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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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인 '나'는 어느 날 아침 평소처럼 신문을 펼쳤다가 기묘한 광고를 보게 된다. '이 책을 쓴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광고에는 어떤 소설의 일부가 실려 있었는데, 그것을 읽던 도중 '나'는 충격에 빠진다. 그것은 '나'가 오래전 공모전에 냈다가 낙선한 뒤 자비로 출판한 소설이었던 것이다. 


신문사를 통해 광고를 낸 사람과 연락이 닿은 '나'는 '진'이라는 여성과 만난다. 알고 보니 이 광고는 육 개월 전 실종된 진의 남편을 찾기 위해 낸 것으로, 진의 남편은 자신이 이 소설을 썼다고 했으나 실종 후 발견된 일기장에 따르면 진의 남편은 이 소설을 쓰지 않았고 소설가도 아니며 심지어 남자도 아니었다. 이유상이라고 했던 그의 진짜 이름은 이유미. 진과 결혼하기 전에 이미 세 명의 남자와 결혼한 전력이 있는 여자였다. 


도입부만 봐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줄거리가 무척 드라마틱하다. 그러나 드라마틱한 것만이 이 소설의 장점은 아니다. 나는 이 소설의 핵심이 이유미가 아니라, 이유미의 삶에 대해 조사하면서 '나'가 느끼는 감정과 그로 인한 '나'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이유미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너무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삶을 살았다. '나'는 그런 이유미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이유미의 삶의 행적을 조사한다. 그런데 조사하면 할수록 '나'는 이유미에게 호기심이 아닌 '동질감'을 느낀다. 


대체로 사람들은 실제의 자신보다 더 나은 자신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나'도 그렇다. '나'는 소설가이지만 오랫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고, 결혼은 했지만 남편에 대한 애정은 전혀 없다. 이러한 사실을 밝히지 않는 건, 소설가조차 아닌 나, 결혼까지 실패한 나를 남들이 어떻게 볼지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연기를 하고 부정을 저지른다. '나'는 이유미가 그러한 자신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방인'에게 '친밀한' 감정을 느낀다. 


놀랍게도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와 희망을 준다. 결국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남편과의 관계도 정리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의 과제는 실제의 자신보다 더 나은 자신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유미를 통해 비로소 실제의 자신을 볼 수 있었고, 그 결과 새로운 삶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만약 이유미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그의 앞에는 어떤 삶이 펼쳐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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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황효진.윤이나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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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콘텐츠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이후로, 나는 가급적이면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콘텐츠를 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큰 도움을 받고 있는 매체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여성이 보는 여성의 이야기'를 전하는 팟캐스트 <시스터후드>이다. 윤이나, 황효진 작가가 진행하는 이 방송은, 매주 여성이 만들거나 여성이 주역인 책,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을 다각도로 치밀하게 분석해 소개한다. 덕분에 유익하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많이 만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윤이나, 황효진 작가의 책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는 편지 형식이다. 팟캐스트보다 개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형식을 택해서인지 저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황효진 작가는 "사람들은 여자를 쉽게 미워한다. 글 쓰는 여자는 더욱 미워한다. 여성에 관한 글을 쓰는 여자는 그보다 훨씬 더 미워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우울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윤이나 작가는 한때 '탈조선'을 꿈꿨지만 "이제 내게 세계는 살아남아야 하는 여성들이 존재하는 곳, 내가 사랑하는 여성들이 살고 있는 곳이며 안과 밖은 그리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힌다. 


