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배명훈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배명훈 작가의 <타워>를 읽었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국가가 647층의 초고층 빌딩이라는 것이었다. 국가의 형태가 수평이 아닌 수직일 때 벌어질 법한 일을 상상하다니. 발상이 기발하고 놀랍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배명훈 작가의 신작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도 비슷하다. 


소설의 배경은 화성 인근의 스페이스 콜로니 '사비'다. 사비는 휴지심 모양을 닮은 원통형의 행성으로, 사람들은 휴지심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에서 산다. 당연히 지구와 다르게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총을 쏘면 총알이 포물선을 그리지 않고 휘어지며 떨어진다. 이런 사비에 '이초록'이 온다. 사비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친구 '김구름'의 꿈을 훔쳐서 사비에 온 초록은, (대구대학교가 대구에 없듯이) 사비예술대학은 사비에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좌절한다.


이후 이초록은 사비에서 '서운관'이라는 일종의 점집을 운영하는 고모가 '뒤를 봐줘서' 주소국장에 취임한다. 그 대가로 공직에서 얻는 정보를 고모에게 제공하기로 한 초록은, 일견 평화로운 신생 국가처럼 보이는 사비가 실은 국가 초기에 주인 없는 이권을 노리고 모여든 각종 세력들이 암약 중인 상태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다 거리 곳곳에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기이한 과녁을 발견하는데, 전술했듯이 사비는 원통형 모양의 행성이기 때문에 표적을 정확히 조준해서 제대로 총을 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감히 총을 겨누는 이 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휴지심 모양의 행성이라니. <타워>의 설정만큼이나 기발하고 강렬한 발상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고, 혹한 만큼 빠른 속도로 즐겁게 읽어내려갔다. 무법 상태나 마찬가지인 신생 국가에서 군대, 경찰, 폭력 조직 등 다양한 세력들이 갈등을 빚고 충돌하는 이야기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전개되었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대부>의 스페이스 오페라 버전이랄까? 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소설Q
박서련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팬데믹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 바람에 신용카드 빚을 갚을 수 없게 된 '나'는 죽기로 결심하고 한강 다리 위에 선다. 그런 '나' 앞에 천사처럼 하얀 옷을 입은 한 여성이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에요." 자신을 '예언의 마법소녀'라고 밝힌 여자의 이름은 아로아. 아로아에 따르면 '나'는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 꼭 필요한 사상 최강의 마법소녀 - '시간의 마법소녀'라는데... 


마법이나 지구 멸망 같은 건 모르지만, 나에게 숨겨진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 '나'는 자신의 운명을 아로아에게 맡겨 보기로 한다. 마법소녀라는 사실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목하고 잘하면 돈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된 사람처럼 얼떨떨하면서도 우쭐한 기분을 느낀다. 그런 '나'가 마법소녀로서 승승장구하는 이야기, 일 줄 알았는데 '반전'이 있으니 꼭 직접 읽어보시길.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놓인 20대 여성이 주인공인 한국 소설은 전에도 많았지만, 이를 마법소녀라는 장르물로 풀어낸 경우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각성이나 마법 도구, 변신 주문 등 마법소녀물에서 흔하게 나오는 소재들을 재치 있게 활용한 점도 좋았다. 전체적으로 발랄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중간중간에 마법소녀물의 의의와 한계 등을 짚고 넘어가는 점이 좋았다. 가령 이런 대목. "가장 약한 존재들에게 가장 필요한 힘이 부여되기 때문에 소녀들에게만 마법의 힘이 부여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그게 내 생각이에요." (120쪽) 


마법소녀물이라는 장르를 차용해 여성의 노동과 연대, 협력에 대해 이야기한 점도 좋았다. 마법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도 할 수 있고, 여성이 독점하며, 미성년인 마법소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마협(전국마법소녀협동조합)이 생겼다는 설정은, 현실의 여성들이 연령 제한, 성별 제한 때문에 취업은 물론이고 아르바이트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며, 미성년자들 중에는 아무런 법적, 사회적 보호 없이 일하는 경우가 아직도 허다하다는 것을 풍자,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인자의 기억법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을 새삼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전에는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일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잘 몰랐는데, 최근 김연수 작가나 황정은 작가의 책을 다시 펼쳐 보면서 예전과는 다른 인상과 감상을 받고 그 시절의 내가 많이 어렸거나 지금의 내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한다.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도 그렇다. 이 책은 2013년 문학동네에서 나온 초판으로 한 번 읽고, 2020년 복복서가에서 나온 개정판으로 두 번 읽었다. 2013년 초판을 읽고 쓴 리뷰를 보니 당시의 나는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소재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친부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인 주인공 김병수가 마지막 살인 이후로 25년 동안 잡히지 않고 살다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 자기 자신이 저지른 범죄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설정의 아이러니가 그 시절의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2020년 개정판을 읽으면서는 '살인'이라는 소재에 좀 더 집중했다. 대체 소설 속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은 누구일까. 초판을 읽을 때는 박주태가 범인인데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김병수가 스스로를 범인으로 오해하고 괴로워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개정판을 읽으니 애초에 박주태라는 인물이 실재하는지도 의문이고, 박주태라는 인물은 실재하지만 김병수가 생각하는 박주태와는 다른 인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범인은 박주태가 아니라 김병수의 머릿속에 있는 박주태, 즉 김병수인 걸까...? 


