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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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일본사를 배운 적이 있었던가. 교과서에 일본사와 중국사가 아주 짧게 실려 있던 건 기억하지만, 한국사를 배울 시간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시험에 나오지 않아서 건너뛰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내가 일본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다. 정치외교학 전공이고 개인적으로도 일본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관련 수업은 죄다 수강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일본사를 틈틈이 공부하고 있다. 주로 책이나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우는 것이라서 사실 '공부'라고 하기에는 민망하다.


전직 외교관 신상목이 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는 일본사 중에서도 에도 시대의 역사를 공부하기에 탁월한 교재다. 1996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이후 일본 관련 업무를 주로 담당한 저자는 일본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와 문화,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외교부를 퇴직하고 현재 서울에서 '기리야마본진'이라는 우동가게를 경영하면서도 한일 관계 증진에 도움이 될 만한 저술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 요시노부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를 일컫는다. 조선으로 따지면 선조 말기부터 고종 초기에 이르는 시기다. 알다시피 이 시기에 조선은 영, 정조 시대의 르네상스를 지속하지 못하고 당쟁과 세도 정치를 일삼다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기 직전의 상황에 치달았다. 반면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과 조선통신사에게 배운 문물, 그밖에 중국과 서양 국가들로부터 흡수한 문화와 문명을 십분 발휘해 근대화의 기반을 닦았다. 


저자는 무려 400여 년 전부터 선진국이 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한 일본의 저력이 무엇인지 분석한다. 저자의 시선은 에도 시대의 정치를 비롯해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를 망라한다. 여행, 출판, 교육, 언론, 광고, 과학, 지도, 사전, 패션, 도자기 등 테마도 다양하다. 


인상적인 건 에도 시대에 발전한 분야가 지금까지도 일본을 먹여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출판 강국인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매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만큼 대학 수준도 뛰어나다.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요미우리 신문은 에도 시대에도 있었고, 단순하고 간결한 미의식을 중시하는 일본의 패션 문화는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다. 조선 후기에 발전한 것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뭘까? 고리타분한 성리학 문화? 남존여비 사상? 착잡할 따름이다. 


엄밀히 말해서 여행과 관광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관광이란 말은 중국 고전인 <역경>에 나오는 '관국지광'에서 비롯된 말이다. (중략) 일본의 유학자들은 관국지광, 즉 관광을 '나라의 빛을 살피는 것이 곧 군주의 덕을 가까이 느끼고 찬양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85쪽) 


일본은 에도 시대 중기부터 여행 대중화가 진전되었다. 여행 대중화로 인해 일찍부터 교통망, 숙박시설, 치안, 오락시설 등이 생겨나고 융성했다. 이때의 여행은 진정한 여행이 아니라 관광의 속성이 강했다. 유교 사상에서 관광의 '광(光)'은 '빛나는 문물, 전통, 군주의 덕으로 이루어진 나라의 찬란함과 위대함'을 의미한다.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광복(光復)'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다. 에도 정부가 장려한 여행은 어디까지나 나라의 위용과 위대함을 확인하고 애국심이 고취되도록 하는 '관광'이었다.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역시 한국이 최고야!'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것이 관광의 목적이라니. 이 밖에도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돌아볼 수 있는 내용이 여럿 실려 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아도, 일본에 관한 것은 무조건 싫어도, 한 번쯤 읽고 찬찬히 생각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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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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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동안 제법 많은 책을 읽었다. 읽고 있는 책까지 포함하면 만화를 제외해도 열 권이 넘는다. 가장 큰 수확은 칼 세이건의 명저 <코스모스>를 읽은 것이다. 오래전부터 <코스모스>를 읽으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끝까지 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최근 즐겨듣는 팟캐스트 두 곳에서 동시에 <코스모스>가 소개되었기에 '우주(cosmos)의 계시'라는 생각이 들어 읽기 시작했다(참고로 <코스모스>를 소개한 팟캐스트는 '김태훈의 클래식 클라우드 - 칼 세이건 편'과 '일상기술연구소 - 힘 빼기의 기술 편'이다). 


<코스모스>의 원형은 1980년 미국 PBS에서 방영된 동명의 13부작 다큐멘터리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과학 다큐멘터리로는 드물게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으며, 제작자이자 진행자인 칼 세이건이 저술한 책 또한 엄청나게 팔렸다. <코스모스>는 다큐멘터리 시리즈 순서에 맞춰 총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활한 우주에 지구라는 행성이 생기고, 지구 상에 인류가 출현하고, 인간이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우주로 나가기까지의 과정을 다채롭게 서술한다. 


