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이 깨어나는 마을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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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 볼턴. 정세랑 작가의 추천으로 알게 된 작가로 기억한다. 국내에 출간된 샤론 볼턴의 책은 총 3권인데, 그중에 <희생양의 섬>을 먼저 읽었고 이번에 <뱀이 깨어나는 마을>을 읽었다. <희생양의 섬>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뱀이 깨어나는 마을>이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재미있었다. 주인공의 직업이 형사나 탐정이 아니라 수의사라서 동물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이야기 전개도 추리 소설이나 미스터리 소설의 전형적인 전개로부터 약간 벗어나 있어서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영국의 한 시골 마을에서 수의사로 일하는 클래라 베닝은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이웃에 사는 여성으로, 아기 침대에서 자고 있는 딸의 침대 위에 독사로 보이는 뱀 한 마리가 나타났다는 제보였다. 서둘러 달려간 클래라는 무사히 뱀을 구출하고 아기를 구하는데, 그날 하루 동안 뱀과 관련된 비슷한 사건이 잇달아 일어난다. 날씨가 더워져서 뱀이 많이 출몰한 것 같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하지만, 수의사이기 이전에 파충류 전공자이기도 한 클래라는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보기 힘든 종류의 뱀이 나온 걸 보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대량의 뱀을 푼 것 같다고 의심한다. 


이 소설은 여러 장르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먼저 이 소설은 평범한 수의사가 뱀 때문에 피해를 입은 환자의 수가 갑자기 늘어난 것에 의문을 품고 스스로 탐정이 되어 범인을 찾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코지 미스터리'로 분류될 만하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낡은 저택이 중요한 장소로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고딕 미스터리'로 분류될 수 있다. 얼굴의 화상 때문에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어 온 주인공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성장 서사의 요소도 있고,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두 명의 남성과 '썸'을 탄다는 점에서 로맨스 서사의 요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에서 종교적인 면이 흥미로웠다. 뱀은 구약 성경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물로,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보통 악마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어떤 교파에서는 성서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영적인 깨달음, 혹은 지식을 상징한다고 보고 뱀을 선악과 나무의 수호자, 지식의 수호자, 이해와 계몽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했다(426쪽 참조). 뱀을 사악하게 여기는 건 유대교와 기독교가 지배하는 서구 문명뿐이고, 다른 문화권, 이를테면 힌두, 그리스, 노르웨이,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에서는 뱀이 지혜와 불멸, 생명과 다산, 지식을 나타낸다는 내용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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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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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채식주의자>, <몽고 반점>, <나무 불꽃>으로 연결되는 연작이다. <채식주의자>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다 채식주의자가 된 아내 영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 <몽고 반점>은 처제의 엉덩이에 남은 몽고반점을 소재로 예술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 형부, <나무 불꽃>은 남편과 불륜을 벌인 여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언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언뜻 보기엔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 여자 영혜가 모든 일의 발단이자 원흉으로 보인다. 육식을 거부할 뿐 아니라 사람들 몸에서 나는 고기 냄새, 피 냄새에도 진저리를 치는 영혜가 지나치게 별나고 예민해 보인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수록 영혜는 모든 일의 발단이 아니라 결과이며, 오히려 영혜 주변의 피해자처럼 보이는 인간들이야말로 발단이지 싶다. 다 큰 딸을 자기 소유물처럼 취급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말리지 않는 어머니, 아내를 살림하고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도구로만 여기는 남편, 처제를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형부, 그걸 알면서도 눈 감는 언니까지. 영혜 주변의 인간들은 죄다 착하고 말 잘 듣는 영혜를 잡아먹으려 드는 포식자들이다.

남들이 살점을 달라 하면 살점을 내주고, 뜯어 먹으려 하면 몸뚱이마저 내주던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자기는 도무지 그들처럼 남의 살점을 뜯어먹을 수 없음을, 초식동물에서 육식동물로는 도저히 변할 수 없음을 깨달았으니 차라리 풀꽃이 될 수밖에. 형부가 자기 몸에 물감으로 꽃을 그려주었을 때 비로소 제 몸 같고 악몽 없이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는 영혜의 말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소설은 주로 남편, 아버지, 형부라는 남성들을 포식자로 그린다는 점에서 남성과 여성 간의 권력의 불평등을 그린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딸, 형부와 처제는 표면상 다른 관계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주체가 각각 남자와 여자인 이상 권력의 불평등이 발생하고 계급이 나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권력은 주로 남성에게 주어지고 계급 또한 남성이 우위다. 영혜는 아내일 때나 딸일 때나 처제일 때나 앞에 있는 남자에게 성적 대상, 자기 우월감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만 착취되었다.

