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길 없는 대지 - 길 위에서 마주친 루쉰의 삶, 루쉰의 글쓰기
고미숙 외 지음 / 북드라망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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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루쉰을 잘 모른다. 루쉰의 책 중에 읽어본 건 <아Q정전>이 유일한데, 그나마도 중고등학교 때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루쉰, 길 없는 대지>를 읽게 된 건, 저자 중 한 사람인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중국을 알려면 루쉰을 읽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기 때문이다. <아Q정전>이라는 괴작을 쓴 작가가 정말 그렇게 대단한 인물일까. 반쯤 의심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이 책을 직접 읽어보니 과연 루쉰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일단 그 시대 사람으로는 드물게 이동거리가 상당하다. 루쉰은 1881년 중국 저장성 사오싱에서 태어나 난징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02년에는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와 센다이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귀국한 후에는 중국의 베이징, 샤먼, 광저우, 상하이 등을 오가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이 책은 고미숙을 비롯해 공부공동체의 학인(學人)으로 인연을 맺은 여섯 명의 필자가 루쉰이 직접 살았던 장소들을 방문해 각 시기별 루쉰의 삶과 사상의 흔적을 좇은 일종의 기행문의 형식을 띈다. 루쉰이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은 덕분이다. 


일본 유학은 루쉰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 도착한 루쉰은 변발부터 잘랐는데, 구한말 조선인들이 단발령에 반발한 것처럼 당시 중국인들도 변발을 자르는 것을 거부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루쉰이 변발을 자르자 중국인 유학생 사회 안에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자 루쉰은 변발이 만주족의 풍속이라는 이유로 거부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중국 문화의 하나로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느냐며 중국인의 이중성에 치를 떨었다. 


루쉰의 수난은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현재 도호쿠 의과 대학) 시절에도 계속되었다. 루쉰은 이 학교에서 후지노 곤쿠로라는 평생의 은사를 만났다. 후지노는 중국인 유학생인 루쉰이 수업 내용을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루쉰의 노트를 확인하고 빠진 내용을 보충하고 틀린 문법을 바로잡아주곤 했다. 그러자 일본 학생들은 '후지노 선생이 루쉰에게 미리 시험문제를 찍어주었다'라는 루머를 퍼뜨렸고, 루쉰은 '1등도 아니고 고작 68등인 나를 시기하느냐'며 학교를 그만뒀다. 당시 일본에는 중국인 유학생뿐 아니라 조선인 유학생도 있었다. 그들은 어떤 핍박을 당했을까. 루쉰보다 더한 일을 겪지 않았을까. 


문예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문예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정신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루쉰은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단, 그는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쓰지 않는다. 동시에 자신이 쓰는 글을 믿지 않는다. 루쉰의 글이 한없이 단순명쾌한 듯하면서도 버거운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지독한 자기부정과 자기환멸. 그러나 니체 말대로, 대체 자기를 환멸해 본 적 없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긍정할 수 있단 말인가. (225~6쪽) 


의학 공부를 그만두고 귀국한 루쉰은 이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외국 도서를 번역하면서 생계를 잇다가, 1918년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루쉰에게 글쓰기는 단순한 창작 활동이 아니라 '문예 혁명'이었다. 루쉰에게 글은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정신에 파문을' 일으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어둡고 막막한 현실 때문에 절망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도구였다. 그러나 루쉰은 무지몽매한 대중을 깨우치기 위한 글쓰기, 이른바 계몽적 글쓰기는 지양했다. 이것이 루쉰이 대단한 작가로 손꼽히는 점이다. 


루쉰은 무너뜨리고 부수고 없애고 바로 세워야 할 대상을 바깥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찾았다. 루쉰은 자기 자신의 우매한 생각이나 언행의 불일치, 과거의 습속을 생각 없이 따라 하거나 게으르게 사는 태도 등을 스스로 고백하고 반성하는 글쓰기를 즐겨 했다. 그래서 루쉰의 글은 무섭다. 잽을 날리는 데 남을 때리지 않고 자기 얼굴을 때리니 무서울 수밖에. 그러나 전통이든 습속이든 사회이든 문명이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든 간에, 뭐든 무너뜨리고 부수고 없애야 다시 만들 수 있고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루쉰은 과연 대단한 작가다. 


