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읽는 시간 - 나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바운더리 심리학
문요한 지음 / 더퀘스트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본능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 그런데 왜 인간관계에서만큼은 고통을 놓지 않을까? 자신을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상사에게 오히려 더 잘 보이려고 애쓰고, 과거에 자신을 학대하고 무시했던 부모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하고,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심하게는 폭언과 폭력을 퍼붓는 애인 또는 배우자에게서 떠나지 못하는 걸까? 정신과 의사 문요한의 책 <관계를 읽는 시간>에 그 답이 나온다. 


사람들이 불행한 인간관계를 반복하는 이유는 '관계의 틀' 때문이다. 일정한 모양의 빵을 계속 구워내는 빵틀처럼 인간관계에는 일정한 틀이 있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를 반복한다. 문제는 이 틀이 어린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틀은 '아이-어른'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일정 시기가 지나면 '어른-어른'의 틀로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관계 손상을 겪은 사람들은 이 틀을 잘 바꾸지 못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에 해결되지 못한 감정과 신념, 애착 갈망 등을 해결하고 싶어 하고, 이로 인해 왜곡되고 불행한 인간관계를 반복한다. 


저자는 몇 년 전부터 '바운더리(boundary)'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관계의 문제와 해법에 접근하고 있다. 바운더리란 인간관계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 자아의 경계이자, 관계의 교류가 일어나는 통로를 말한다. 


스스로 착해서 손해를 보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사실 착한 게 아니라 약한 것이다. 이 사람은 착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스스로 돌보지 못할 만큼 자아가 약해서 인간관계가 힘들다.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선의와 친절을 베풀었는데 타인이 이를 인정해주지 않고 보상해주지 않으면 멋대로 상처를 받고 역으로 화를 낸다. 저자는 이를 '성숙한 착함'과 대비되는 '미숙한 착함'이라고 명명한다. '성숙한 착함'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에게 과도한 친절과 배려를 베풀지 않으며, 친절과 배려에 따른 인정과 보상이 돌아오지 않아도 상처받지 않는다. 


왜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은 많은데 줬다는 사람은 적을까. 저자는 이 또한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불분명한 미성숙한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사람은 누군가와 가까워질수록 상대를 '남'이 아니라 '나의 일부'로 여기는 습성이 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누가 뭐라고 해도 상대는 끝까지 내 편이기를 바라고, 상대가 나처럼 생각하고 내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길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너'는 분리된 개체이며 결코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내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건강하지 못한 애착 관계를 지닌 사람은 상대가 늘 자기만 바라봐 주기를 바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다 헤아려주기를 바란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제멋대로 기대하고 제멋대로 실망한다. 저자는 애착 관계가 문제라고 해서 부모 탓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애착 관계가 백 퍼센트 부모 책임이라는 믿음은 잘못이고, 애착 관계가 한 번 고정되면 영원히 바꿀 수 없다는 믿음 또한 잘못이다. 저자는 일그러진 바운더리의 사례를 살펴보고, 행복한 관계, 건강한 바운더리를 만드는 방법을 제시한다. 최근에 읽은 인간관계 책 중에 가장 알차고 가장 유용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첼 레스닉의 평생유치원 - MIT 미디어랩이 밝혀낸 창의적 학습의 비밀
미첼 레스닉 지음, 최두환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초등학생 중 약 3분의 2는 앞으로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급변하는 환경을 잘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학습하고 준비해야 할까. MIT 미디어랩 레고-페퍼트 석좌교수이자 전 세계 150개국 이상에서 사용되는 코딩 교육 프로그램 '스크래치(scratch)'의 창시자 미첼 레스닉의 책 <미첼 레스닉의 평생유치원>에 그 답이 나온다. 


이 책에 따르면 컴퓨터와 로봇이 기존에 사람이 했던 일을 대체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이는 도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큰 기회이기도 하다. 과거에 사람이 '기계처럼' 수행했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면서, 사람은 상상력과 창의성을 요구하는 분야에 더 많이 집중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많은 교육자들이 학생들의 창의적 능력을 계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육은 창의적 사고나 표현을 증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수행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존 교육과는 다른 방법을 제안한다. '창의적 학습의 4P'라고 부르는 틀, 즉 프로젝트(Project), 열정(Passion), 동료(Peers), 놀이(Play)'가 그것이다. 저자는 학부모와 교육자들이 아이드에게 그들의 열정을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를 친구들과의 협력을 통해 놀이하듯이 수행할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을 설명한다. 저자가 개발한 스크래치 프로그램을 비롯한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을 수행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여러 사람과 협력하여 일하는 방식을 저절로 터득하게끔 도와준다. 


