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 그들이 진보에 투표하지 않는 이유
데이비드 굿하트 지음, 김경락 옮김 / 원더박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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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둘 있었다. 하나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가결이다. 두 사건 모두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일어난 일이었기에 여파가 대단했다.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이는 '이례적', '일탈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영국의 정치 평론가 데이비드 굿하트의 책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나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가결이나 엘리트 중심 사회에서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이 일으킨 지극히 당연하고 필연적인 변화다.


이 책은 주로 영국의 중하층 노동자들이 왜 브렉시트를 지지하고 나섰는지에 관해 분석한다. 저자는 사람들을 '애니웨어' 또는 '섬웨어'로 구분한다. '애니웨어'는 대체로 도시에 사는 고학력, 고소득, 화이트칼라, 중산층 이상의 사람을 일컫는다. 이들은 이동성이 높고 성취욕이 강하며 외국인이 낯설지 않으며 타문화에 개방적이다. '섬웨어'는 대체로 지방에 사는 저학력, 저소득, 블루칼라, 중하층 이하의 사람을 일컫는다. 이들은 이동성이 낮고 외국인에 배타적이며 전통문화를 고수한다.


저자는 한때 '애니웨어'였으나 현재는 강력한 '섬웨어' 지지자다. 그가 이렇게 '변절'한 건 자유주의 성향의 애니웨어가 가진 이민에 대한 사고방식이 영국의 일반 시민들의 실제 생활 및 가치관과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애니웨어는 스스로를 세계 시민이라고 생각하며 내국인과 외국인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민에 대해서도 개방적이며 취업 시 내국인과 외국인을 차별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여긴다. 반면 섬웨어가 대부분인 일반 시민들은 스스로를 세계 시민이라고 느끼기보다는 국민, 영국인이라고 느낀다. 이들은 내국인과 외국인 차별을 당연시하며 취업 시 외국인과 경쟁하는 상황이 달갑지 않다.


저자는 외국인, 이민자에게 쏠려 있는 관심을 내국인, 중하층에게 돌릴 것을 촉구한다. 그중 눈에 띄는 주장은 계층 이동 논의의 핵심을 대학에서 일자리로 바꾸자는 것이다. 과거에는 좋은 대학에 입학하면 자동적으로 계층 이동이 진행될 것으로 믿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좋은 대학을 나와도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렇다면 차라리 대학보다 일자리에 지원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취업을 하거나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직업 학교, 기술 학교에 지원할 때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는 식이다. 소득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현재, 대다수의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계층 이동보다도 생활 안정, 생계유지다. 이를 위한 지원책도 보다 강화되어야 한다.


저자는 뛰어난 성취만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것도 좋지만, 그 용 하나 잘 되게 하려고 개천의 다른 물고기들이 희생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백만장자(millionaire) 한 사람 나는 것도 좋지만, 열 명이 1억을 더 벌면 더 좋고, 백 명이 천만 원을 더 벌면 더 더 좋고, 천 명이 백만 원씩 더 벌면 더 더 더 좋지 않을까. 영국에선 저자를 가리켜 '변절한 좌파'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는데 주장의 핵심은 여전히 '좌파적'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입장을 보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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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여행자를 위한 파리x역사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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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일본 삿포로에 다녀왔다. 어머니와 함께 패키지여행 상품을 예약해 다녀왔는데, 자유여행에 익숙한 나로서는 패키지여행을 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가이드가 알아서 호텔과 교통편 예약도 해주고 해당 여행지의 역사와 지리, 문화에 대한 설명도 해주니 따로 뭘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여행이 끝난 후 여행지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것이다. 자유여행을 할 때는 뭐든 스스로 준비하고 공부하다 보니 여행지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는다. 반면 패키지여행을 할 때는 뭐든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니 결과적으로 뇌리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패키지여행이 잘 맞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자유여행이 더 잘 맞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언젠가 파리 여행을 한다면 무조건 이 책을 읽고 갈 생각이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주경철의 책 <도시여행자를 위한 파리X역사>이다. <도시여행자를 위한 파리X역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서양사학자인 저자의 이전 책들과 약간 결이 다르다. 이제까지 펴낸 책들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를 소개하는 형식의 책이었다면, <도시여행자를 위한 파리X역사>는 파리의 지리, 지형적 특성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역사를 개괄하고 유럽사, 세계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고찰한다. 각 장마다 각 장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관광지가 표시된 지도가 실려 있어서 조만간 파리를 찾을 계획인 여행자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시테섬, 마레 지구, 라탱 지구,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몽마르트르 언덕 등 파리 하면 떠오르는 장소들의 역사와 문화도 자세히 나온다.


