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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덴마크 선생님 - 불안과 우울의 시대에 서로 의지하는 법 배우기
정혜선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평점 :
학창 시절 선생님이 장래희망을 써서 내라고 할 때마다 기자나 외교관 같은 직업을 적어서 냈지만 진심으로 그런 직업을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달리 하고 싶은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언론사 시험도 보았지만 의욕이 없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결국 전공과 상관없는 일들을 하다가 현재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지만, 앞으로 십 년, 아니 당장 1년 후의 내 모습조차 상상이 안 된다. 대체 나의 장래 희망은 뭘까. 나는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책장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정혜선의 <나의 덴마크 선생님>. 지리산의 대안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저자는 우연히 덴마크의 세계시민학교(International People's College, IPC)의 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한다. 그때 저자의 나이 39세. 다시 학생이 되기에는 나이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을지 불안했지만,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학생들에게 내심 품고 있었던 부러움을 이번 기회에 해소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학생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으로는 영영 좋은 교사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IPC에서의 생활은 과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IPC는 세계시민학교답게 다양한 국적,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을 받는다. 그중에는 영어가 서투른 학생도 있고 단체 활동과 외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도 있다. 학교는 이런 학생들을 배제하거나 퇴출시키지 않고 적극적으로 케어한다. 학생들도 뒤처지는 사람이 있으면 한심하게 여기거나 따돌리지 않고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돕는다. 학생의 성적과 입시 결과만을 중시하고 경쟁 중심적인 한국의 학교 문화와는 너무도 다르다.
한국에서 삼십 년 넘게 살다가 덴마크에 간 저자는, 처음엔 이러한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공부에만 매달리고, 공부도 하고 싶은 공부가 아니라 해야 할 것만 같은 공부만 한다고 걱정도 들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저자는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른 학생들과 학교 밖으로 놀러 가기도 하고 파티에도 열심히 나간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해보고 싶은 공부에 도전하고, 때로는 남이 시키지 않은 일을 찾아서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비로소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산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깨닫는다. 한국에선 그런 감각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남들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에 입학했고, 취업 준비를 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시험에 합격해 공무원이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방황 끝에 대안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다. 더욱이 한국은 (특히 여성에 대한) 결혼 및 출산 압박이 심하다. 덴마크에서 결혼과 출산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며, 결혼을 하지 않고 출산을 하거나 이혼을 해도 아무런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는다. 둘 중 어떤 나라에서 결혼이나 출산을 하고 싶은지는 너무 뻔하지 않은가.
IPC에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속해 있고, 그들과 역사 및 정치 문제를 두고 토론하게 될 때도 많이 있다. 매번 원만하게 토론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토론을 통해 각국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다. 이는 IPC의 창립자 피터 매니케가 1차 대전에 참전해 얻은 교훈에서 비롯된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쟁으로 인해서 이득을 얻는 사람은 누구인가. 매니케는 서로 전쟁을 했던 두 나라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전쟁을 막고 평화로 가는 길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156쪽)
저자는 일본에서 온 학생들과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문제에 대해 토론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에는 일본 학생들의 무관심과 무지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저자가 열심히 설명하자 놀라거나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문제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자도 오키나와 출신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본 내에도 복잡한 역사적, 정치적 문제가 있고, 같은 일본인이라도 입장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장은 아니라도 계속해서 같은 문제를 고민하고 함께 답을 찾다 보면 언젠가 원하는 미래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저자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기후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여전히 결혼하라는 타박을 듣고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지 못해 불안하지만, 이제는 가고 싶었던 학교에서 존경할 수 있는 선생님,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과 마음껏 공부하고 격려 받은 경험이 있어서 견딜 만하다고.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아니라, 장래에 무엇이 되고 어떻게 살든지 나는 나대로 괜찮고 힘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감각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걸 배운 저자가 부럽고, 책으로 공유해 줘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