김병수의 머릿속에 있는 박주태가 김병수의 또 다른 인격이라면, 이 인격의 존재는 인간의 기억을 잡아먹는 알츠하이머병이라는 무시무시한 질병조차 이길 수 없는 악의 거대함, 절대성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소설은 완전범죄를 거듭해 저질러온 악인조차 시간과 늙음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노쇠라는 절대적인 조건의 변화조차도 악인의 본성 혹은 본능은 무력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쿄의 하늘은 하얗다 - 행복을 찾아 떠난 도쿄, 그곳에서의 라이프 스토리
오다윤 지음 / 세나북스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 빼고 다 일본에 있는 것 같아." 얼마 전 트위터에서 본 지인의 트윗이다.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그의 말대로 내 주변에도 팬데믹으로 인한 여행 제한이 완화된 틈을 타 일본에 가 있는 사람이 몇 명 있다. 그중에는 여행이 제한되어 있는 동안 일본에 가서 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다며, 본격적으로 일본 유학 또는 이주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을 만났다. 오다윤의 에세이집 <도쿄의 하늘은 하얗다>이다. 


중학생 때 일본 문화를 접하고 일본에서 살아보고 싶은 꿈이 생긴 저자는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일본 유학을 준비했다. 이후 도쿄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한 저자는 항공사 지상직, 은행원, 글로벌 IT 기업 엔지니어 등으로 일했다. 비록 간절히 원했던 안정적인 직장도, 열정을 바칠 꿈도 찾지 못했지만 '일본어'라는 무기를 얻어서 한국으로 돌아온 저자는 현재 번역가, 작가로 일하고 있다. 


책에서 저자는 학생으로, 그리고 직장인으로 직접 살아보고 겪은 도쿄의 다양한 모습들을 소개한다. 시부야, 기치죠지, 마루노우치, 신주쿠, 긴자 등 도쿄의 여러 지역과 해당 지역에 얽힌 저자의 추억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도쿄가 배경이고 저자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자가 대학원생 시절 영혼의 위로처로 삼았던 거리, 회사원 시절 즐겨 찾았던 음식점 등 도쿄에서 직접 살아본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 전해줄 수 있는 정보가 실려 있어서 일반적인 여행 가이드북 속의 정보와 차별화된다. 


유학 준비 과정과 대학원 생활, 취업 준비, 회사 생활, 일본어 공부 방법, 물가 정보 등도 실려 있다. 일본 기업과 한국 기업의 차이, 일본 기업 중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 등이 자세히 나와 있어서 관련 정보를 찾고 있는 독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일본에서 여러 직종, 여러 기업에서 일해보니 어떤 점이 좋았고 안 좋았는지도 나온다. 지금은 한국에 있지만 언제든 또 다시 일본에 가고 싶다는 저자의 다음 일본 경험담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어질 결심 각본
박찬욱.정서경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웨스 앤더슨의 영화 몇 편을 연달아 보면서, 영화를 다른 예술 장르와 구분되게 하는 속성은 결국 '장면'이라는 생각을 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는데, 이 영화는 독특하고 아름답고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이 나올 뿐 아니라 그 장면들이 일련의 규칙과 질서를 가지고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어서 더욱 훌륭하게 느껴졌다. 대사와 음악도 장면과 잘 어우러져 있어서 영화 자체를 감상하는 재미가 탁월했다. 


장면을 보느라 단어나 문장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고 놓친 대사들이 있을까 싶어서 각본집을 읽어봤다. 영화와 거의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책소개 글을 보니 서래가 직접 지어낸 <산해경> 이야기와 이포로 떠난 해준이 전해 듣게 되는 질곡동 사건의 후일담 등은 영화에 없다고 한다(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다). 영화를 볼 때는 주의 깊게 보지 않았는데 책으로 보니 중요하게 여겨지는 장면들이 있어서 조만간 2회차 관람을 할 예정이다. (아마도) 이 책이 잘 팔려서 스토리보드북도 출간되었던데, 스토리보드북을 읽으면 또 어떤 느낌이 들려나. 스토리보드북 사면 내 통장 잔고 붕괴될 텐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