1부에는 고대부터 백년전쟁 시기까지, 2부에는 종교전쟁 시기부터 루이 14세 시대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3부에는 프랑스 혁명부터 나폴레옹 1세 시대까지, 4부에는 파리 코뮌부터 현재까지의 주요 사건들이 나온다. 파리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떠돌며 살았던 흔적이 있고, 신석기 시대에는 아예 정착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파리를 좌안과 우안으로 가르는 센강은 예부터 수많은 물자를 나르며 파리의 성장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파리는 중세까지도 프랑스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 정도의 위상을 가지다가 필리프 2세 시대부터 압도적인 발전을 이뤘다. 13세기에 이르러서야 파리가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고, 상업이 발전하고 인구가 크게 늘면서 프랑스 혁명의 씨앗이 되는 시민 문화가 융성했다.


프랑스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건 18세기의 일이다. 시민 사회가 발달하고 연극과 오페라가 유행하면서 카페가 생겨났고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 늘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빵인 바게트가 유행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파리시에서는 매년 최고 바게트 선발대회를 개최하며, 1등을 수상한 바게트는 대통령궁에 납품된다. 볼테르, 쇼팽, 콜레트, 마리 퀴리, 알베르 카뮈 등의 이야기도 나온다. 저자가 젊은 시절 유학생으로서 파리를 찾았을 때와 몇 해 전 안식년을 맞아 파리에서 생활했을 때의 경험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대목도 있다. 파리에 가본 적 없는 사람에게도 파리에 관한 수많은 정보와 다양한 시각을 전해주는 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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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 욕망과 결핍, 상처와 치유에 관한 불륜의 심리학
에스터 페렐 지음, 김하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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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중 세 쌍 중 한 쌍이 이혼하는 시대다. 가장 많은 이혼 사유는 아마 외도가 아닐까. 에스터 페렐의 책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은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주제 중 하나인 외도, 불륜에 대해 다룬다. 심리치료사인 저자는 상담실에서 수많은 부부, 커플을 만났다. 이들 중 대부분이 외도로 인해 고통받고 힘들어했다. 저자는 이들을 보면서 외도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인식했다. 외도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의와 충실, 욕망과 갈망, 질투와 소유욕, 고백과 용서 등이 얽힌 복잡한 문제라는 생각에 이 책을 썼다.


애초에 외도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도에 반대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외도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사람마다 외도의 경계에 대한 정의도 다르다. 한 직장에 다니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둘 다 배우자가 있다. 두 사람은 수십 년 동안 매일 단둘이 점심을 먹는다. 이것은 불륜인가 아닌가. 남자는 아니라고 하지만 남자의 아내는 생각이 다르다.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외도의 경계가 더 모호해지는 추세다. 남편이 음란한 사진을 휴대폰에 저장하면 외도인가. 아내가 데이팅 앱에 가입하면 외도인가. 사람마다 각자 정의할 순 있어도 그 정의를 통일하기는 어렵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외도의 양상도 달라진다. 과거에는 결혼이 경제적 합의 또는 가문 간의 결합이었다. 그래서 배우자를 더는 사랑하지 않아도, 부부 중 한 사람이(혹은 둘 다) 외도를 해도 결혼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에는 결혼이 낭만적 합의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평생 사랑할 것을 약속하는 행위가 결혼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서 외도는 가장 강력한 이혼 사유가 되었다.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배우자의 외도 혹은 불륜에 실망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고, 그만큼 이혼의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늘어나는 기대 수명 역시 외도 혹은 불륜의 가능성을 높인다. 어쩌면 평생 한 사람만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약속부터가 무모하고 허황된 것일지도 모른다. 책에는 남편이 죽은 후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여자의 사연이 나온다. 완벽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결혼 생활 전체가 거짓이고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충격적일까. 애초에 인간은 왜 영원한 사랑을 꿈꿀까.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고 약속할까. 비혼인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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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12-24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치님, 2019년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 불평등과 고립을 넘어서는 연결망의 힘
에릭 클라이넨버그 지음, 서종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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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인 저자가 도시에 관심을 가진 건 개인적인 경험 덕분이다. 시카고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자는 1995년 7월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시카고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시카고에 기록적인 폭염이 덮쳐서 시카고 주민 739명이 사망했다. 저자는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도 이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고, 결국 전공 주제를 자연재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으로 바꿨다. 그 결과물이 저자의 전작인 <폭염사회>다. <폭염사회>의 후속편 격인 이 책은 폭염을 비롯한 자연재해가 각 개인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한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도시 내에서도 어떠한 차이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늘리거나 줄이는지 설명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람들이 교류하는 방식을 결정짓는 물리적 공간 또는 조직이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줄이거나 막을 수 있다. 저자는 이를 사회적 인프라스트럭처, 줄여서 '사회적 인프라'라고 부른다.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피해가 심한 곳은 대체로 사회적 인프라가 튼튼하지 않았다. 이웃 간에 교류가 없어서 옆 집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반면 피해가 심하지 않았던 곳은 대체로 사회적 인프라가 튼튼했다. 이웃 간에 교류가 활발하고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 다 알아서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신속한 구조 활동이 펼쳐졌다. 


