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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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출간된 소설인데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은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과연 3년 후 실제로 팬데믹이 발생할 거라고 예상했을까. 다행히 팬데믹이 발생한 지 3년 차인 현재 작가의 예상과 유사한 정도의 참극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은 점, 농업 생산량이 줄고 전력 수급이 불안정해진 점, 소설의 무대인 러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난 점 등은 작가의 예상과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이 소설에는 복수의 화자가 등장한다. 전염병으로 가족과 친척을 한꺼번에 잃고 아빠와 남은 친척들과 피난길에 오른 지나는 어린 여동생 미소를 데리고 피난 중인 도리를 만난다. 지나에게는 함께 피난길에 오른 건지라는 친구도 있는데, 이들은 함께 피난 생활을 하면서 유사 자매 또는 남매 같은 관계가 된다. 류는 해림과 해민, 두 아이와 생계를 위해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지속해 왔다. 그러다 전염병으로 딸 해림을 잃은 후 남은 아들 해민, 남편 단과 함께 그동안 어렵게 장만한 집과 힘들게 버텨온 직장 모두를 포기하고 한국을 떠나면서 자신의 지난 결혼 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처음에는 작가가 팬데믹이 일어나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글로 표현한 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읽을수록 이 소설의 핵심은 팬데믹이 아니라 팬데믹, 즉 재난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가정함으로써 지금 현재 한국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를 역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류가 재난 이전보다 재난 이후 오히려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길고 부부 간의 대화가 많아졌음을 깨닫는 장면이라든가, 지나와 도리의 사랑을 혈육인 아빠와 친척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반면 생판 남인 건지나 류가 이해해 주는 장면이 그랬다. 


작가의 말대로 생략된 부분이 많은 소설이라서 후속편을 기대하게 된다. 해가 지는 곳으로 떠난 이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곳에서 영영 지지 않는 해를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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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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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내용인지 보려고 책을 펼쳤다가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그만큼 흡인력이 대단하고, 2010년 한겨레문학상 심사위원들이 어째서 이 소설을 그 해의 수상작으로 뽑았는지(그것도 만장일치로) 단번에 이해됨...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녀'다. 허구한 날 때리는 아버지와 걸핏하면 밥을 굶기는 어머니를 둔 소녀는 이들이 진짜 부모라면 이렇게 나를 괴롭힐 리 없다고 생각하며 어딘가에 있을 '진짜 엄마'를 찾아 떠난다. 소녀는 황금다방 장미언니, 태백식당 할머니, 교회 청년, 폐가의 남자, 각설이패 삼촌들, 유미와 나리 등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의지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에게 버림받거나 그들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설정과 줄거리만 보면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소녀가 어린 나이에 가출해 험한 세상을 경험하는 모험기 같은데(맞다), 같은 경험은커녕 유사한 경험조차 없는 내가 이 소설에 크게 감정이입한 이유는 뭘까. 내 생각에 이 소설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껴보았을 감각 혹은 감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 어디에도 내가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없는 것 같다는 불안. 나에게 주어진 삶이 고작 이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체화하는 성숙이라는 이름의 체념. 운 좋게 신뢰할 수 있고 애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에게 내가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받을 수 없고 나 또한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는 걸 체감할 때의 비애 또는 무력감. 


잠깐이라도 나를 받아주었던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이 다만 '그것'뿐이라서, 그것을 하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소녀의 마지막 선택은 그래서 더 슬프고 마음이 아팠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야 자신의 이름을 겨우 알게 되고, 살면서 마음을 준 친구는 몇 명인가 있었지만 최후에는 곁에 아무도 없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언젠가 이다혜 기자님의 인스타그램에서 본 에밀리 메리 오스본의 그림 <Nameless and friendless>이 떠오르기도 했고... (결국 '소녀'의 삶은 모든 여성들의 삶, '소녀'의 죽음은 모든 여성들의 죽음일까) 


이 소설을 읽고, 조숙하지만 미숙하기도 한 소녀의 시점에서 소설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 떠오르기도 했다.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끝내 불행한 방식으로 삶을 마감하는 어린 아이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연상할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체공녀 강주룡>, <코리안 티처> 등을 읽었을 때 느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에 대한 신뢰를 다시 한 번 굳힌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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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이클롭스 이즈미 로안 시리즈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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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호러 장르는 여름이 제철이라고 하지만, 이 장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어느 계절에 읽어도 재미있다. 올여름에는 야마시로 아사코의 <나의 사이클롭스>를 재미있게 읽었다. 배경은 에도 시대 일본. 참배객들을 위한 여행 안내서를 집필하는 사내 이즈미 로안과 짐꾼 미미히코, 여행에 동행한 서점 직원 린, 이렇게 세 사람이 각지를 여행하면서 직접 겪은 기묘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기담 시리즈를 좋아한다면(=나) 이 책도 좋아할 듯하다. 