그걸 자각한 영혜가 똑같이 포식자가 되거나 알면서도 당하는 피식자로 남지 않고 그 모든 걸 초월한 꽃이나 풀이 되길 택했다는 점, 그걸 처음으로 알아준 사람이 같은 피식자였던 언니라는 점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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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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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문학이라면 나름 많이 읽은 편이라고 자부해 왔다. 그러다 얼마 전 인터넷 서점에서 폴 윤의 소설 <벌집과 꿀>의 소개 글을 읽고 나의 오만과 편견을 깨달았다. 오만은 그저 디아스포라 문제에 관심이 약간 있어서 자주 거론되는 책 몇 권을 읽은 걸 가지고 많이 읽었다고 과장해서 생각한 것이고, 편견은 디아스포라의 범위를 너무 좁게 생각한 것이다. 디아스포라가 원래 기독교에서 비롯된 개념이고, 내가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처음 배운 게 서경식 선생의 저서 <디아스포라 기행>이기도 해서, 나는 그동안 디아스포라를 유대인이나 재일조선인 문제에 한정해 생각했다. 그런데 <벌집과 꿀>에 따르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자신이 원래 살았던 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다시 일궈야 했던 사람들은 그들만이 아니다.


이 책의 초반에 실린 몇 작품은 내가 그동안 읽은 이민자, 이방인 소설의 결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지 십여 년이 넘었지만 장물 운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감옥 신세를 지고 이제는 또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할 처지에 놓인 남성 '보'의 이야기를 그린 <보선>이 그렇고, 목숨을 걸고 북한에서 탈출해 서울에 도착했지만 자리를 잡는 데 실패하고 독일 함부르크를 거쳐 현재는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며 근근이 살고 있는 여성 '주연'의 이야기를 그린 <코마로프>, 북한 출신 아버지와 남한 출신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나 평생을 영국에서 살았지만 영국인들에게 늘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 그들 또한 영국인보다 그들과 피부색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해리'와 '그레이스'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크로머>가 그렇다. 이 단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적, 정치적 특수성보다는 이민자 또는 이민 2세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사회적, 정신적 고충이 두드러지며, 등장 인물의 배경을 다른 나라로 바꿔도 내용이 성립되지 않는 정도는 아니다.


반면 그 외의 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정치적 특수성이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진다. 임진왜란 직후의 일본이 배경인 단편 <역참에서>가 대표적이다. 이 소설에는 임진왜란 중에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 소년 '유미'가 등장한다. 활쏘기를 잘해서 주군의 마음에 들었으나 조선통신사 사절단을 따라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처지에 놓인 그의 운명은 조선과 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오랜 역사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다. <벌집과 꿀>, <고려인> 역시 한국과 러시아, 그중에서도 연해주의 역사를 알아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고려인>은 고려인 3세인 '막심'이 사할린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역사가 일제 강점기 때 사할린으로 끌려간 강제 징용 노동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마지막에 실린 <달의 골짜기>는 일견 디아스포라 문학으로 분류되기 어려운 작품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한국 전쟁이 끝나고 휴전선 근처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간 '동수'라는 남자가 몇 년을 은둔하며 지내다 '은혜'와 '운식'이라는 두 아이와 함께 살게 되면서 벌어진 일을 그린다. 전쟁 때문에 집을 떠났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디아스포라 문학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가 돌아온 고향은 예전의 고향이 아니고 그가 살게 된 집은 그가 그리워한 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집을 떠나 있는 상태인 것과 다름이 없다. 은혜와 운식 또한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집을 떠나 한 명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한 명은 돌아오지만 그때의 집은 예전의 집과 다르다는 점에서 이방인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방인의 운명이란 뭘까. 이 책에 나오는 '떠난 사람들' 중에는 떠나온 곳을 그리워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보선>의 보는 오래 전에 떠나온 한국은 물론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던 뉴욕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코마로프>의 주연은 북에서 나올 때 헤어진 아들은 그리워 하지만 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다. <고려인>의 막심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예정이 없음은 막심이 아버지와 헤어진 후 막심을 스칠 뻔하며 달려 지나가는 '시커먼 차 한 대'와 요란한 경보기 소리가 암시한다. 결국 이들은 원해서 떠났든 원치 않게 떠났든 간에 한 번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갈 마음은 없다. <달의 골짜기>의 동수가 아프게 확인한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나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변하고 장소 자체도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장소는 예전과 다르게 변해서 돌아가도 돌아간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주는 반면, 어떤 장소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아서 돌아갈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가령 <달의 골짜기>에서 은혜가 도시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가서 느끼는 '낯섦'은 그곳이 전과 다르게 변해서 느끼는 생경함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데에서 오는 불쾌감에 가깝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거나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고려인>의 막심의 아버지, 바실리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거 아니? 그자들이 하는 일이라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세상은 달라지는데, 그리고 언제나 달라질 텐데, 그자들은 언제나 똑같은 거야. 왜 그런지 아니? 고집 센 바보들이니까." (239쪽)