문명은 부유함도 대중정치도 아니다. 혁명은 부와 권력을 쟁취하는 권력투쟁이 아니다. 사람이 서는 것[立人], 그것이야말로 문명이고 혁명이다! (231쪽) 


혁명은 부와 권력을 쟁취하는 권력투쟁이 아니라 "사람이 서는 것[立人]"이라는 문장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혁명을 통해 기득권층이 독차지하고 있는 부와 권력이 원래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대중에게 분배되면 좋겠지만, 혁명의 과실(果實)은 그것만이 아니다. 자신의 뜻과 생각을 확립하고, 같은 뜻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연대하고, 연대를 통해 원하는 세상의 모습을 스스로 만드는 것. 그것이 혁명의 진정한 목표이고 성과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국 현대사에서 대부분의 혁명은 권력투쟁에 그쳤다. 부디 2016년 촛불 혁명의 결과는 달랐으면 좋겠다. 적폐 세력의 일부인 판검사들, 소신 없이 산 공무원들, 억압받은 언론인들 모두 돈(특히 삼성)과 권력에 기대지 말고 자기 두 발로 섰으면 좋겠다. 물론 나도(나는 판검사도 공무원도 언론인도 아니고 기댈 돈도 권력도 없지만 아무튼...).


사람이 사람을 먹는 기괴한 이야기나 쓸 줄 아는 작가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대단한 글을 많이 남겼을 줄이야. 루쉰의 저작이라고는 <아Q정전>밖에 읽어보지 못한 까닭에 이 책의 내용을 모두 소화하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계기로 앞으로 루쉰의 저작을 많이 만나봐야겠다. 고미숙의 말대로 중국을 알려면 루쉰을 읽고 알아야 하는지 판단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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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 - 뇌과학, 착한 사람의 본심을 말하다
김학진 지음 / 갈매나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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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선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본다. 여기서 이기적이라 함은 경제적 이익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과연 인간이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인가. 일제 시대에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독립운동가나 군사 독재 시대에 민주화 운동에 발 벗고 나선 이들은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이러한 사례만 보아도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는 경제적 이익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제적 이익보다 더욱 강력하고 원초적인 동기는 무엇인가. 고려대 심리학과 김학진 교수가 쓴 <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인정 욕구'다. 인정 욕구란 말 그대로 타인으로부터 주목받고 관심을 얻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를 일컫는다. 인정 욕구는 신생아 때부터 발달한다. 아기들은 엄마라는 대상을 향해 웃는 표정을 지으면 기본적인 욕구 - 따뜻함, 편안함, 안전함 등 -를 충족시킬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배우면서 인정 욕구를 발달시킨다. 이렇게 발달된 인정 욕구는 자라면서 육체적, 지적, 감성적, 예술적 차원으로 분화하면서 자신의 우수성을 드러내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고자 하는 심리로 자리 잡는다.


문제는 대부분의 욕구가 그렇듯이 인정 욕구 또한 끝이 없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인정받지 못할 때의 좌절감 또한 커진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갑질'이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큰 사람들은 일상적인 인사나 매너, 서비스에도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기 쉽고, 이로 인한 분노를 막말이나 폭력 등으로 표출하기 쉽다. 타인에 대해 험담하는 것도 인정 욕구의 또 다른 표현이다. 흔히들 뒷담화는 작은 집단에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행위라고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가치를 확인받기 위함이다. '우리 때는 어땠는데 요즘 아이들은 어떻다'는 식의 '꼰대' 발언 또한 젊은 사람들 잘 되라고 하는 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주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 잘났다. 인정 좀 해달라'는 표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능력이나 인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얻는 일은 좋은 것인데 왜 멈춰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뛰어난 능력과 인성은 그 자체로 장려되어야 하고 누구나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임이 분명하다. 단,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인정 욕구가 또 다른 어두운 얼굴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62쪽)


그렇다면 타인을 인정하지도 말고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도 말라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저자는 문화권에 따라 사람들이 반응하는 보상 유형이 다르다는 것에 주목한다. 한국처럼 경쟁이 일상화된 문화권에서는 상대적인 만족감에 반응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내가 만 원을 벌었는데 남이 천 원을 벌면 기분이 좋지만, 내가 만 원을 벌었는데 남이 십만 원을 벌면 기분이 나쁘다. 재벌 총수라도 되지 않는 한 평생 기분이 나쁘다.



