 태어나 어떻게 일국의 정치 체제로 자리 잡을까? 독일의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역작 <전체주의의 기원>에 그 답이 있다. 1906년 독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한나 아렌트는 194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51년까지 뉴욕의 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던 아렌트는 이 책을 통해 역량 있는 정치사상가로 발돋움하고, 1963년에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대인은 국가에 근원을 둔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권력과 동일시되었으며,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가까운 가족끼리 모여 지냈던 관계로 피할 수 없이 모든 사회 구조의 파괴를 위해 일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21쪽)


이 책은 크게 반유대주의, 제국주의, 전체주의 -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반유대주의란 말 그대로 유대인을 반대하는 태도다. 유대인은 예부터 여러 지역에 퍼져 살면서 외교에 개입하거나 금융 거래를 주선하는 일을 하며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유대인은 다른 민족과 동화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자신들만의 종교와 문화, 전통을 배타적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돈은 많은데 유대인끼리만 쓰니 비유대인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권력은 없으니 만만하게 보였다. 결국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 반유대주의 정서에 불이 붙었고,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며 반유대주의가 정치적 목적에 악용되기에 이르렀다. 


제국주의 역시 본질은 돈과 권력이다. 산업화가 성숙 단계에 접어들자 자본가는 더 넓은 시장이 있는 해외로 나가고 싶어 했고, 국내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노동자 역시 해외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국가의 팽창 욕구를 부추겼고, 국가가 강해지고 식민지가 늘어날수록 이익이 커진다고 믿었다. 결국 반유대주의라는 정서적 배경과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배경이 만나 유럽 전역에서 전체주의 정부가 탄생했다. 특히 독일은 국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히틀러라는 괴물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된 히틀러는 유대인 말살이라는 끔찍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폭민은 일차적으로 각 계급의 낙오자들을 대표하는 집단이다. 이 때문에 폭민을 국민과 혼동하기 쉽다. 국민 역시 사회의 모든 계층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국민이 모든 혁명에서 진정한 대의제를 위해 투쟁했다면, 폭민은 항상 '강한 자', '위대한 지도자'를 소리 높여 외친다. 폭민은 자신을 소외시킨 사회를 증오하며, 자신을 대변해주지 않는 의회 역시 증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민의 지도자들이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던 수단인 국민 투표제는 폭민에 의존하는 정치가들의 낡은 개념이다. (242쪽)


저자가 유대인이기 때문인지 유대인의 역사와 문화, 특성에 관한 설명이 상세하다. 유대인이 비유대인 집단에 동화되기 위해 벌인 노력과 그 과정에서 겪는 자아 분열에 대한 묘사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2등 국민 취급을 받았던 유대인은 비유대인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서 유대인의 특성을 버리면서 동시에 지켜야 하는 딜레마에 처했다. 마치 '제2의 성'인 여성이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성을 버리는 동시에 지켜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 것처럼 말이다(어느 사회나 비주류, 소수자가 처하는 상황은 모습은 달라도 본질은 비슷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유대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비유대인 사회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고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공통의 적'으로 지목되었다. 이름하여 '희생양 이론'이다. 나치는 집권하기 훨씬 전부터 특정 계급이나 집단이 아닌 국가를 대표하는 정당을 표방했다.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으면 반국가적 인물로 몰았다. 유대인은 존재 자체가 반국가적이었다. 유대인 사회가 워낙 배타적인 데다가 부유하다는 인식까지 있으니 공통의 적으로 삼기에 적절했다. 독일 국민 대다수는 나치의 프로파간다를 묵인하거나 적극적으로 따랐다. 동의하지 않지만 부정하지도 않은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살고 싶은 욕망, 권력에 따르지 않으면 보복을 당하리라는 공포, 다수로부터 멀어지고 싶지 않은 불안이다.