회귀는 퇴보이며 정주(定住)보다 이주를 택하는 삶이 현명하다는 생각은 <역참에서>에서 히로코가 유미에게 하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내가 뭘 봤는지 알아, 유미? 그 해골 입에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있었어. 어린 벚나무였어. 신기하지 않니? 우린 이 생을 살다가 또 다른 무언가가 되는 거야. 네 생각도 그렇지 않니? 너는 이 생을 살았지만, 내일이면 금방 또 다른 누군가와 살게 될 거잖아. 그런 변화를 두려워해선 안 되는 거야. 그걸 받아들이고 더 강해져야 돼." (96-7쪽) 이런 문장들은 막연한 생각으로 이방인의 삶을 동정했던 과거를 반성하게 한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불화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자발적으로 떠나기 보다는 비자발적으로(사실은 자발적으로) 체념하고 타협하는 편을 택하며 살아온 삶이 과연 맞는 건지 자문하게 만든다. 물리적으로 떠나지 않아도 자신의 삶에서 변화를 택한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라면, 나는 여태 이방인이 되지 못했구나. 떠나야겠다. 아니,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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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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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쿳시.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작품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두 번 놀랐는데, 한 번은 이른바 '고전'으로 분류되는 책인데도 의외로 술술 읽혀서 놀랐고, 다른 한 번은 문장이 쉽고 내용이 자극적인 소설 대부분이 문제의식이 부족하고 사유나 통찰이 얕은 데 반해 이 소설은 문장이 쉽고 내용이 자극적인데도 문제의식이 뚜렷하고 사유와 통찰이 깊어서 놀랐다. 존 쿳시가 한 작가에게 두 번 수여하지 않는다는 전례를 깨고 사상 최초 두 번째 부커상을 수상하고(1983년, 1999년), 2003년에는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이유를 알 것 같다. ​ 


소설은 한 중년 남성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52세 대학교수인 데이비드 루리는 두 번 이혼하고 현재는 독신이다.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고 있는 그는 자신의 딸보다도 어린 제자와 잠자리를 가진 것이 알려지면서 대학은 물론 학계에서도 문제 인물로 낙인이 찍히고, 갈 곳이 없어진 그는 시골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딸 루시의 집에서 한동안 신세를 지기로 한다. 처음에 그는 딸의 집에서 지내며 그동안 구상만 했던 오페라 극본을 완성해 화려하게 재기할 계획을 세우는데, 딸의 농장에 강도가 침입해 그의 차를 훔치고 딸을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의 삶은 점점 그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 


루리 자신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소설에 그려진 루리라는 인간은 결코 좋은 인간으로 보기 어렵다. 소설 초반에 그는 성매매를 일삼고, 딸보다도 어린 제자에게 잠자리를 강요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자신의 죄를 가린다.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키고 딸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루시의 성 정체성(레즈비언)을 못마땅해하고, 루시와 가깝게 지내는 여성들의 외모를 평가하고 그들 중 한 명과 잠자리를 가진다. 루리는 여성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여성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대상화하며 착취하는 여성 혐오자에 가깝다. ​ 


