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트레일스 - 길에서 찾은 생명, 문화, 역사, 과학의 기록
로버트 무어 지음, 전소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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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하이킹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개 분명한 동기나 자극적인 계기가 있다. <와일드>의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완주하기로 마음먹은 건 어머니의 죽음과 낙태, 이혼에 따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나를 부르는 숲>의 저자 빌 브라이슨이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결심한 건 20년 만에 찾은 조국과 가까워지기 위한 방편이었다. 


<온 트레일스>의 저자 로버트 무어가 장거리 하이킹에 관심을 가진 건 오로지 책 한 권(정확히는 시리즈)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미 지독한 독서가였던 저자는 얇은 문고판 <초원의 집>을 읽고 숲 속 모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마크 트웨인과 잭 런던의 소년기 모험담, 존 뮤어의 산중 몽상기 등을 탐독하며 언젠가 나도 이들처럼 자연 속에서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저자가 오로지 상상만 했던 모험을 현실에서 실행으로 옮긴 건 그로부터 한참 후인 2009년이다. 대학생이 된 저자는 학교생활을 하는 틈틈이 하이킹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다녔다. 어느 해 여름방학, 저자는 한 젊은 스루하이커에게 나도 언젠가 트레일을 완주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스루하이커가 단호하게 말했다. "학교를 그만둬. 지금 당장 시작하라고." 


그때부터 하이킹 준비를 한 저자는 1년 만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5개월간의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에 돌입했다. 저자의 관심사는 오늘 뭘 먹을까, 내일 어디서 잘까 같은 일상적인 고민도,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나 장래에 대한 불안 같은 내면의 문제도 아니었다. 저자는 수백, 수천 킬로미터의 길을 언제 어떻게 다 걸을까 하는 걱정보다도, 두 눈앞에 이 끝없는 길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 자체에 전율했다. 


수백, 수천 킬로미터의 길이 내 눈 아래로 지나가는 동안, 나는 휘갈긴 글씨 같은 이 끝없는 길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 길은 누가 만들었을까? 왜 생겼을까? 아니, 길 자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9쪽)


이 책은 앞서 언급한 <와일드>, <나를 부르는 숲> 같은 여행서보다 <코스모스> 같은 과학서에 가깝다. 첫 번째 장에서 저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화석 트레일을 살펴보며 동물들이 처음에 이동하기 시작한 이유를 추론한다. 두 번째 장에서는 곤충, 세 번째 장에서는 코끼리, 사슴, 가젤 같은 네 발 달린 포유류의 트레일을 살펴본다. 네 번재 장에서는 고대 인류 사회가 형성한 길과 언어, 구전설화, 기억 등의 관계를 확인하고, 다섯 번째 장에서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비롯한 여러 현대 하이킹 트레일의 기원을 파헤친다. 


저자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남쪽 구간을 걷는 동안 나무 몸통이 두 갈래로 나뉜 자리에서 기이한 모습의 작고 하얀 텐트들을 여러 번 발견했다. 알고 보니 이 텐트들은 텐트나방 애벌레로 불리는 곤충인데, 이들은 "홀로 있을 때는 완벽하게 무력하지만, 집단을 이루면 숲 전체를 벌거벗길 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다. 이들은 항상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며, 무리의 우두머리가 나아가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문제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경로를 잘못 택할 때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경로를 잘못 택해도 무리 중 어느 누구도 경로를 벗어나 다른 경로를 모색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지기 십상이다. 


어린 시절 책 한 권을 읽고 자연을 모험하는 꿈을 품은 남성이 직접 길 위에 올라 장거리 하이킹을 하면서 자연을 탐색함은 물론, 자연 속에서 인류의 역사와 문화, 생명의 신비를 깨닫고, 환경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여정이 흥미롭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엄청난 혼란과 방황을 겪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앞에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 길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라는 인식도 인상적이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도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와 연결된 무수히 많은 생명을 깨닫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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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중독자 - 멸종 직전의 인류가 떠올린 가장 위험하고 위대한 발명, 내일
다니엘 S. 밀로 지음, 양영란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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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따르면, 인류가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인류가 여느 동물과 달리 허구를 지어내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 진화생물학자인 다니엘 S. 밀로는 유발 하라리와 상당히 유사한 주장을 한다. 밀로에 따르면, 인류가 지금으로부터 약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 전 지구로 퍼져 각자의 문명을 발전시킨 동력은 '미래'다. 지금이 아닌 나중을,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실천으로 옮긴 자들이 오늘날의 세상을 만들었다. 