그런 저자들이 다시 쓰고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 원천은 결국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콘텐츠들이다. 윤이나 작가는 강유가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매일매일>를 보다가 여성주의 의료협동조합 살림에서 일하고 있는 어라 님이 "나는 여성주의자가 먹고사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해."(154)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크게 놀랐다. "페미니스트는 '자기성찰적이고, 일상으로부터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고 그 태도가 생존을 가능케 한다는 거예요. 반성하고, 바뀌고, 돌아보고, 나아가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죠."(155)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이 상당히 피로한 일이라고 느낀다. 한국 사람들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거나 미워하고, 그래서 탈조선을 꿈꿨지만 이루지 못했다. 지금 내가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은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여성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은 대로 사는 모습을 보는 것, 단지 그뿐이다. 그중에는 윤이나, 황효진 작가도 있고, 이들이 소개해 준 여러 창작자들도 있다. 부디 모두 함께 무사히 미래로 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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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덴마크 선생님 - 불안과 우울의 시대에 서로 의지하는 법 배우기
정혜선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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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선생님이 장래희망을 써서 내라고 할 때마다 기자나 외교관 같은 직업을 적어서 냈지만 진심으로 그런 직업을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달리 하고 싶은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언론사 시험도 보았지만 의욕이 없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결국 전공과 상관없는 일들을 하다가 현재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지만, 앞으로 십 년, 아니 당장 1년 후의 내 모습조차 상상이 안 된다. 대체 나의 장래 희망은 뭘까. 나는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책장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정혜선의 <나의 덴마크 선생님>. 지리산의 대안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저자는 우연히 덴마크의 세계시민학교(International People's College, IPC)의 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한다. 그때 저자의 나이 39세. 다시 학생이 되기에는 나이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을지 불안했지만,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학생들에게 내심 품고 있었던 부러움을 이번 기회에 해소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학생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으로는 영영 좋은 교사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IPC에서의 생활은 과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IPC는 세계시민학교답게 다양한 국적,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을 받는다. 그중에는 영어가 서투른 학생도 있고 단체 활동과 외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도 있다. 학교는 이런 학생들을 배제하거나 퇴출시키지 않고 적극적으로 케어한다. 학생들도 뒤처지는 사람이 있으면 한심하게 여기거나 따돌리지 않고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돕는다. 학생의 성적과 입시 결과만을 중시하고 경쟁 중심적인 한국의 학교 문화와는 너무도 다르다. 


한국에서 삼십 년 넘게 살다가 덴마크에 간 저자는, 처음엔 이러한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공부에만 매달리고, 공부도 하고 싶은 공부가 아니라 해야 할 것만 같은 공부만 한다고 걱정도 들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저자는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른 학생들과 학교 밖으로 놀러 가기도 하고 파티에도 열심히 나간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해보고 싶은 공부에 도전하고, 때로는 남이 시키지 않은 일을 찾아서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비로소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산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깨닫는다. 한국에선 그런 감각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남들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에 입학했고, 취업 준비를 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시험에 합격해 공무원이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방황 끝에 대안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다. 더욱이 한국은 (특히 여성에 대한) 결혼 및 출산 압박이 심하다. 덴마크에서 결혼과 출산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며, 결혼을 하지 않고 출산을 하거나 이혼을 해도 아무런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는다. 둘 중 어떤 나라에서 결혼이나 출산을 하고 싶은지는 너무 뻔하지 않은가. 


IPC에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속해 있고, 그들과 역사 및 정치 문제를 두고 토론하게 될 때도 많이 있다. 매번 원만하게 토론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토론을 통해 각국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다. 이는 IPC의 창립자 피터 매니케가 1차 대전에 참전해 얻은 교훈에서 비롯된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쟁으로 인해서 이득을 얻는 사람은 누구인가. 매니케는 서로 전쟁을 했던 두 나라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전쟁을 막고 평화로 가는 길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156쪽) 