이러한 분위기가 단순히 개인의 성격이나 공동체의 문화, 풍습 같은 비물질적 요소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공공시설, 즉 도서관, 학교, 놀이터, 공원, 체육 시설, 수영장 등의 사회적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져야 해당 지역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고 어울리면서 공동체의 문화와 풍습을 형성한다고 설명한다. 책에는 공공시설을 이용해 지역 사회의 범죄율을 낮추고 지역민의 문제를 해결한 사례가 다수 나온다. 버려진 건물들을 관리만 잘 해도 폭력 사건이 줄어든다. 카페나 녹지가 많을수록 범죄율이 낮아진다. 도서관에서 소규모 학습 공동체를 운영하거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높아지고 평생 교육률도 높아진다. 공동체 텃밭 또는 농장을 운영하면 지역민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저자의 설명을 읽다 보니 몇 년 전에 읽은 <수영하는 여자들>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런던의 공공 수영장 '리도'에서 수영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인데, 나이도 다르고 직업도 다른 여성들이 같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면서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렸다. 저자의 조사와 연구에 따르면 세계 여러 나라에 비슷한 기능을 하는 다양한 시설이 있다. 중국인들은 이른 아침 도시 곳곳에 있는 광장에 모여 체조를 하거나 춤을 추면서 건강도 챙기고 친목을 다진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마을마다 있는 지열 온천장에 모여 함께 온천을 하면서 이웃 간에 친교 활동을 한다. 한국에는 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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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보수 가짜 보수 - 정치 혐오 시대, 보수의 품격을 다시 세우는 길
송희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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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정치 용어의 뜻을 잘 모른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공산주의인 줄 아는 사람도 많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혼동하는 사람도 많다. 보수와 진보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보수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사용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애초에 한국에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가 있기는 할까. 궁금하던 차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보수 언론의 주필을 지낸 송희영의 책 <진짜 보수 가짜 보수>를 읽게 되었다. 책에서 저자는 기득권 세력에서 혐오 세력으로 몰락한 대한민국 보수의 역사와 한계를 분석하고 개선해야 할 점을 지적한다.


보수주의는 프랑스에서 처음 탄생한 개념이다. 보수주의는 과거의 역사와 전통, 관행, 경험을 중시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진보주의는 미래와 혁신, 도전, 창의를 중시한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일종의 태도이자 라이프스타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라도 진보 정당을 지지할 수 있고, 진보주의자라도 보수 정당을 지지할 수 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수 정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지지하고, 진보 정당은 사회 민주주의와 복지 경제를 지지한다. 한국의 경우 보수 정당과 진보 정당 모두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지지한다. 보수 정당이라고 해서 복지 제도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한국에서 보수 정당과 진보 정당의 차이는 '코카 콜라'와 '펩시 콜라'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미미하다면 현재의 보수는 어쩌다 이렇게 몰락한 걸까. 저자는 한국에서 보수가 몰락한 것이 아니라 보수 세력이, 정확히는 2세대 보수 세력이 몰락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1세대 보수 세력은 IMF 외환 위기로 무너졌고, 2세대 보수 세력은 국정 농단 사태로 무너졌다. 저자는 2세대 보수 세력에 치명상을 입힌 '가짜 보수의 5적'으로 국정원, 검찰, 친박, 재벌, 관료를 든다. 저자는 한국의 보수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가짜 보수의 5적이 벌인 악행을 반성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들 5적 중에 가장 눈길이 가는 집단은 단연 검찰이다. 저자는 현재의 검찰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검찰은 기관 특성상 권력 핵심층의 비위나 불법 같은 약점을 자세히 알고 있다. 과거 검찰은 이러한 특성을 이용해 '정권의 사냥개'로서 '정치 보복 대행업'을 수행하며 무한한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검찰 권력이 축소될 위기에 처하자 검찰이 정권을 향해 칼끝을 겨누고 있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검찰이 정권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대로 가면 다음 대통령은 검찰이 지명할지 모른다. 그들은 누구든 후보 단계에서 걸러낼 수 있다." (97쪽)

그렇다면 앞으로 보수가 지향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저자는 '국가 보수주의'가 아닌 '국민 보수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보수주의는 원래 가족, 회사, 단체, 국가라는 공동체를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절대 나 혼자 배불리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뜻이 아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이제까지 보수주의자가 여성, 장애인, 이민자, 성소수자 등의 약자, 소수자를 분리하고 배척하면서 기득권을 얻었다면, 앞으로의 보수주의자는 약자, 소수자를 포용하고 그들과 공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저자의 조언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다.

저자는 보수를 자처하는 '입 보수', '글 보수, '생활 보수, '기독교 보수'가 수백만 명에 달해도 보수의 핵심에서 두뇌 기능을 할 만한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음을 지적한다. 또 남의 돈으로 보수주의를 한다는 사람을 많아도 자기 돈으로 보수주의를 한다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도 꼬집는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보수 언론의 주필을 지낸 저자가 의외로 솔직하게 한국 보수의 실책을 인정하며 가차 없이 비판해서 놀라웠다. 현재 한국의 보수 세력이 이런 고민을 하면서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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