많은 인간들이 인간과 동물을 달라도 너무 다른 존재로 규정하지만, 사실 인간의 고유한 특질로 알려진 것들 중에는 동물과 공유하는 특질이 제법 많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은 사실이 아니다. 2005년 에스토니아의 심리학자 야크 판크셉은 쥐를 비롯한 어린 영장류마저 웃을 줄 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인간만이 생식과 관계없이 성관계를 맺는다는 믿음도 사실이 아니다. 돌고래나 보노보도 암컷이 임신 가능한 연령인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오로지 쾌락을 위해 성관계를 한다. 


동성애 역시 자연에서 널리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펭귄, 아마존강 돌고래, 돼지꼬리 마카카, 돌고래, 바다소, 비비류 원숭이, 펭귄, 보노보 등에서 동성애가 관찰된 바 있다. 성욕이 넘치는 돌고래는 거북이, 상어, 심지어 뱀장어들과도 섹스를 한다. 수음, 근친상간, 시간, 강간, 금욕 모두 인간과 동물이 공유하는 특성이다. 폐경은 오랫동안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최근 고릴라 암컷의 23퍼센트가 폐경을 겪고, 32퍼센트는 폐경 전 증후군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간만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안다는 믿음도 거짓이다. 해마들도 포식자에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어린 해마들을 입양하며, 푸른원숭이는 동료 원숭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고함을 질러 경고한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특질들을 보면 인간은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고, 이러한 특질이 인간을 오늘날의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다는 믿음 또한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외부적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상태의 경우, 우리는 최초의 이민자들이 자기 부류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었으리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중략) 한 전문가는 "아일랜드를 떠난 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제일 역동적이었으며, 제일 야심만만했는데, 우리가 그들에게 성공할 환경을 제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유일한 특질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금으로부터 5만여 년 전, 아프리카에서 잘 살고 있었던 인류의 선조는 어느 날 문득 정든 고향을 벗어나 다른 대륙으로 넘어갈 생각을 했다. 이들은 오늘보다 미래에 더 큰 기회가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인류 최초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고 한 선구자들이었다. 이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인류의 영역을 넓히고 각자의 분야에서 활약해 마침내 문명을 발전시켰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은 고통인 동시에 기회다. 하나의 선택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많은 선택지를 보려고 하면 불안과 결정 장애라는 부작용이 따르기는 해도 결국 인간에게 더 큰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니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자신을 책망할 필요도 없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상상을 헛된 꿈으로 일축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올 것이라고 믿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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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김은주 지음 / 봄알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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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반적인 책에 비해 크기도 작고 두께도 얇다. 하지만 내용은 결코 작거나 얄팍하지 않다. 


이 책은 남성 일색인 기존 철학계에서 큼직한 족적을 남긴 여성 철학자 6인의 삶과 지적 여정을 소개한다. 이 책에 소개된 철학자는 한나 아렌트,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도나 J. 해러웨이, 시몬 베유, 쥘리아 크리스테바 등이다. 이 중에 내가 전부터 알고 있었던 여성 철학자는 모두 한나 아렌트, 주디스 버틀러, 시몬 베유뿐이다. 이들을 제외한 3인은 부끄럽게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러 이들 3인의 항목을 더욱 공들여 읽었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과연 내가 이 이름을 온전히 외울 수 있을까)은 데리다의 해체론과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를 교차시키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고자 한 사상가다(47쪽). 인도 출신인 스피박은 성별로 보나 국적으로 보나 비주류인 자신의 처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주류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바꾸거나 길들이는 것을 저항하며 평생을 보냈다. 인도 델리의 길거리에서 여성이 혼자 달리기를 한 것은 스피박이 최초다. 


