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1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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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며칠 동안 책보다는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다. <헤어질 결심>의 정서경 작가가 시나리오를 쓴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보느라 그랬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드라마의 줄거리를 따라가느라 바쁜 한편으로, <헤어질 결심>의 각본집이 출간된 것처럼 이 드라마도 각본집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 속 연기와 연출과 미술과 음향이 이미 훌륭한데도 각본집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건 왜일까. 그건 내가 지독한 활자 중독자라서,라는 이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일까. 드라마를 완결까지 다 보고 나서 오랜만에 소설을 읽는 마음이 참 좋았다. 그 소설이 마침 이승우 작가의 소설이라서 더 좋았던 것도 있다. 그 소설은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지상의 노래>. 초판은 2012년 민음사에서 출간되었고, 개정판은 2020년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출간되었으며 나는 개정판으로 읽었다. 


소설은 강상호라는 남자가 죽은 형이 남긴 원고를 책으로 만들기 위해 천산 수도원이라는 곳에 가면서 시작된다. 그 수도원에는 72개의 지하 방이 있고 그 방의 벽에는 성경 말씀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이 수도원에 와서 무엇을 위해 벽서를 남긴 것일까. 출간된 책을 읽고 벽서의 정체에 호기심을 느낀 차동연은 장이라는 남자를 인터뷰하고, 이 과정에서 군사정권의 핵심이었던 한정효라는 남자를 알게 된다. 한편 수도원 인근 마을에는 사촌 누나를 남몰래 사랑한 후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이 소설은 여러 인물들이 등장해 각자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취한다. 이 중에서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인물은 후와 한정효이다. 후는 사촌 누나 연희가 박 중위에게 능욕을 당하고 나서야 자신이 연희를 동생이 아닌 남자로서 좋아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에 죄책감을 느낀 후는 마을에 있는 깊은 산속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다가 성경에 나오는 일화 중에 자신이 겪은 것과 유사한 일이 있음을 발견한다. 수도승의 말대로 성경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인 걸까. 


한편 군인 출신으로 군사 정부의 요직에 오른 한정효는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권력의 무상함을 깨닫고 사직을 청하는데, 독재자의 최측근으로서 현 정부의 온갖 부정과 비리를 알고 있는 그를 독재자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다. 결국 그는 수도원에서 조용히 묵상하며 지내기를 그 누구보다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 더는 살 수도 없지만 죽을 수도 없어서 시종 걷기만 하던 그는 길 위에서 한 청년을 만나고, 그 청년의 입에서 성경 말씀이 흘러나오는 것에 놀란다. 


인물들의 캐릭터나 각각이 겪는 사건들은 어떻게 보면 상투적이고 진부한데, 작가가 그것들을 엮어낸 솜씨가 훌륭하고 그것들을 풀어낸 문장이 탁월하다. (이승우 작가의 오랜 팬으로 잘 알려진 이동진 평론가가 여러 번 예찬한 대로) 문장이 무척 좋아서 작가의 다른 책들에 담긴 문장들은 어떤지 절로 궁금해지고, 부러 필사하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멋부림 없는 간결한 문장들이 느슨함 없이 단단하게 짜인 결과물을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소설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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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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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니라 차라리 유령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유령 같은 초자연적 현상을 믿지 않기 때문에 유령이 되고 싶은 마음을 품어본 적은 없지만, 유령처럼 엄연히 그 공간에 있는데도 없는 것과 같은 취급을 당할 때 혹은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죽을 용기는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면 나 자신이 유령처럼 느껴지곤 한다. 


임선우의 첫 번째 소설집 <유령의 마음으로>에는 현실에서 유령처럼 살고 있거나 그러다 정말로 유령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표제작 <유령의 마음으로>의 '나'는 빵집에서 일하던 중 자신과 똑같이 생긴 유령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과의 만남을 계기로 '나'는 그 전까지 무기력하게 반복했던 일상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손님들을 새롭게 인식하고, 지지부진한 남자친구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어쩌면 그 유령은 나조차 몰랐던, 혹은 나도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마음들이 발현된 총체가 아니었을까. 