<코스모스>에는 나처럼 과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과학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한 사람조차 관심을 기울일 만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 등 과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학자들의 이야기도 자주 나오고, 문학, 철학, 역사, 사회,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가 등장해 흥미를 잃을 수 없게 만든다. SF 문학의 대가 허버트 조지 웰스가 <우주 전쟁>을 쓰기 전에 준 외교관의 신분으로 조선에 파견된 적이 있으며, 건배를 뜻하는 'mazeltov'가 히브리어로 '좋은 별자리'를 뜻하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지구가 생명의 발생과 서식에 있어 완벽한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우연이며 지구인들에게 얼마나 큰 행운이냐고 감탄하는 소리를 우리는 종종 듣게 된다. (중략) 하지만 이러한 감탄성 주장이 부분적으로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지구의 자연환경이 인류에게 훌륭한 조건을 제공하는 것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모든 생물들이 지상에서 태어나서 바로 그곳에서 오랫동안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66쪽) 


칼 세이건은 불가지론자로 유명하다. 저자는 인간이 만든 신이 아닌 우주라는 거대한 질서를 믿었다. 저자는 지구가 인간이 살기에 최적의 환경인 것은 우연이 아니며, 지구에 살기 적합한 인간만이 남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일본의 전통 설화를 소개한다. 1185년 안토쿠 천황과 헤이케 사무라이 일파는 겐지 사무라이 일파의 공격을 받고 단노우라 해안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이후 단노우라 해안에선 사무라이의 얼굴을 빼닮은 게가 잡혔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답은 간단하다. 설화를 알고 있는 인근 어부들이 사무라이 얼굴을 닮은 게를 잡지 않고 놓아줬더니 일대에 사무라이 얼굴을 닮은 게만 잔뜩 남은 것이다. 


진화의 초기에는 돌연변이의 작은 차이가 크게 문제 될 바 아니지만 긴 진화의 과정을 통해 돌연변이의 작은 차이들이 누적된 결과는 엄청난 규모의 변화를 가져온다. 오래전에 생긴 사건일수록 그것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지대하기 마련이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생물 현상에서도 우연이 결정적인 차이를 초래한다. (562쪽) 


칼 세이건은 환경운동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그가 환경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이유는 단순하다. 진화의 역사를 보면 초기에 생긴 변화일수록 나중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고 치명적이다. 대표적인 예가 인간의 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 손에 다섯 개의 손가락, 양손 합쳐 열 개의 손가락이 있다. 이는 인간이 데본기에 번성했던 지골이 다섯 개인 어류에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지골이 여섯 개인 어류에서 진화했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 손에 여섯 개의 손가락, 양손 합쳐 열두 개의 손가락을 가졌을 것이다. 십진법으로 계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전이나 장기의 구조도 달라졌을 것이다. 


환경도 마찬가지다. 공장에서 폐수를 흘려보내면 당장은 환경에 별지장이 없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생태계는 물론 전 우주의 질서를 위협할 만큼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저자는 독자들이 부디 "충성의 대상을 인류 전체와 지구 전체로 확대"해 인류가 하나의 생물종으로서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하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아니면, 그 누가 우리의 지구를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다." 


<코스모스>의 마지막 문단을 읽노라니 연휴 동안 먹어치운 음식들이 생각난다. 딱히 필요하지 않은데도 사들인 물건들, 제대로 쓰지도 않고 내다 버린 쓰레기들도. 그것들은 어디로 가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에게 돌아올까.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니 이 책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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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도 괜찮아질까요? - 나의 첫 번째 심리상담
강현식(누다심) 지음, 서늘한여름밤 그림 / 와이즈베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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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은 힘들 때 주로 가족이나 친구에게 털어놓는다. 그도 안 되면 술을 마시거나 매운 음식을 먹거나 노래방에 가거나 게임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서양 사람들은 다르다. 실연을 했든 실직을 했든, 가족이 세상을 떠났든 반려동물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든, 힘든 일이 생기면 무조건 심리상담을 받는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몸이 조금만 아파도 약국을 찾는 것처럼, 서양 사람들은 마음이 조금만 힘들어도 심리상담을 청한다. 


