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3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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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재미있다. '치열하게' 쓴다는 건 작가로서 당연한데 '편협하게' 읽는다니 독자로서 괜찮을까. 알고 보니 저자가 말하는 '편협하게'의 의미는 한 쪽으로 치우친 의견만 반영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상 가능한 내용이나 편안한 말, 기존의 언어나 이데올로기를 반복하는 책보다는 '전압이 높은 책', '나를 소생시키는 책'을 선호한다."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그저 그런 책 열 권을 읽느니 인생을 바꿀 만한 위력을 지닌 책 한 권을 읽겠다는 의지(혹은 읽고 싶다는 희망)의 표현이랄까. 그렇다면 나도 편협하게 읽는 독자가 되리... 


저자는 여성학자이지만 여성뿐 아니라 다양한 주제에 관심이 많다. 특히 관심 있는 주제는 고통과 통증, 질병과 죽음, 이를 모두 아우르는 '몸'이다. 몸에는 얼굴도 포함되는데, 얼굴이 두꺼운 사람, 즉 뻔뻔한 사람일수록 그나마 적은 기회를 잡기 쉽고 물리력, 폭력, 권력을 행사하기 쉬운 것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 구조다. 반대로 얼굴이 두껍지 못한, 남을 괴롭히고는 발 뻗고 못 자는 양심의 소유자들은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며 계층 구조의 하단부에 머무른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글을 쓰고,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는 결국 고통에 대한 연구로 귀결된다. (60쪽 참고) 


남성 작가에 대한 생각도 흥미롭다. 저자는 리영희 대기자의 책 <대화>를 읽고 이렇게 썼다. "물론 그는 충분히 성찰적인 남성이지만, 그의 위대함은 성별화된 공/사 영역 분리로 인해 보살핌 노동에서 면제된 남성 특권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성이라면 결혼하지 않았어야 가능한 업적이 남성은 결혼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180쪽) 위대한(혹은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남성(작가)들을 볼 때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한다. 그들이 여성이었다면 남성일 때와 같은 수준의 성취를 이루고, 같은 수준의 인정과 보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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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스의 말 - 중단된 열정,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마르그리트 뒤라스 외 지음, 장소미 옮김 / 마음산책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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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 나에게는 <연인>으로 기억되는 작가다. 그 책을 읽고 나서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후에 다른 작가, 다른 독자들로부터 뒤라스에 대한 찬사를 많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연인>을 오독했거나, 남들이 아는 뒤라스의 매력을 나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일 터. 그래서 이 책을 구입했다. <연인>을 다시 읽기 위해. 뒤라스를 더 잘 알고 싶어서.


이 책은 뒤라스(1914-1996)의 말년인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진행된 인터뷰를 토대로 한다. 뒤라스는 1914년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큰아들만 예뻐했다. 가난과 차별을 겪으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뒤라스는 대학 진학을 계기로 프랑스로 귀국한 뒤 다시는 베트남을 찾지 않았다. 1943년 소설가로 데뷔했고, 1984년에 발표한 <연인>으로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뒤라스의 작품들은 대체로 자전적이다. 이에 대해 뒤라스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작가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자기 자신에 관해 써요. 그들 인생의 핵심 사건인 그들에 대해. 마찬가지로 작가가 언뜻 그에게 낯선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건 늘 그의 자아, 그의 강박과 연관돼 있죠." "사람들은 쓰지 않을 때 대체 무얼 할까? 난 쓰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은밀한 경외감을 느껴요.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거든요." (95쪽)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일은 무엇이든 쓰는 작가라는 인상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등장 인물들의 침묵과 부재에 담겨 있다고 뒤라스는 말한다. 오히려 서사를 이끌어가는 대화나 말은 인물들의 본심 혹은 진의를 감추거나 위장하는 효과를 지닌다.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에 주목하라는 저자의 말을 힌트 삼아, <연인>을 비롯한 뒤라스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이번에는 무엇이 보일까 혹은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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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질의 사랑 - 천선란 소설집
천선란 지음 / 아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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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작가의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세 번째인데, 세 권의 책 중에 이 책이 가장 좋았다. 차이점이 뭘까 생각해 봤는데, 먼저 읽은 두 권은 장편이었고 이 책은 단편집이다. 천선란 작가의 장편보다 단편이 나와 잘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앞으로 천선란 작가의 단편 위주로 찾아 읽어 보는 것으로...) 


천선란 작가의 첫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에는 총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먼저 읽은 <천 개의 파랑>이나 <나인>에서도 느꼈는데, 천선란 작가의 소설은 본격적인 SF 소설이라기보다는 (우주나 외계인 등) SF 소설의 요소가 가미된 순문학의 느낌이 강하다. (최근에는 순문학 작가들이 SF 소설의 요소를 차용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아마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가 조만간 사라지거나 이미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내용은 대체로 가족에 관한 것이 많은데, 천선란 작가가 그동안 인터뷰한 기사나 출연한 팟캐스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작가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사막에서>는 작가 스스로도 자전적인 이야기에 가깝다고 썼을 만큼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많이 보였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오랫동안 해외에서 생활한 아버지, 갑자기 쓰러져 입원한 어머니, 이런 상황에서 어릴 때부터의 꿈인 작가가 되기를 고집하는 나. 