(사진 출처 : 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80640)



반대로 경쟁이 일상화되지 않은 문화권에서는 절대적인 만족감에 반응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만 원을 벌면 그뿐. 그 돈으로 뭘 할지만 생각한다. 반드시 문화권에 따른 차이는 아닌지도 모른다. 작년 리우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중국의 수영 선수 푸위안후이는 자신의 최고 기록을 경신해 기쁘다고 말해 화제가 되었다. 만약 한국 선수가 동메달을 따고 나서 이런 태도로 인터뷰를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은메달을 따도 금메달 못 딴 죄인 취급 당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좋은 반응이 안 나올 게 뻔하다.


지나친 공감 능력은 집단의 리더들에게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스티브 잡스처럼 성공한 CEO 중에는 공감 능력이 낮은 사람이 많다는 주장이 있다. 놀랍게도 정치와 종교 분야의 지도자들 중에도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가 존재할 확률이 다른 분야에 비해 현저하게 높다고 한다. 심지어 이들을 일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부류와 구분해서 일종의 '성공한 사이코패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186쪽)


이 책에는 이타주의자의 인정 욕구 외에도 성공한 사이코패스,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뇌 차이, 중2병의 실체 등 다양한 주제의 글이 실려 있다. 이것도 저것도 관심 있는 주제라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각 주제에 관해 더욱 자세하게 분석한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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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경험 - 유발 하라리의 전쟁 문화사
유발 하라리 지음, 김희주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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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읽고 이해가 잘 안 되었는데 알라딘에서 어떤 분이 쓰신 서평을 읽고 겨우 이해했다. (북다이제스터 님 서재 http://blog.aladin.co.kr/713413104/9473632) 이렇게 잘 쓴 서평이 있는데 굳이 나까지 서평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지마는, 나는 나대로, 이해가 딸리는 대로 서평을 써보는 것으로. 


이 책은 유발 하라리의 전작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가 워낙 좋았기에 출간되자마자 구입해 읽었다. 구입해 놓고 보니 이 책은 신작이 아니라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가 출간되기 7년 전인 2008년에 나온 구작이었다. 유발 하라리가 역사 학자인 줄은 알았지만 역사 중에서도 중세 역사, 그중에서도 군사 문화 전공인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 책이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에 비해 주제가 좁고 내용이 깊은 것은 이때만 해도 저자가 전공 분야에서 자리 잡기 바쁜 '초보' 학자이자 작가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전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경험'이다. 저자는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다양한 문헌 자료를 통해 고증한다. 중세만 해도 전쟁은 특별한 경험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신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신의 뜻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전쟁 또한 신의 섭리이며 전쟁에 나가는 것은 신의 섭리에 따르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전쟁에 나가 생사를 넘나들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도 그뿐이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이러한 풍조가 바뀐 것은 18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사이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신이 아닌 인간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인문주의가 자리 잡고,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감성 문화가 유행했다. 근대인들 사이에서 전쟁에 나가면 개인적 성숙을 경험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는 소문이 퍼졌고, 전쟁 체험이 아무나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으로 여겨지기 시작하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전쟁에 나가려고 했다. 이들에게 전쟁은 아무나 할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계시(revelation)'로 여겨졌다. 


이렇게 된 것은 전쟁이 실제로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전쟁을 특별한 경험으로 해석하면서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부풀리기 때문이다.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이 몇십 년에 걸쳐 군대 이야기를 우려먹거나, 전쟁을 체험한 세대가 틈만 나면 "전쟁을 못 겪어봐서 배부른 소리 한다." 같은 말을 꺼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사람이 실제로 특별한 경험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사람이 그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특별하고, 누구나 할 수 없는 강렬하고 숭고한 경험으로 가치를 높였을 가능성은 부인하기 어렵다. 