리뷰를 쓰기 위해 책 정보를 찾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쓴 야마시로 아사코의 본명은 오쓰이치. 십 대 시절 점프 소설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천재 작가로, 야마시로 아사코는 이즈미 로안 시리즈를 출간하면서 만든 필명이란다. 이즈미 로안 시리즈의 첫 책은 <엠브리오 기담>인데 이 책은 2014년에 국내에서 출간된 바 있다. 인터넷 서점 리뷰를 보니 평가가 제법 괜찮다. 이 책도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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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자나 2022-09-19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여사 괴담시리즈 좋아하는데 새로운 작가의 에도괴담을 읽을수 있어 좋네요~~감사해요~~

키치 2022-09-20 08:50   좋아요 0 | URL
미미여사 괴담 시리즈 신작 기다리면서 읽기 좋은 소설 같아요. 덧글 감사합니다 ^^
 
별것 아닌 선의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가장 작은 방법
이소영 지음 / 어크로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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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행동을 위선이라고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착한 척한다, 가식 떤다 같은 말도 자주 쓴다. 위선이고 착한 척이고 가식일지라도, 그런 위선이나 착한 척, 가식조차 떨지 않는 사람보다는 그거라도 하는 사람이 나는 훨씬 좋다. 기왕이면 상대방을 배려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 그런 사람이 적은 세상보다 훨씬 살기 좋을 거라고 믿는다. (이렇게 쓰고 있는 나도 위선조차 떨지 않는 때가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착하고 매너 좋은 사람들을 존경한다). 


"착한 척한다고 비난하면 달게 받겠다. 나는 냉소보다는 차라리 위선을 택하려 한다."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에서 법학을 가르치는 이소영 교수의 책 <별것 아닌 선의>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2017년부터 <경향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 자신의 삶에서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어준 타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대학 시절 입시학원에서 강사 아르바이트를 할 때 시험 전날인데도 특강을 하러 출근해야 했던 자신을 배려해 준 교무주임 선생님과의 일화부터, 저자가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부러 연구실로 찾아와 영양제를 선물하고 간 제자와의 일화 등 가슴 뭉클한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크고 작은 선의 또는 호의가 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저자만 해도 결코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 법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와 명예가 보장된 사법고시 대신 학자의 길을 택했지만,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믿고 지지해 준 교수님들과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현재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다. 비혼 여성 1인 가구이며, (아마도) 연고가 없는 제주에서 살고 있고, 완치가 쉽지 않은 병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데도 저자가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건 그동안 사람들과 주고 받은 선의의 또는 호의가 넉넉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럽다) 


목적지까지 무사히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때로는 어떤 이유로 울고 있는 저자를 위해 위로가 되는 음악을 틀어준 택시 기사, 내가 좋아하는 음료를 기억해 주고 알아서 주문해 주는 카페 점원,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하자 자기 일처럼 나서서 찾아준 우체국 직원 등도 잊을 수 없다. 이들은 자신의 직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아주 잠깐 저자를 만났을 뿐이지만, 업무가 요구하는 수준 이상의 배려를 저자에게 베풂으로써 저자의 삶에서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팍팍할까. "


"나의 결점을 통해 타인의 빈틈을 알아보고 다정한 이해의 눈길을 보냈던 저 순간과 같은, 그런 알아봄의 경험은 정의를 구현하고 세상을 바꾸는 데 하등 쓸모를 갖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서로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가장 작은 방법이 되어줄 순 잊지 않을까 생각했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채 그럼에도 매일의 발걸음을 떼어놓는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별것 아닌 것들일지도 모른다."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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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외롭지만 따뜻한 수프로도 행복해지니까 - 소설가가 식탁에서 하는 일
한은형 지음 / 이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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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여름이 서서히 끝나가는 것을 느낀다. 여름 내내 아침 식사로 차가운 우유를 부은 시리얼을 먹었는데, 며칠 전부터 아침 날씨가 제법 쌀쌀하게 느껴져서 시리얼 대신 수프를 먹고 있다. 지난 가을과 겨울에 잘 먹고 남겨둔 것으로, 1인분씩 개별 포장되어 있는 봉지를 뜯어서 그 안에 들어있는 분말을 그릇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후 휘휘 저으면 완성이 된다. 이것과 갓 구운 식빵 한두 장을 먹으면 아침 식사 끝. 간편하면서도 맛있는 한 끼다. 


공교롭게도 오늘 읽기를 마친 책 제목에 수프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소설가 한은형의 음식 에세이 <우리는 가끔 외롭지만 따뜻한 수프로도 행복해지니까>. 저자는 책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과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준다. 샌드위치, 계란밥, 크레이프, 우메소면, 크루아상, 오리 우동, 경상도식 뭇국, 나폴리탄, 냉면, 만둣국 등 음식의 종류도 국적도 다양하다. 음식은 맞지만 요리는 아닌 것들도 있다. 술, 커피, 코코아, 막걸리 등의 음료라든가 꿀, 귤 등이다. 음식만으로 이렇게 다채로운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니. 따뜻한 수프만 있어도 외롭지 않다는 제목의 의미가 와닿는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도 많다. 크레이프 케이크를 먹을 때는 포크의 날과 날 사이에 크레이프 한 장을 끼우고 돌돌 말아 먹어야 한다는 것, 아스파라거스를 먹으면 오줌에서 향기가 난다는 것,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스타벅 선장은 작품 속에서 커피를 마신 적이 없다는 것, 잭과 콩나무의 콩은 작두콩이라는 것 등등... 다른 건 그러려니 싶은데, 아스파라거스를 먹으면 오줌에서 향기가 나는지는 진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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