유대인은 언제나 희생양이라는 이론은 그 밖의 누구라도 유대인처럼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중략) 이른바 희생양은 이제, 세상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그 대신 처벌을 면하고자 하는 무고한 희생자가 아니다. 세상사에 관여하는 여러 집단 중 한 집단의 사람들이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집단이 세상의 불의와 잔혹함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공동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87쪽)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부역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행위에 대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은 나치 부역자들의 내면과 그리 다르지 않다. 부와 권력을 누리고 싶은 욕망, 명령을 거역했다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공포, 조직에서 벗어나면 살아갈 방도가 없는 불안이 그들 내면에 도사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았어도 결과적으로 묵인하거나 방조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훨씬 큰 조직이나 단체에 속해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도 이런 심리는 존재한다. 점심 메뉴 고를 때 상사나 동료의 눈치부터 보는 마음에도 먹고살아야 한다는 욕망과 따돌림, 비난에 대한 공포, 실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이 내재되어 있다. 휴일에 쉬고 싶은데 상사의 아이 돌잔치에 불려가는 마음, 규정에 정해진 휴가를 마음껏 쓰지 못하는 마음에도 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지 못하고 나보다 더 큰 조직이나 단체에 주인 자리를 내줘야 하는 사회는 민주주의인가, 전체주의인가. 민주주의는 멀고 전체주의는 가깝다. 공산주의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 내재된 권위와 독재를 배척할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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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정 - 20세기의 스무 가지 교훈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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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째,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한 번은 정독을 하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미뤘다. 그러다 최근 한길사에서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묶은 세트를 출간했기에 이 때다 싶어 읽기 시작했다. 분량도 많고 내용도 어렵지만, 발췌로만 접해온 문장을 앞뒤 맥락을 알고 온전하게 읽으니 감동마저 느껴진다. 


한나 아렌트는 대표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권위에 순응하는 다수의 태도가 독재를 가능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흉악한 살인마나 반사회적 인격장애자가 아닌 상부의 명령에 저항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악이 자행된다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도 이 책에서 나왔다. 


미국의 대표적인 홀로코스트 연구자이자 2013년 한나 아렌트상 수상자인 티머시 스나이더가 쓴 <폭정 : 20세기의 스무 가지 교훈>의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163쪽밖에 안 되는 이 책에서 저자는 20세기 역사를 통해 인류가 배워야 할 교훈을 20가지로 추려 제시한다. 그중 핵심은 민주주의가 결코 자동적으로 폭정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며,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극적 또는 중립적인 태도로는 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유럽의 역사를 통해 인류가 얻어야 할 교훈은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강력한 독재자가 출현했다는 사실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손에 총을 그러쥐고 이웃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사실이다. 1938년 초,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을 때 오스트리아 나치가 유대인을 학대하는 동안 나치도 유대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즐겁게 이 상황을 지켜봤다. 소련과 동유럽에서 공산 정권이 악행을 저지를 때 대다수 민중은 저항 대신 동조나 침묵을 택했다. 


홀로코스트를 생각할 때면, 우리는 아우슈비츠와 기계화된 비인격적 죽음을 떠올린다. 이것이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 편리한 방식이다. (중략) 본질적으로 친위대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명령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살인자였다. (64쪽) 


저자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암약하는 폭정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 할 수 있는 노력도 소개한다. 미리 복종하지 말라, 제도를 보호하라, 일당 국가를 조심하라, 세상의 얼굴에 책임을 져라 같은 정치적 구호가 있는가 하면, 어법에 공을 들여라, 진실을 믿어라, 직접 조사하라, 시선을 마주하고 작은 대화를 나누어라 같은 일상생활에 밀접한 조언들도 있다. 


저자는 영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조지 오웰을 인용해 국가를 내세워 인권을 억압하는 국가주의자들은 "끝없이 권력과 승리, 패배, 복수에 관해 생각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이나 이념이 아니다. 정치는 삶이며 개인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하는 사소한 선택들은 그 자체로 일종의 투표 행위다. 그런 선택 하나하나가 장래에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2016년 저자는 설마 했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불완전한 제도인지 다시 확인했다. 2017년 3월 10일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51.6퍼센트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민주주의는 불완전하고 국민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이를 경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적극적인 관심과 행동, 저항과 투쟁이다. "선거가 끝나는 곳에서 폭정이 시작된다"라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깊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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