루리가 이런 인간이라서 처음에는 소설을 읽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소설을 계속 읽으면서 루리보다 더 이상한 인간을 발견했다. 바로 루시다. 루리가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인 루시는 이십 대 중반에 도시를 떠나 시골에 정착해 혼자서 농장을 경영하면서 살고 있다. 루리는 젊은 여성인 루시가 혼자서 시골에 살면서 농장을 경영한다는 게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너무 일찍 노후의 삶을 택한 것 같기도 해서 불만스럽지만, 일단은 딸의 인생이므로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러나 문제의 강도&강간 사건 이후 아버지로서 더는 딸의 선택을 방관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루리는 더 나쁜 일을 당하기 전에 도시로 돌아가자고 루시를 설득한다. ​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고, 이번 만은 루리가 옳은 말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설득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내 생각과 달리 루시는 농장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고수한다(심지어 더욱 문제적인 선택을 하는데 이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으니 생략한다). 대체 왜 그러느냐는 루리의 물음에 루시는 여기서 도망치면 자신은 영원히 도망 다니는 삶을 살게 되는 거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어차피 다른 도시나 나라로 가봤자 여자의 삶은 거기서 거기라는 의미에선 공감하지만, 그래도 루시가 사는 동네는 치안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은 거 아닌지... 거기는 남자도 살기 힘든 동네잖아요... ​ 


결과적으로 루리는 루시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실패하고, 원래 하려고 했던 오페라 극본 작업에도 몰두하지 못하고 안락사를 앞둔 개들을 돌보며 지내는데, 이게 참... 인간의 본질 같다고 느꼈다. 루리 같은 삶을 살지 않아도 인간은 다른 생명을 먹이로 취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존재 자체가 죄인데, 그 죄를 분명하게 인식하기 전에는 작품이든 후손이든 뭔가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 죄를 분명하게 인식한 이후에는 죄 많은 내가 뭔가를 만든다는 게 또 다른 죄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 죽음을 앞둔 개의 등이나 만지고 있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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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슬의 바다 - 백은별 소설
백은별 지음 / 바른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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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거라는 내용의 기사가 하루에도 몇 개씩 쏟아진다. 실제로 어떤 업종들은 AI가 인간을 이미 대체했거나 조만간 대체할 예정이다. 아마도 이제 곧 인간보다 훨씬 유능하고 비용도 적게 드는 AI가 보편화 되어 더는 인간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인간들은 어떻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까. 인간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갈까. 베스트셀러 <시한부>의 작가 백은별의 신작 <윤슬의 바다>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인간에게 있어 존재의 이유, 삶의 목표란 결국 사랑이라는 것이다. 


고등학생 구윤슬은 어느 날 들른 도서관에서 한 학년 위의 선배 최바다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윤슬은 도서관 구석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바다에게 다가가 말을 걸 정도로 적극성을 발휘해 보지만, 바다는 묻는 말에만 간략하게 대답할 뿐 좀처럼 윤슬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윤슬이 계속해서 다가가자 바다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고, 결국 두 사람은 사귀기로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의 친구라는 사람이 윤슬에게 찾아와 바다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사실 윤슬에게는 그동안 바다에게 말 못한 비밀이 있는데, 바다의 친구로부터 바다의 비밀을 알게 된 윤슬은 자신과 바다의 기구한 인연을 알고 슬픔에 빠진다.


이 소설은 윤슬과 바다의 시점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덕분에 바다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비밀 때문에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윤슬의 마음과 윤슬이 마음에 들지만 자신의 비밀 때문에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바다의 마음을 더욱 섬세하게 알 수 있고 공감하며 읽을 수 있다. 특히 바다는 윤슬에게 '고요한 바다'라고 불릴 정도로 말이 많은 캐릭터가 아니라서, 바다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바다 시점의 파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자신과 가까워지는 사람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곁을 주지 않았던 사람이, 그 사람이 결국 죽게 되더라도 끝까지 가보겠다고 마음을 먹게 하는 원동력은 뭘까. 그게 사랑일까, 진짜 사랑일까, 라고 묻는(다고 내 멋대로 해석한) 작가의 말 속 물음도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의 비밀이 초능력과 관계가 있어서 이 소설을 로맨스 판타지 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초능력이 아니라 인종이나 국적, 계급 같은 구분에 의해 형성되는 약자성, 소수자성을 대입해도 성립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구분, 차별을 뛰어넘는 힘은 결국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하는 소설이라서 지극히 인간적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메시지를 담은 소설이 더 많이 쓰이고 읽혀야 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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