심리상담, 과연 무엇이고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심리상담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책 <제 마음도 괜찮아질까요?>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저는 심리학이 처음인데요>의 저자 강현식(누다심)이 글을 쓰고,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의 저자이자 팟캐스트 '서늘한 마음썰'의 진행자인 서늘한여름밤이 그림을 그렸다. 심리상담의 방법과 절차, 제대로 된 심리상담가 찾는 법, 심리상담에 소요되는 비용, 세간의 오해와 편견 등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책은 은주, 석영, 지선이 마음의 치유와 변화를 위해 심리상담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보여준다. 중소기업 인사팀에 다니는 은주는 괴팍한 상사 때문에 고생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미워하는 것은 상사가 아니라 상사를 볼 때마다 연상되는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회학을 전공하는 석영은 복학 전 취업한 직장에서 끔찍한 일을 당하고 심리상담을 받았다가 사이비 상담가를 만나 더 큰 고생을 했다. 미술 학원 강사인 지선은 중학교 시절 남학생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한 기억 때문에 남자를 대하는 것이 불편하다. 





이들은 심리상담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심리상담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심리상담을 받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겨우 이 정도 문제로 심리상담을 받아도 될까? 상담비가 너무 비싸지 않을까? 상담가가 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줄까? 과연 효과가 있을까? 등등의 고민을 혼자서 끌어안고만 있었다. 


저자는 말한다. "누구나 은주처럼 힘든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자신이 힘든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략) 내 마음을 그냥 방치해둔 채 환경만 바꾼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 없습니다. 마음이 취약한 부분이 그대로 있는 한 힘든 일은 또다시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는 전문가를 찾아가서 제대로 된 도움을 받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23쪽) 서밤 님이 그린 만화 속 문장을 빌리면, '문제' 있는 사람이 상담을 받는 게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이 상담을 받는다. 





정식으로 심리상담을 받아본 적도 없고 받아보려고 알아본 적도 없어서 이 책에 적힌 내용 대부분이 신선했다. 정신과 의사와 심리상담가의 차이, 심리상담과 약물 치료의 차이 등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심리상담을 받는 데 드는 비용과 제대로 된 심리상담가 찾는 법 등 실용적인 정보도 실려 있어서 앞으로 직접 심리상담을 받게 되거나 주변에 심리상담을 받으려는 사람이 있을 때 이 책을 참고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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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아이들 - 전범의 자식들, 역사와 대면하다
타냐 크라스냔스키 지음, 이현웅 옮김 / 갈라파고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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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심 있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그 많던 친일파는 광복 후 어떻게 되었을까. 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시민들을 탄압하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가혹한 고문으로 멀쩡한 사람을 불구로 만든 고문관들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던 군인들은, 민주화 운동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진압하던 경찰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들의 자식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신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한 일을 알기나 할까. 


<나치의 아이들>을 쓴 타냐 크라스냔스키는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저자의 어머니는 독일인이고, 저자의 아버지는 프랑스계 러시아인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독일인인 외할아버지와 아주 가깝게 지냈는데, 외할아버지의 직업은 군인이었고 활동 시기는 나치 정권 시절과 겹친다. 저자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가 전범에게 부역했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끼고 프랑스로 귀화했고, 저자 역시 자신에게 한없이 인자한 외할아버지가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았다.


저자는 나치 전범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치밀하게 추적한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 설계자 하인리히 힘러,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 총통의 후계자 루돌프 헤스, 크라쿠프의 백정 한스 프랑크, 히틀러의 오른팔 마르틴 보어만,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회스, 악마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생체실험가 요제프 멩겔레 등 대표적인 나치 전범 8인의 생애와 그들의 후손들의 삶을 추적한 결과물을 담고 있다. 


'나치의 아이들'의 삶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아버지의 범죄 자체를 부정하는 모습이다. 하인리히 힘러의 딸 구드른 힘러가 대표적이다. 힘러가 애지중지하는 딸이었던 힘러는 아버지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자살한 후에도 아버지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의 행위를 옹호했으며, 나중에는 독일 극우 정당에 가입하고 전범들을 돕는 ‘침묵의 원조’의 회원으로 활동하는 행보를 보였다. 평생을 아버지 하인리히 힘러의 사랑스러운 딸이자 나치 정권의 '공주'로서 산 구드룬 힘러는 여러모로 '어떤 분'과 매우 흡사해 소름이 돋았다.