전쟁을 긍정적으로 보는 체험담뿐 아니라 전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체험담도 마찬가지다. 전쟁에 대한 환멸이나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고백하는 체험담 역시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경험을 했는지 알 수 없고, 안다 한들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사람이 '주관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보기에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겪은 것을 남이 그대로 겪을 순 없다. 내가 겪은 것을 남에게 이야기한들 그대로 알 순 없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체험하거나 이해하고, 남을 이해하고 남에게 이해받고 있을까. 내게 이 책은 전쟁 그 자체를 다룬 책이라기보다, 전쟁을 통해 소통과 공감의 암울한 민낯을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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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5 2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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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6 08: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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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엄청나게 가깝지만 의외로 낯선 가깝지만 낯선 문화 속 인문학 시리즈 2
후촨안 지음, 박지민 옮김 / 애플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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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음식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생선회나 초밥을 파는 정통 일식집이나 이자카야 정도. 일본 가정식이나 라멘, 돈부리 등 일본인들이 평상시에 즐겨 먹는 음식을 국내에서 맛보기가 힘들었다. 요즘은 다르다. 일본 가정식을 직접 만들어 파는 음식점도 많이 생겼고, 일본 현지의 맛을 거의 그대로 재현한 라멘이나 우동, 소바, 카레 집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일본 음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본 음식은 생선회와 초밥이 전부일까? 라멘이나 돈가스는 일본인들이 예부터 먹어온 음식일까? 기왕 먹는 일본 음식, 제대로 알고 먹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 책을 찾았다. 대만의 역사학자 후촨안이 쓴 교양 인문서 <일본, 엄청나게 가깝지만 의외로 낯선>이다. 


우리는 '전통'을 문화 속에서 변하지 않고 늘 그대로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 프랑스인 또는 영국인 중에서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 순수한 중국식, 프랑스식, 영국식 문화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역사적 각도에서나 사회적 변화의 방식으로 '전통'을 관찰해보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요리를 알고 싶다면 음식과 사회와 외래문화 등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야 하고 이것이 바로 이 책이 견지하는 시각이다. 


일본 음식이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72년 육식해금령 이후다. 불교의 영향으로 1200년 동안 육식을 하지 않았던 일본인들에게 육식해금령은 커다란 사건이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육식을 먹지 않다가 먹게 되는 일은 고양이나 개를 먹지 않는 사람에게 먹게 하는 것처럼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메이지 정부가 육식을 허락한 것은 제국주의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인이 서양인에 비해 체구가 작고 체력이 약한 것은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메이지 정부는, 육식해금령과 함께 다양한 조리법을 개발해 육식을 적극 장려했다. 그 결과 탄생한 음식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돈가스다. 고기를 튀기면 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줄어들고 반찬으로서 밥과 함께 먹을 수도 있다. 일본산 소고기를 일컫는 와규, 스테이크용 고기를 잘게 잘라 철판에 구워 먹는 데판야키도 이때 탄생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깃코만 간장은 오사카성 함락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성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했고, 전투에서 진 히데요리와 가신들은 할복자살했다. 이때 히데요리를 지지하던 무사 중 한 명이었던 마키 요리노리의 가족들이 고향을 떠나 간장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훗날 깃코만 간장이 되었다고. 


중국에서는 이미 사라졌는데 일본에는 여전히 전해지는 고서나 문화, 사상처럼 두부는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지만 진짜 두부의 맛과 전통은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에 관한 설명도 흥미롭지만, 저자가 실제로 일본을 여행하면서 직접 음식을 맛보고 평가하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라멘이나 소바 등 서민들이 즐겨먹는 음식부터 미슐랭이 인정한 고급 음식과 쇼진 요리, 가이세키 요리 등 특수한 상황에서 먹는 음식까지 레퍼토리도 다양하다. 음식점 정보도 실려 있으니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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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들은 왜 종교가 되지 못했나 - 철학과 민주주의를 발명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새로운 시각
후지무라 시신 지음, 오경화 옮김 / 하빌리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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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의 출발점으로 일컬어지는 고대 그리스. 세계사 교과서나 철학서에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철학과 문화를 보면 현대인이 과연 능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 많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에 관한 상식 중에 틀린 것이 있다면 어떨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종교적이지도 않고 철학적이지도 않았다면? 


