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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트레일스 - 길에서 찾은 생명, 문화, 역사, 과학의 기록
로버트 무어 지음, 전소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7/1025/pimg_7796361641762042.jpg)
장거리 하이킹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개 분명한 동기나 자극적인 계기가 있다. <와일드>의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완주하기로 마음먹은 건 어머니의 죽음과 낙태, 이혼에 따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나를 부르는 숲>의 저자 빌 브라이슨이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결심한 건 20년 만에 찾은 조국과 가까워지기 위한 방편이었다.
<온 트레일스>의 저자 로버트 무어가 장거리 하이킹에 관심을 가진 건 오로지 책 한 권(정확히는 시리즈)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미 지독한 독서가였던 저자는 얇은 문고판 <초원의 집>을 읽고 숲 속 모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마크 트웨인과 잭 런던의 소년기 모험담, 존 뮤어의 산중 몽상기 등을 탐독하며 언젠가 나도 이들처럼 자연 속에서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저자가 오로지 상상만 했던 모험을 현실에서 실행으로 옮긴 건 그로부터 한참 후인 2009년이다. 대학생이 된 저자는 학교생활을 하는 틈틈이 하이킹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다녔다. 어느 해 여름방학, 저자는 한 젊은 스루하이커에게 나도 언젠가 트레일을 완주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스루하이커가 단호하게 말했다. "학교를 그만둬. 지금 당장 시작하라고."
그때부터 하이킹 준비를 한 저자는 1년 만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5개월간의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에 돌입했다. 저자의 관심사는 오늘 뭘 먹을까, 내일 어디서 잘까 같은 일상적인 고민도,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나 장래에 대한 불안 같은 내면의 문제도 아니었다. 저자는 수백, 수천 킬로미터의 길을 언제 어떻게 다 걸을까 하는 걱정보다도, 두 눈앞에 이 끝없는 길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 자체에 전율했다.
수백, 수천 킬로미터의 길이 내 눈 아래로 지나가는 동안, 나는 휘갈긴 글씨 같은 이 끝없는 길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 길은 누가 만들었을까? 왜 생겼을까? 아니, 길 자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9쪽)
이 책은 앞서 언급한 <와일드>, <나를 부르는 숲> 같은 여행서보다 <코스모스> 같은 과학서에 가깝다. 첫 번째 장에서 저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화석 트레일을 살펴보며 동물들이 처음에 이동하기 시작한 이유를 추론한다. 두 번째 장에서는 곤충, 세 번째 장에서는 코끼리, 사슴, 가젤 같은 네 발 달린 포유류의 트레일을 살펴본다. 네 번재 장에서는 고대 인류 사회가 형성한 길과 언어, 구전설화, 기억 등의 관계를 확인하고, 다섯 번째 장에서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비롯한 여러 현대 하이킹 트레일의 기원을 파헤친다.
저자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남쪽 구간을 걷는 동안 나무 몸통이 두 갈래로 나뉜 자리에서 기이한 모습의 작고 하얀 텐트들을 여러 번 발견했다. 알고 보니 이 텐트들은 텐트나방 애벌레로 불리는 곤충인데, 이들은 "홀로 있을 때는 완벽하게 무력하지만, 집단을 이루면 숲 전체를 벌거벗길 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다. 이들은 항상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며, 무리의 우두머리가 나아가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문제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경로를 잘못 택할 때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경로를 잘못 택해도 무리 중 어느 누구도 경로를 벗어나 다른 경로를 모색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지기 십상이다.
어린 시절 책 한 권을 읽고 자연을 모험하는 꿈을 품은 남성이 직접 길 위에 올라 장거리 하이킹을 하면서 자연을 탐색함은 물론, 자연 속에서 인류의 역사와 문화, 생명의 신비를 깨닫고, 환경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여정이 흥미롭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엄청난 혼란과 방황을 겪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앞에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 길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라는 인식도 인상적이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도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와 연결된 무수히 많은 생명을 깨닫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