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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지 않는 사람들 - 감시, 조종, 거짓에 맞서 싸운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영웅들
매슈 대니얼스 지음, 최이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19년 11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9/1222/pimg_7796361642393468.jpg)
요즘 나는 유튜브로 스탠드업 코미디언 트레버 노아(Trevor Noah)의 영상을 즐겨본다. 트레버 노아는 198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 슬하에서 태어났다. 트레버 노아가 태어났을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실시되고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백인과 흑인을 철저히 분리하는 정책으로, 백인과 흑인이 같은 직장에 다니는 것도 금지되고 같은 버스에 타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 시대에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의 피가 섞인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은 그 자체로 범죄였다.
1991년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기 전까지 트레버 노아는 집 밖에 나갈 수 없었다. 밖에 나갔다가 백인 경찰의 눈에 띄면 그의 아버지는 벌금형, 그의 어머니는 징역형을 받고, 그 자신은 고아원에 보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트레버 노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스탠드업 코미디로 구성해 유튜브에 올렸다. 영상이 퍼지면서 나를 비롯한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슬픈 역사와 아파르트헤이트가 빚은 참상의 단면을 알게 되었다. 트레버 노아처럼 최신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알리고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촉구하는 사람이 여기 또 있다.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을 쓴 미국의 인권 운동가 매슈 대니얼스이다.
매슈 대니얼스는 미국 뉴욕의 스패니시 할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뉴욕 하면 떠오르는 화려하고 부유한 이미지와 달리, 대니얼스가 성장한 스페니시 할렘 지역은 범죄가 빈번하고 빈곤한 사람이 흔했다. 대니얼스 또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가 퇴근길에 괴한으로부터 공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고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대니얼스 자신이 괴한에게 공격을 받고 돈이나 물건을 빼앗긴 적도 많다.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대니얼스는 자신처럼 범죄나 재난 같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더는 생겨나지 않도록 방지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대니얼스는 현재 디지털 미디어로 보편적 인권을 증진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인권 네트워크(HRN)'을 설립해 활동 중이다.
이 책에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폭력과 차별에 대항하고 인권 신장에 기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이 기여한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문제 해결을 위해 새로운 미디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제 해결을 위해 기존 미디어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식에는 케냐 부정 선거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케냐의 사회사업가들이 만든 정보 공유 플랫폼 '우샤히디', 미국의 비영리단체 익스체인지 이니셔티브가 아동 성매매를 알선하는 광고가 붙은 호텔 방의 사진을 올리면 바로 수사기관에 접수되도록 만든 '트래픽캠' 앱, 아일랜드의 비영리 사회적 기업 푸드 클라우드가 음식이 남는 기업과 음식이 부족한 지역의 자선단체 및 커뮤니티 그룹이 연결되도록 만든 '푸드 클라우드' 앱, 이슬람교를 믿는 차드의 여성들이 남성의 허락을 받거나 남성과 대면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상업 활동과 금융 거래를 하도록 만든 밀리컴 모바일 금융 서비스 등이 포함된다.
첫 번째 방식을 택한 이들은 대체로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낼 인력과 자본을 갖춘 기업 또는 사회단체다. 비영리단체가 경제적 이익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낸 사례도 흥미롭지만, 밀리컴 모바일 금융 서비스처럼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 경제적 이익을 얻으면서 동시에 이슬람 국가 내 여성 인권 향상에 기여하는 서비스를 만들어낸 사례가 특히 인상적이다. 이익 추구와 사회 공헌을 동시에 추구하기는 어렵다고 믿는 기업들이 이러한 사례를 눈여겨 보고 귀감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두 번째 방식에는 인도의 기업가 카티크 나랄라세티가 10억 명이 넘는 페이스북 가입자의 혈액형을 활용해 만든 세계 최대 규모의 페이스북 혈액은행을 만든 것, 미국의 아홉 살 소녀 레이철 벡위트가 마실 물이 부족해 고생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동영상을 비메오(vimeo)에 업로드하고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모금활동을 벌인 것, 사우디아라비아의 마날 알 샤리프가 여성에게 운전을 허용하지 않는 정부 방침에 항의하는 뜻으로 자신의 운전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것, 이란의 열여덟 살 소녀 마에데 호자브리가 히잡을 쓰지 않고 춤추는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호자브리를 지지하는 해시태그 운동을 촉발한 것 등이 포함된다.
두 번째 방식을 택한 이들은 대체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낼 만한 인력이나 자본을 갖추지 못한 개인이다. 이 중에 여성, 어린이 같은 비주류, 소수자가 많은 것이 눈에 띈다. 기득권을 가진 주류, 다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정부와 기성 언론이라면, 기득권을 가지지 못한 비주류, 소수자의 목소리까지 담아내는 것이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다. 이들은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해 전 세계 규모의 관심과 지지가 필요한 문제, 당장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 정부의 탄압을 받는 문제, 기성 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문제에 관해 직접 발언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놀라운 전파력을 이용해 단기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지지자를 결집하고, 자국 언론의 주목을 이끌어내고, 자국 정부의 방침을 바꿨다. 새로운 미디어의 영향력이 확대될수록 뉴미디어를 이용해 변화를 만들어낸 사례가 점점 많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저자는 북한의 인권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책에는 2016년 탈북한 태영호 전 주영 북한 대사관 공사의 사례가 자세히 나온다. 태영호 전 공사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에게는 인권과 자유, 독재와 탄압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 그러니 북한 주민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유세계의 기본적인 개념들부터 깨닫게 해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미국과 캐나다 소재의 북한 인권 단체에서는 '자유를 위한 플래시 드라이브'라는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다. 사용하지 않는 USB를 기증하면 북한 주민들에게 북한 밖의 생활을 알려주는 정보를 담아서 드론이나 열기구, 물병 등을 통해 전달한다는 아이디어다.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운동 그리고 그 둘을 제대로 표현하고 실현하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인간의 사회적, 경제적 잠재력을 발휘하게 한다. 그러므로 디지털 인권 운동은 모든 사람의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293쪽)
이제까지 디지털 미디어가 힘없는 사람들이 언론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해왔는데, 이 책을 통해 실제로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뤄낸 사람들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문제는 폭력과 차별, 혐오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람들 또한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 힘을 모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미디어라는 간단하고 효과적인 '무기'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결국 개인의 판단과 선택에 달려 있다는 저자의 충고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