저자는 일본에서 온 학생들과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문제에 대해 토론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에는 일본 학생들의 무관심과 무지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저자가 열심히 설명하자 놀라거나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문제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자도 오키나와 출신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본 내에도 복잡한 역사적, 정치적 문제가 있고, 같은 일본인이라도 입장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장은 아니라도 계속해서 같은 문제를 고민하고 함께 답을 찾다 보면 언젠가 원하는 미래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저자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기후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여전히 결혼하라는 타박을 듣고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지 못해 불안하지만, 이제는 가고 싶었던 학교에서 존경할 수 있는 선생님,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과 마음껏 공부하고 격려 받은 경험이 있어서 견딜 만하다고.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아니라, 장래에 무엇이 되고 어떻게 살든지 나는 나대로 괜찮고 힘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감각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걸 배운 저자가 부럽고, 책으로 공유해 줘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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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하는 일
오지은 지음 / 위고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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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즐겨 듣는 오디오 프로그램이 줄줄이 종영되었다. 그중 하나가 <오지은의 이런 나라도 떠나고 싶다>로, 방송이 시작된 2019년부터 한 회도 빼놓지 않고 방송을 들었던 나는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는 중이다. 이 방송은 2014년 <홋카이도 보통 열차>를 읽고 오지은에게 매료된 나에게 아주 중요한 방송이기도 했다. 즐겁고 행복해서가 아니라 힘들고 불행해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 비행기 타고 외국에 가서는 숙소 침대에 가만히 누워 창밖으로 떠가는 구름을 보는 게 좋은 사람. 그런 사람이 들려주는 여행 이야기가 나는 왠지 공감도 되고 위로도 되어 좋았다. ​


방송은 끝났지만 오지은의 이야기는 계속되겠지. 어디선가 또다시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진작에 구입해 책장에 꽂아둔 오지은의 신작 에세이 <마음이 하는 일>이 눈에 들어왔다. <씨네 21>에 같은 제목으로 연재된 칼럼과 다른 매체에 기고한 글을 엮어서 만든 이 책에는 음악가이자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저자의 고뇌와 불안이 담겨 있다. (대부분 <씨네 21>에 연재된 글이라서 그런지) 각 글에는 해당 글을 쓴 계기가 된 드라마나 영화, 다큐멘터리 등이 소개되어 있다. ​ ​


첫 앨범을 낸 지 15년이 흘렀고 작가로도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저자는 여전히 창작이 어렵고 예술은 아득하기만 하다고 토로한다. 창작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좋다는 아침 습관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보기도 하지만 매번 효과가 있는 건 아니다. 2020년부터는 팬데믹이 창궐하면서 좋아하는 여행도 못하고 본업인 공연이나 콘서트도 못하게 되었다. 그럴 때는 쉬어가는 셈 치고 몸도 마음도 푹 쉬면 좋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생계가 불안했고, 속절없이 들어가는 나이가 의식되었다. 게임을 하고 반려동물과 놀다가도, 이대로 괜찮을까라는 반문과 의심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다행히 세상에는 내가 하는 고민을 먼저 한 창작자들이 있고 그들이 만든 창작물이 있다. 저자는 다양한 드라마나 영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자신을 투사하기도 하고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로부터 배울 점을 찾기도 한다. 책에 실린 모든 글이 좋지만, 영화 <블랙 위도우>에 대해 쓴 글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오사카 나오미 : 정상에 서서>에 대해 쓴 글은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뭉클하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매혹되고 그 마음에 대해 쓰고 노래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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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루와 커다란 케이크 시루 시리즈
권서영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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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디저트가 되고 싶은 하얀 떡 반죽 시루의 이야기를 그린 동화다. 달콤한 시럽이나 크림도 없고 화려한 초콜릿 조각도 없어서 매일 가게에서 쫓겨나는 불쌍한 시루. 언제나처럼 가게에서 쫓겨난 시루는 우연히 초코칩을 흘리고 다니는 쿠키를 발견한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초코칩을 줍다가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시루처럼 갈 곳 없는 디저트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한 쪽이 터진 크림빵, 부서진 타르트, 까맣게 탄 빵 등등... 


시리즈 첫 책 <시루의 밤>을 읽을 때 시루에게 밤하늘의 달과 별처럼 시루를 구별 없이 환대해 주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존재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후속편 <시루와 커다란 케이크>에서 꼭 그런 친구들이 생겨서 마음이 흡족하다. 매일 내쫓김을 당하면서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디저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시루. 자신처럼 불완전하고 상처받은 존재들을 보듬을 줄 아는 넒은 마음의 소유자 시루가 참 사랑스럽다. 부디 후속편이 나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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