<그리스 신들은 왜 종교가 되지 못했나>는 일본의 사학자 후지무라 시신이 고대 그리스 문화에 관해 쓴 책이다. 대학에서 고대 그리스사 연구를 처음 시작한 날, 저자는 은사로부터 "고대 그리스 신전은 극채색으로 채색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순백이 아니었다."라는 말을 듣고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이때부터 고대 그리스 문화에 관한 진실과 거짓을 추적하는 데 평생을 바친 저자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 문화의 상징인 파르테논 신전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흰색이 된 건 영국의 대영박물관에서 일하던 한 직원의 실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직원은 박물관의 스폰서로부터 '좀 더 하얗게 만들어라! 그래야 대중들에게 먹힌다!'라는 명령을 받고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를 쇠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흰색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이는 1939년에 발각되어 대형 스캔들로 이어졌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애초에 고대 그리스를 서양의 기원으로 보는 것 자체가 유럽인에 의한 역사 날조라는 의견도 있다. 우리는 흔히 고대 그리스 신들이 금발에 흰 피부를 지닌 백인의 모습일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그리스 문명은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를 기원으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 신들은 검은 피부였을 것이라고. 또한 고대 그리스와 현대 그리스 사이에는 1000년의 공백이 있으며, 이들 사이에는 종교적, 문화적 유사성이 거의 없다고 한다. 


우리 인간 중에는 그리 잔혹하다고 의식하지 않고 벌레를 죽이는 부류도 있다.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나비는 채집하여 감상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벌레 중에는 벌처럼 날카로운 침으로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는 종류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신과 인간의 관계는 이 인간과 벌레의 관계와 비슷하다. 신들은 인간이 볼 때는 강대한 힘을 가진 초월적인 존재이지만 자비롭지 않으며 인류 전체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47쪽) 






이 책에는 고대 그리스를 보는 새로운 시각에 관한 설명 외에도 그리스 신화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올림포스 12신의 이력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성격에 대한 설명 등이 다채롭게 실려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올림포스 12신의 이력서다. 아폴론,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등 유명한 그리스 신들의 별명, 직업, 유명한 대사, 주위의 평가, 상징, 소지품 등을 프로필로 정리한 것인데,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그리스 신화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것만 읽으면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왜 고대 그리스인은 바람둥이 제우스를 최고의 신으로서 숭배하는 걸까?" 

이런 의문이 들겠지만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착각해서 생기는 의문이다. 제우스의 외도에 관한 신화가 이렇게 많은 이유는 그리스가 수많은 도시 국가가 난립해 있었던 데에 있다. 자신들의 선조가 제우스 신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온갖 도시들이 "제우스 신이 우리 도시에서 이런 사건을 벌였으니 우리 선조는 제우스이다"라는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76쪽) 


그리스 신들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진실을 밝히는 부분도 재미있다. 그리스 신화의 최고신 제우스가 들킨 것만 다른 여자와 결혼 3번, 단순 외도는 수백 번에 달하는 바람둥이 신이 된 것은 당시 그리스가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지 않은 도시 국가였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재미있고, 제우스는 이주민이 섬기던 신이었고 헤라는 원주민이 섬기던 신이었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해석도 재미있다. 


처녀와 아이의 수호신이자 달의 여신인 아르테미스가 생일 케이크의 원조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아르테미스는 출산의 여신이기도 해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생일이 되면 감사의 뜻을 담아 양초로 빙 에워싼 케이크를 아르테미스의 신전에 바쳤다고 한다. 생일 케이크의 원조가 아르테미스라는 것도 놀랍지만, 생일 케이크를 생일인 사람이 받는 게 아니라 신전에 바쳤다는 점도 놀랍다. 멀게만 느껴졌던 고대 그리스 문화가 이 책 덕분에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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