'공주'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앞에서 열을 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 근엄한 목소리로 "전쟁 때 당신은 어디서 싸우셨나요?", "당신은 어느 부대에서 근무했나요?"라고 질문하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병참에 관해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사찰 현장에 자신을 데리고 갔을 때 무엇을 관찰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행렬을 이룬 옛 전투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가장 뛰어난 부하의 딸 앞에 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낀다. 


또 하나는 아버지의 범죄를 증오하거나 속죄하는 모습이다. 나치의 악행을 알고 나서 더 이상 이들의 후손이 지구 상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스스로 불임 수술을 받은 사람도 있고, 아버지가 유대인을 학살한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사제가 되어 유대인 공동체에 들어가 봉사하는 삶을 택한 사람도 있다.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딸은 아버지가 유대인들한테서 몰수한 그림을 팔아 예술과 과학계의 유대인 여성들을 지원하고 있다. 


독일은 나치 전범을 엄격하게 처벌하고 나치에 가담한 이력이 있는 사람을 철저하게 추적한 나라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이 책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전쟁이 끝난 후 오랫동안 나치 전범에 관한 언급은 금기시되다시피 했고, 전쟁을 일으킨 책임은 히틀러와 최측근 몇 명에게만 지우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며, 나치 전범의 아이들 또한 큰 어려움 없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저자는 나치 일당을 확실하게 뿌리뽑지 못했고 나치 전범의 후손들이 여전히 독일에서 잘 살고 있는 것이 오늘날 극우파가 기승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는지 지적한다. 이는 한국 사회에도 유효한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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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법을 배우기
시어도어 다이먼 지음, 원성완 옮김 / 민들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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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보면 수업 시간에 졸지도 않고 야자 한 번 빠지는 일 없이 열심히 공부하는데도 성적은 그저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 반면 수업 시간에 노트 필기도 안 하고 시험 전에 벼락치기할 뿐인데도 성적이 잘 나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공부량만 따지면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많겠지만, 공부량 대비 성적, 즉 투입 대비 산출을 따지면 전자보다 후자가 월등히 높다. 이런 차이는 왜 생길까? 


시오도어 다이먼이 쓴 <배우는 법을 배우기>에 따르면 전자는 "배움의 열쇠는 애쓰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명료하게 생각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다. 저자는 아들 조시가 글씨를 못 쓴다고 걱정하는 여자의 사례를 소개한다. 수많은 교사들이 조시에게 글씨 연습을 시켰지만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반면 저자는 한 번에 조시의 글씨를 보기 좋게 바꿨다. 비결은 글씨를 '쓰지' 말고 '그리는' 것이었다. 저자는 조시에게 연필을 꽉 쥐지 말고 글씨를 최대한 똑같이 그려보라고 주문했다. 그랬더니 조시는 전보다 글씨를 잘 쓸 수 있게 되었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교사와 부모는 아이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채근하는 존재가 될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기술을 알려주고 공부하는 과정이 몸에 배도록 이끌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물고기를 많이 잡으라고 잔소리만 하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직접 가르쳐줘야 한다. 문제는 현재의 교육 환경이 공부에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그저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박감만 부여하고 열심히 하지 않았을 때의 책임만 강조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뭔가를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연습을 하지 못한 채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된 후에 배움을 기피하거나 남이 만든 것을 따라 하는 일만 반복하며 살 수밖에 없다. 


계속 실패가 반복될 때 학생은 자연스레 자신감을 잃게 되고 결국 무언가를 수행하라고 할 때면 걱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은 과제에 직면할 때 공포증과 같은 병적인 불안 또는 패닉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 친구가 겪었던 문제의 핵심은 학습과정의 난관이었지 정서적 혼란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때는 심리상담사가 아니라 지혜로운 교사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48쪽) 


저자는 학습 과정에서 학생이 겪는 정서적 혼란은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학습 과정이 잘못되었거나 학습 과정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부정적인 심리 상태를 교사가 해소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교육적 문제라고 설명한다.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 공부가 잘 안 되거나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서 걱정할 때, 주변 어른들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기만 했지, 모르는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나 취약한 과목을 잘 할 수 있는 기술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온전히 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따르면 나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게으른 것이었다. 학생을 가르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그만큼 교육은 어렵고 고된 길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 몇 명이 안다고 넘어가면 안 되는데, 공부 못하는 학생도 알 때까지 가르쳐야 되는데,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교사는 찾아보기 힘들다(내 경험상으로는 한 명도 없었다). 과연 그런 교사들이 학생들을 향해 열심히 공부하라고 다그칠 자격이 있는 걸까. 기분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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