천선란 작가는 <천 개의 파랑>과 <나인>에서 인간 아닌 존재가 감정을 느끼는 상황을 가정한 바 있는데, 이는 자동차 추돌 시험을 위해 사용되는 '더미'가 인간처럼 감정을 가지고 다른 더미를 사랑할 수 있다는 설정이 나오는 단편 <마지막 드라이브>로 이어진다. <너를 위해서>와 <두하나>는 작가가 여성으로서 사회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서 좋았다. 이런 작품들도 많이 써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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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땐, 책 - 떠나기 전, 언제나처럼 그곳의 책을 읽는다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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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 말을 처음 들은 이십 대 때는 '서서 하는 독서'를 많이 하는 삶을 살기를 바랐는데, 삼십 대 후반인 지금 과거를 돌이켜보면 '앉아서 하는 여행'에 치중했다는 생각이 든다(블로그에 기록된 4천 여 편의 서평 기록이 그 증거다). 여행 작가 김남희 님은 어떨까. 한국을 대표하는 여행 작가인 만큼 여행에 충실한 삶을 사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2019년에 발표한 책 <여행할 땐, 책>을 읽어보니 여행만큼이나 독서에도 열심인 분이신 것 같다. 


노련한 여행자답게 가벼운 짐을 선호하지만 가방에서 옷과 음식을 뺄지언정 책과 노트를 빠트리는 일은 없다는 그는, 이 책에서 여행의 촉매제였고, 여행의 동반자였으며, 지난 여행을 좀 더 오랫동안 추억하게 만들어준 스물네 권의 책을 소개한다. 그리스 이드라 섬에서 본 풍경들을 떠올리게 해주는 후지와라 신야의 책 <인생의 낮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이야기들이 가득한 장 크리스토프 뤼팽의 책 <불멸의 산책>, 일본 가루이자와에 가보고 싶게 만든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등이다. 


이 책을 읽고 앞으로 가보고 싶은 여행지와 읽고 싶은 책이 한가득 생겼지만, 이 책을 통해 얻은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저자가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한 건 서른네 살 때로 알고 있는데, 그보다 앞선 1993년에 유럽 배낭여행을 한 적이 있고 그 여행의 계기가 된 책이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라는 건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서경식 선생의 여행이 한 권의 책이 되고, 그 책이 김남희 작가로 하여금 여행하게 만들었다니. 여행과 책, 책과 여행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나에게 여행은 다르지 않다. 여행은 몸으로 읽는 책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기에. 책도, 여행도 더 넓은 세계를 열어주는 문이다. 문 너머에 어떤 만남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어 책을 펼 때도, 여행을 떠날 때도 매번 심장이 쫄깃해진다. 책과 여행을 통해 나는 타인의 마음에 가 닿고, 지구라는 행성의 신비 속으로 뛰어들고, 인류가 건설하거나 파괴한 것들에 경탄하고 분노한다. 그럼으로써 나라는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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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허락된 미래 마음산책 짧은 소설
조해진 지음, 곽지선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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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작가가 SF 소설을 쓴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런 궁금증을 안고 읽은 이 책.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첫 번째 소설 <X-이경>은 미지의 행성 'X'가 지구와 충돌할 것이며 그 경우 인류가 생존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의 상황을 그린다. 한 달 안에 지구가 행성과 충돌하고 세상이 망한다면 현재 사귀고 있는 사람과 계속 만날 것인가, 직장에 계속 출근할 것인가, 미련이 남아 있는 예전 애인을 다시 찾아갈 것인가. 이어지는 두 번째 소설 <X-현석>은 이경의 예전 애인 현석의 시점으로 쓰인 단편이다. 함께 읽으면 재미있다. 


<X-이경>, <X-현석>과 마찬가지로 서로 연결된 작품이 <귀환>과 <종언>이다. <귀환>은 사고로 손상된 뇌 부위에 칩을 이식한 아들을 위해 3개월 후 귀환 예정인 우주 왕복선에 탔다가 16년을 우주에서 보낸 엄마 은정의 이야기를 그린다. <종언>은 어느새 어른이 된 은정의 아들 수호가 자신처럼 혼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온 소년 승재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귀환>에서 마침내 지구로 돌아가게 된 은정이 무사히 지구에 도착했는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 수호를 다시 만났는지 궁금한 나로서는, <종언> 이후의 이야기를 작가님이 꼭 써주셨으면 좋겠다(부탁드려요 ㅠㅠ). 


큐큐에서 나온 앤솔로지 <언니밖에 없네>에도 실린 <가장 큰 행복>도 좋았다. 식량과 물자가 풍족하지 않고 이기심과 폭력성을 숨기지 않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온순하고 성실한 성품을 지닌 두 남자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감명 깊게 본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영화 <퍼스트 카우>가 떠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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