저자는 한국의 학부모와 교육자들이 코딩 교육에 열성적인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강제적이고 획일적인 감이 없지 않다며 염려하는 시선을 보낸다. 코딩 교육은 아이들 스스로 탐험하고 실험하면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지, 아이들이 학부모나 교사의 지시나 명령에 성실하게 따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이 직접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애플리케이션을 제작하는 등의 활동은 모두 아이들 스스로 이뤄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똑똑하고 창의적인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의 잠재력과 창의성을 믿고 묵묵히 지켜봐 줄 어른들이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랫동안 역사를 배웠지만 '역사의 역사'에 관해 생각해본 적은 드물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한국과 외국의 역사 서술을 비교, 대조해본 적은 더더욱 없다. 누군가가 떠먹여주는 역사를 그저 삼키는 데 급급했다. 내가 뭘 삼키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 책은 일종의 '서평집'이다.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사마천, 이븐 할둔, 랑케, 마르크스,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 에드워드 H. 카, 슈펭글러, 토인비, 헌팅턴, 제러드 다이아몬드, 유발 하라리 등 동서고금의 주요 역사가들이 남긴 저작을 저자가 직접 읽고 생각한 바를 적었다. 대한민국에서 학교 교육을 충실히 받은 사람이라면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을 알 것이다. 서양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동양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사마천을 알 것이고, 역사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랑케, 카, 토인비, 정치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헌팅턴, 슈펭글러 등이 익숙할 것이다.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이라면 다이아몬드와 하라리가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이들의 사상을 각각 따로 정리한 책은 많지만, 한 권의 책으로 연표를 만들고 좌표를 그린 경우는 이 책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이 중에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가장 낯선 이름은 단연 이븐 할둔(1332~1406)일 것이다. 이븐 할둔은 문명을 환경의 산물로 간주하고 세계를 일곱 기후대로 나누어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살피면서 인류사를 썼다. 그의 책 <역사서설>은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보다도 앞서 '인류사' 또는 '빅 히스토리(big history)'를 다룬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서설>은 7세기에 탄생한 이슬람 문명과 아랍 사회의 현황 및 특징을 기록한 책으로도 가치가 상당한데, 안타깝게도 지식의 전파를 제한하는 이슬람 세계의 관습으로 인해 19세기 들어서야 외부에 알려지고 번역, 출판되었다.


역사를 배우기도 벅찬데 '역사의 역사'까지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답은 이렇다. "사실은 과거의 것이고 역사가는 현재에 산다. 과거의 사실 가운데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는 기준과 그 사실들을 일정한 관계로 맺어 주는 해석의 관점은 역사가를 둘러싼 현재의 환경, 역사가의 경험, 역사가의 이념과 개인적 기질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다." 먼 미래의 후손이 한국 현대사에 관한 글을 쓴다면 그 내용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변수는 어느 신문이냐는 것이다. 예컨대 <조선일보>인가 <한겨레>인가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은 '위대한 영도자'가 되거나 '방탕한 독재자'가 된다. (231쪽 인용) 


'역사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나아가 인간과 인류를 이해하는 것이다. "14세기 이슬람 문명과 중국 문명은 만나지 않았다. (중략) 그런데도 두 문명의 지식인들은 국가 권력의 존재 의미, 군주와 백성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서 거의 동일한 윤리적 규범을 만들어냈다." (113쪽), "민족주의자든 아나키스트든 마르크스주의자든,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이 쓴 역사를 읽으면 가슴이 아리다. 그들이 살았던 사회적 환경과 오늘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같지 않은데도 이러는 이유가 무엇일까." (213쪽) 지리와 기후도 다르고, 정치 체제와 경제 수준도 다른 나라들이 비슷한 사회 관습과 윤리 규범을 공유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으로 볼 수 있다. 타고난 시공간이 다르고 정치 성향이 다른데도 역사가가 서술한 역사를 읽으면 그들의 심정에 공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 또한 인류의 생래적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자는 후기에 이 책을 가리켜 '잠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인증 사진을 찍는 패키지여행과 비슷하다'라고 썼다. 패키지여행도 가이드의 실력과 내공에 따라 여행의 질이 천차만별인데, 이 책은 가이드가 좋아서 그런지 패키지여행이라도 웬만한 자유여행보다 알차고 흥미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흔에게 (반양장)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 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철모르는 어릴 때는 설날에 떡국 먹고 생일에 케이크 먹는 게 좋아서 한 살 두 살 나이 드는 걸 좋아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떡국도 케이크도 됐고, 더 이상 나이 들지 않게 해주는 약이 있으면 그거나 구해서 먹고 싶은 심정이다. 나처럼 나이 드는 걸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한국에서만 15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는 어떤 조언을 들려줄까. 


기시미 이치로의 신간 <마흔에게>에 따르면, 사람들이 나이 듦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노화를 퇴화 또는 약화로 인식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인생의 목표를 성공으로 보기 때문이다. 노화는 퇴화나 약화가 아니라 변화다. 계절이 봄에서 여름, 가을, 겨울로 바뀌는 것처럼, 사람의 인생도 탄생으로 시작해 노화를 거쳐 죽음으로 끝맺는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 중에 우열이 없듯이, 젊음과 늙음, 탄생과 죽음에도 우열이 없다.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보는 사람들에게 노화는 성공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저자는 이룬 것 없이 늙고만 있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열여덟 살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습니까?"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안다면 모를까, 지금 지닌 지식과 경험을 깡그리 잊고 몸만 젊어진다면 지금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허송세월한 것처럼 보이는 인생도 나름의 지식과 경험을 축적한 가치 있는 인생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자신의 인생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도 말고, 나이 듦을 거부하려고 하지도 말라고 저자는 충고한다. 