이어지는 단편 <빛이 나지 않아요>는 가난한 뮤지션인 '나'와 남자친구가 생계를 위해 새로운 직장을 얻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몸에 닿으면 해파리로 변하는 변종 해파리가 출몰한 세상. 남자친구는 그 해파리들을 청소하는 일을 하고 '나'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해파리로 만드는 일을 해서 그토록 원했던 경제적 안정을 얻는다. 하지만 '나'는 점점 자신이 하는 일에 회의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그로 인해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멀어진다.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나를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게 만드는 느낌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그걸 안다는 게 슬프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중에 가장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는 작품은 <낯선 밤에 우리는>이다. 난임 클리닉에 다니는 희애는 어느 날 지하철 역에서 우연히 어린 시절 친구인 금옥을 본다. 자기 몸보다 큰 십자가를 지고 전도 중인 금옥을 처음에는 외면하려 했지만, 어쩌다 보니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금옥의 집으로 초대받아 금옥이 해주는 음식을 먹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매주 금옥의 집에서 음식을 해먹으며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나를 유령 아닌 인간의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은 결국 타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해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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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년
이희주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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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어지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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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년
이희주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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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이 합심해 남자 아이돌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소설이라는 소개 글에 흥미가 동해 구입한 책이다. 영화 <성덕>을 만든 오세연 감독이 팟캐스트 <두둠칫 스테이션>에 출연해 이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에 제목을 구라하시 유미코의 1965년작 <성소녀>에서 따왔다는 문장이 있어서 <성소녀>에 대해 찾아보니 과연 영감을 받을 만한 작품이다. 이 책도 조만간 읽어보는 것으로... 


배경은 90년대 말. 인기 남자 아이돌 요셉은 언제나 수많은 여자 팬들을 몰고 다닌다. 그중에는 요셉이 일할 때는 물론이고 쉴 때도 따라다니는 '사생팬' 미희도 있고, 요셉의 어머니뻘로 보이는 안나도 있다. 여기에 안나가 단골로 다니는 무당집의 조카 나미와 젊은 시절 안나의 가정부로 일했던 희애가 가세하고, 이들 네 여자는 요셉을 안나가 아는 고립된 산장으로 납치할 계획을 세운다. 납치에 성공한 이들은 요셉을 침대에 묶어놓고 그를 대상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하나씩 실현할 꿈을 꾼다. 하지만 산장에는 자신과 요셉 말고도 다른 여자들이 있기에 욕망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이 소설에 대해 한 남자를 사이에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는 네 여자의 뒤틀린 욕망에 관한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도 있지만, 이들 각자가 가진 욕망은 단순한 동경이나 성욕이 아니다. 미희는 요셉과 맺어짐으로써 가난에서 벗어나고 안정된 주거 공간을 확보하고 싶어 한다. 안나는 비록 점점 나이 들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으로서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요셉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어 한다. 나미는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한 진실한 사랑을 요셉과 해보고 싶고, 희애는 쏟아낼 대상이 없는 모성애를 요셉에게 주고 싶어 한다. 


<성소년>을 <성소녀>의 성별 역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인(聖人)'에 대한 은유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성인 중에서도 가난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수많은 기적과 은혜를 행하였으나 바로 그 이유로 미움받고 배척당해 이른 나이에 죽어야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요셉에게서 보았다고 하면 신성모독일까(그러고 보니 이름도 요셉이다). 오세연 감독의 말대로 다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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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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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에 관한 이야기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처음엔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였다가 딸이 사춘기가 되면서 멀어지고, 그러다 딸이 예전의 엄마와 비슷한 나이가 되면서 엄마를 이해하게 되고 후회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있지만(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엄마도 있고, 영영 후회하지 않는 딸도 있으므로...), 정서는 대체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매체를 통해 미셸 자우너의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에 대한 소개를 들었을 때, 나는 이 책이 전형적인 엄마와 딸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고, 책을 읽어보니 예상을 크게 비껴나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퍽 재미있게 읽었는데, 모녀 관계라는 보편적인 소재에 한국인 어머니와 한국계 미국인 딸의 이야기라는 특수성이 가미되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놀라움과 신선함을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책에 나오는 음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미국에서 자랐지만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한국 음식들을 주로 먹었다. 그 덕분에 한국어는 잘 못해도 총각김치, 삼겹살 구이, 된장찌개, 계란찜, 미역국 등의 맛은 잘 알고, 한국에 올 때마다 외가 쪽 식구들과 함께 먹었던 짜장면, 탕수육, 치킨 등도 좋아한다. 이런 음식들은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하지만, 외국인 독자들에게는 낯설고 신기할 것이다. 뻥튀기를 '원반 모양의 앙증맞은 쌀과자'로 표현하는 등, 한국 음식을 외국인이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한 문장을 읽는 것도 신선한 재미다. 


중간중간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도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데, 당연한 얘기지만 미국에도 문제 있는 아버지가 참 많구나... 남들이 보기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돈도 잘 버는 남자인데 사실은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고(자신의 책을 통해 친부의 문제를 '폭로'한 저자의 용기도 놀랍다), 그런 남자가 친부인 것도 괴롭겠지만 남편이면(심지어 그 남편을 따라 외국에서 살고 있다면) 얼마나 더 괴로울까 싶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유튜브에서 저자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엄청나게 많은 동영상이 떴다. 그중에는 (BTS도 출연한) 미국의 유명 토크쇼에 출연해 책에 관해 말하는 동영상도 있고, 책에도 나오는 요리 유튜버 '망치 여사(Munchies)'의 채널에 출연해 한국 음식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동영상도 있다. 트레버 노아와의 인터뷰를 보니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항암 치료 및 투병 과정에 대해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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