도나 J. 해러웨이는 구체와 추상, 자연과 문화, 유기체와 기계 등 기존의 이분법과 이항대립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실험을 했다. 미국 출신인 해러웨이는 어린 시절 엄격한 가톨릭 학교에서 순종적인 여성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대학 진학을 계기로 가톨릭 문화와 멀어져 학문의 세계로 진입했다. 해러웨이는 생물학에 기반해 백인 남성 중심의 죽은 지식을 비판했고, 성소수자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하면서 남성과 여성뿐인 기존의 성 구분법이 얼마나 어리석고 폭력적인지 역설했다.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불가리아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학술 활동을 시작한 학자이자 작가이자 언론인이다. 크리스테바는 남성 중심의 전통적 언어관을 비판하고, 보편적인 성적 입장을 반영하는 새로운 언어관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크리스테바는 학계 안에 머무르지 않고 언론 및 방송, 저술 활동에도 열심이다. 비평을 창작의 영역으로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추리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고 하니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다.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이라는 허구성에 머물러선 안 된다. '여성'이 공통적인 특징과 관심사를 가진 집단이라는 주장은 인간을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는 성관계의 이원적 관점을 강화하면서 무의식에서부터 성 역할을 규제하고 성별화를 수행한다.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이 단 하나의 여성을 그리고 정체성의 정치에 얽매여 보편적, 통일적 여성상을 재현할수록, 다양한 차이를 주창하는 여성은 지워진다. (87쪽) 


한나 아렌트, 주디스 버틀러, 시몬 베유에 관한 항목 중에서는 주디스 버틀러에 관한 항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버틀러는 제3세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여성주의 철학자이자 퀴어 이론가다. 버틀러는 젠더에 맞추어 사는 것이나 젠더를 거스르며 사는 것이나 개인을 억압하고 차별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분석한다. 문제는 남성과 여성, 오로지 두 가지 선택지만을 인정하는 기존의 젠더 이원론이며, 남성 중심 사회 구조에 대항해 여성 인권의 향상을 주창하는 페미니즘 운동 또한 기존의 젠더 이원론에 갇히지 말고 다양한 여성성, 확대된 여성성을 포괄할 것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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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습니다 - 최지은 기자의 페미니스트로 다시 만난 세계
최지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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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습니다>는 <매거진 t>, <텐아시아>, <아이즈>를 거치며 10여 년간 대중문화 기자로 일한 최지은 기자가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한국 사회의 대중문화를 분석한 기록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온라인 대중문화 매체에서 10년 넘게 일하며 "멋진 남자들의 세계에 빠져들고, 찬사를 보내고, 그들의 '다양한' 매력을 발굴해 전파하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라고 고백한다. 저자 스스로 "모든 영역에서 남성들에게 더 관대했고, 너무 금세 숭배했다"라는 사실을 자각한 건 2015년 팟캐스트 <옹달샘과 꿈꾸는 라디오>이 해온 여성 혐오, 약자 비하 발언이 공개된 후다. 특집 기획을 제안할 만큼 옹달샘을 좋아했던 저자는 이 사건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가 상정하는 '대중'에 여성이 포함되지 않으며, 여성 또한 한국의 대중문화가 쏟아내는 여성 혐오 서사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책은 저자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부당한 대우와 폭력을 관찰하고 기록한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대중문화에 퍼져 있는 여성 혐오 서사를 분석한 '대중문화 속 혐오 바이러스', 예능과 영화를 이른바 '아재'로 불리는 한국의 중년 남성들이 잠식하고 있는 현상을 조명한 '한국 남자들이 사는 세상', 여성 스스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길을 모색하는 '그래서 페미니즘' - 이렇게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중문화 기자인 저자의 특기가 발휘되는 제2장 '대중문화 속 혐오 바이러스'와 제3장 '한국 남자들이 사는 세상'이 특히 인상적이다. 