저자는 오십 세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큰 수술을 받았고, 아흔이 넘은 아버지를 혼자서 간병한 경험이 있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노화와 병환, 부모의 간병을 겪으며 스스로 깨닫고 터득한 지혜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병으로 쓰러졌을 때 이렇게 아픈 몸으로 가족들을 고생시키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후 지인이 큰 병으로 쓰러졌을 때 걱정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비록 중태에 빠져 의식이 없을지라도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 듦이 덧없고 허무하게 느껴진다면, 어렸을 때 힘들었던 일을 다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저자는 쉰다섯 살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번역하기 시작해 쉰아홉 살에 완성했다. 젊을 때는 먹고사는 게 바빠서, 그리스어 실력이 짧아서, 인생 경험이 부족해서 끝까지 번역하지 못하고 도중에 포기했는데, 오십이 넘은 지금은 연구 실적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리스어를 공부할 시간도 넉넉하고, 인생 경험도 풍부해서 아주 즐겁고 여유롭게 번역에 매진할 수 있었다. 저자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입원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저자의 낭독으로) 읽었다. 나이 듦을 걱정할 시간에 살아있음을 만끽하라는 저자의 메시지가, 아직 마흔이 되지 않은 나에게도 간절하게 다가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토록 두려운 사랑 - 연애 불능 시대, 더 나은 사랑을 위한 젠더와 섹슈얼리티 공부
김신현경 지음, 줌마네 기획 / 반비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 한 해 동안 좋은 책을 많이 만났지만 이 책만큼 좋은 책을 만나지는 못했다. 내 깜냥으로는 감히 평가할 수도 없고 마땅한 찬사의 말을 찾을 수도 없어서 여러 번 글을 썼다가 지웠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시청하면서, 웹툰 <치즈 인 더 트랩>을 보면서, 아이유의 노래 <좋은 날>을 들으면서 즐기면서도 어딘가 불쾌하고 불편했던 이유에 대해 이 책만큼 속 시원한 해설을 만나지 못했다. 그것들이 왜 불쾌하고 무엇이 불편한지,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라는 차원으로 설명하는 책을 읽은 것도 이 책이 처음이다. 


이 책을 쓴 김신현경은 이화여대에서 여성학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는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동아시아대학원에서 박사후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여성학자다. 여성학이 다루는 이슈 중에서도 연애와 사랑, 젠더와 대중문화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대중문화 분석을 통해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있기는 한지) 모색한다. 


1997년에 개봉한 영화 <접속>은 남녀 간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가족 관계에 주목하지 않고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서 끝나지도 않은, 당시로서는 참신하고 획기적인 작품이다. 반면 2012년부터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는 여자 주인공의 가족 관계가 시종일관 높은 비중으로 다뤄지며, 여자 주인공이 누구와 연애를 하고 누구와 결혼을 하는지가 곧 드라마의 줄거리이자 결말이다. 저자는 이러한 '퇴보'가 외환위기 이후 가속화된 한국 페미니즘의 위기 및 한국 여성의 지위 하락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대학생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 <논스톱> 시리즈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2010년부터 연재된 웹툰 <치즈 인 더 트랩>을 보고 놀랄 것이다. 대학이 몇 안 되는 취업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전쟁터로 바뀐 요즘 같은 시대에 연애나 사랑은 언감생심일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 하면 경력과 평판을 망칠 수 있는 리스크 요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험하지만 도움이 되는' 남자 주인공 유정과 사귀는 여자 주인공 홍설의 심정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생존과 욕망 간의 딜레마(남자 없이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하지만 남자 없이 살고 싶지 않다)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아이유의 <좋은 날>은 '삼촌팬'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기념비적인(?) 노래다. 저자에 따르면 삼촌팬은 "걸그룹에 대해 '오빠'이고 싶어 하는, 즉 걸그룹을 성적 대상으로 욕망하는 데 대한 사회적 비난을 잠재우려는 시도를 반영"하는 용어다. 이들은 스스로를 이전 세대와 달리 기성세대가 되어도 새로운 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할 줄 아는 개방적인 가치관의 소유자로 여기지만, 이들이 삼촌팬으로서 걸그룹을 대하는 방식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고 소유물 취급하는 (그토록 이들이 구별되고 싶어 하는) 이전 세대의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열광한 영화, 드라마, 웹툰, 소설 등을 통해 저자는 1987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페미니즘이 어떻게 변화하고 한국인의 연애와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조리 있게 서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드라마 <밀회>를 예로 드는데 그 설명 또한 무척이나 흥미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