남성 연예인들은 도박이나 음주운전을 비롯해 사회적 물의를 빚는 사건을 일으켜도 시간과 인맥을 통해 자연스럽게 복귀할 수 있지만 여성 연예인은 나이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밀려난다. (중략) 새로 시작되는 프로그램의 소개에 따르면 살림도 남자가 하고, 여행도 남자끼리 가고, 딸도 남자가 키우고, 개밥 주는 것도 화장하는 것도 남자들이었다. 남자는 숨만 쉬어도 아이템이 되는 건가 싶을 만큼 '남자', '수컷', '형(님)'을 제목에 내세운 프로그램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89쪽) 


저자는 여성 관객이 남성 제작진이 만든 영화를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나 여성 독자가 '맨스 플레인'이 창궐하는 남성 작가의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김훈의 소설 <언니의 폐경>에 갑자기 생리를 시작해 피에 젖은 언니의 팬티를 여동생이 잘라내 버렸다는 내용이 나온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래 김훈의 소설을 더 이상 읽지 않게 된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언니의 폐경>의 명대사 "뜨거운 것이 밀려나와"라는 지금도 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서 틈만 나면 등장하는 유행어다). 


저자는 한국 드라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로맨스를 가장한 폭력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수많은 한국 드라마들이 여성을 '어린아이처럼 대하고, 강압적으로 다루고, 동의 없는 스킨십을 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위협하는 남자들'을 거부하기 힘든,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나쁜 남자'로 그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문제는 이런 콘텐츠를 소비하는 여성 시청자들이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남성이 가하는 폭력이나 학대, 폭언, 고성, 비난, 스토킹 등을 응당 있는 사랑의 표현 방식으로 착각하고 남성에게 '면죄부'를 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때의 피해자는 오직 여성이다. 


여성 혐오와 남성 숭배 서사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즐길 거리는 무엇일까. 찾아보면 여성이 여성 스스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콘텐츠가 생각보다 많이 있다.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을 살면서 같은 문제를 고민한 여성들의 책, 영화, 드라마도 적지 않다. 여성 스스로 여성이 만든 콘텐츠를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언급하고, 더 많이 토론하고, 더 많이 직접 제작하면서 더 많은 여성 서사가 발굴되고 더 많은 여성 콘텐츠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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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을 곳이 없다고 느낄 때 - 어느 곳에 있어도 편하지 않는 당신을 위한 공간 심리학
미즈시마 히로코 지음, 정혜주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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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미즈시마 히로코는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 정신신경과 교수이자 대인관계요법 전문 클리닉 원장이다. 저자는 책에서 내가 마음 편히 있을 곳이 없다고 여기는 느낌의 정체는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하면 나를 위한 안식처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지 등을 설명한다.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이런저런 팁이나 기술보다도 저자 자신이 직접 체득한 경험이다. 저자는 몇 년 전 도치기에서 중의원 선거에 입후보해 두 번 당선하고 5년간 일한 경력이 있다. 처음 입후보했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걱정 어린 말을 많이 들었다. 지연도 없는 지역에서 의사 출신이 선거에 나가 당선될 리 없다고들 했다. 당선된 후에도 도치기 사람들로부터 '외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적잖이 받았다. 


저자는 도치기를 '내가 있을 곳'으로 만들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했다. 중요한 활동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집마다 방문했다. 국회가 있는 도쿄와 지역구인 도치기를 매일 같이 오갔다. 명절은 반드시 도치기에서 보냈고, 지역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가마를 타기도 하고 떡메 치기를 하기도 했다. 그제야 도치기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의원을 그만두고 나서도 인연이 계속되었다. 


결국 내 자리는 내가 만드는 것이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내 일처럼 앞장서고 혼신을 다 하면 누가 달려들어도 밀려나지 않는 내 자리가 생긴다. 이 밖에 저자가 미국 AH 센터로 자원봉사를 하러 떠났을 때의 일화나 한방을 공부할 때의 일화 등이 인상적이었다. 이만한 학력과 경력을 지닌 사람도 낯선 곳, 낯선 무리 속에선 소외감을 느끼고 외로움에 시달린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러 사람과 있을 때 종종 불편함을 느끼는 내가 덜 초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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