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나의 3천 엔
하라다 히카 지음, 허하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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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태기(책+권태기)에 빠져 있던 나를 다시 책 삼매경에 빠지게 만든 책이다. 원래는 하라다 히카의 <낮술>이 재미있다는 말을 듣고 구입하려다가 이 책이 먼저 눈에 띄어서 샀는데, 읽어보니 과연 재미있어서 하라다 히카의 모든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 


이 소설은 나이도 다르고 직업도 상황도 다르지만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한 가족 네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IT 기업에 다니며 안정적으로 경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존경하는 여자 선배가 회사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고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될 것 같아 불안을 느끼는 이십 대의 여동생 미호, 사랑하는 남자와 일찍 가정을 이뤘지만 남편이 벌어오는 월급만으로는 친구들처럼 풍족하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초조함을 느끼는 삼십 대의 언니 마호, 아내를 밥 짓는 기계로 여기는 남편에게 불만을 느끼는 오십 대의 엄마 도모코, 연금과 자식들이 주는 용돈만으로는 살기가 힘들다고 느끼는 칠십 대의 할머니 고토코 등이다. 여기에 고토코 할머니의 친구이자 프리터인 오십 대 남성 야스오의 이야기가 고명처럼 얹혀 있는데, 야스오는 말 그대로 고명이고 핵심은 네 여자다. ​ ​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경제 지식이나 절약 노하우를 습득하게 한다는 점에서, 한때 유행했던 '00천재가 된 홍대리' 시리즈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푼돈을 어떻게 쓰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 절약을 하고 싶으면 가계부부터 써라 등 <절약 천재가 된 홍대리>에 나올 법한 조언들...) 그렇지만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이 과거 가정이나 학교에서 어떤 식의 경제 교육을 받았고 그 결과 경제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현재 어떤 처지에 놓여 있고 향후 어떻게 될 거라고 인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통의 스토리텔링 형식의 재테크 책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소설의 전체적인 주제도 결국 돈은 인생을 잘 살기 위한 수단이지, 인생 그 자체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고... ​ 


개인적으로는 나처럼 비혼인 여동생 미호보다, 나와 같은 삼십 대인 언니 마호에게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한 푼이라도 모아보려고 틈만 나면 설문조사, 출석체크, 각종 앱테크하고, 한 푼이라도 아껴보려고 뭐 사고 싶으면 일단 중고 장터부터 둘러보는 사람 나야 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십 대, 삼십 대 내내 회사에서 들러리 취급 당하고 사십 대가 되자마자 회사에서 쫓겨난 미호의 선배 이야기는 정말 남 이야기 같지가 않다. 이걸 개인의 능력 부족 탓하는 미호의 남자친구... (할많하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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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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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트리샤 하이스미스 하면 영화로도 친숙한 '리플리' 시리즈나 <캐롤> 등이 먼저 떠오른다. 둘 다 지금도 여전히 인구에 회자될 만큼 신선하고 세련되어 하이스미스가 얼마나 오래 전에 활동한 작가인지 감을 잡지 못했는데, 2021년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고 한다. 이를 기념해 출간된 소설집 <레이디스>에는 하이스미스가 1936년부터 1949년까지 집필한 단편 16편이 실려 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하이스미스가 '리플리' 시리즈,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캐롤> 등을 발표해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명성을 얻기 전에 쓰인 작품들이다. 그래서 어쩌면 조금은 미숙하고 완성도가 부족한 작품이 있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의외로 첫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읽을수록 놀랍고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금남(禁男)의 공간인 수녀원에서 어릴 때부터 여자로 키워진 남자아이의 이야기를 그린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을 시작으로, 지하철 플랫폼 위에 버려진 가방을 둘러싼 두 남자의 갈등을 다룬 <미지의 보물>,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린 뉴욕의 택시 기사가 시골 마을로 휴가를 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최고로 멋진 아침> 등 작품마다 등장하는 인물 유형과 배경, 소재 등이 다양하고 전개를 종잡을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이스미스가 이후에 선보이게 되는 작품 세계를 미리 엿볼 수 있는 작품들도 여럿 있다.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이라는 단편에는 오랫동안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해 온 남편을 살해하고 예전에 살았던 항구 마을로 돌아가는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워 보이는 생활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공포,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은근하고도 질긴 차별과 억압을 무서우리만치 예리하고 섬세하게 그린 점이 지극히 하이스미스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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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의 빛 - 빛의 세계에서 전해 주는 삶을 위한 교훈
로라 린 잭슨 지음, 서진희 옮김 / 나무의마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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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개인적으로는 영혼의 존재를 확신할 만한 사건을 겪어본 일이 없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무당 또는 영매가 존재하고 그들이 죽은 사람들과 교감하거나 소통하는 모습을 보면 나의 인식 여부와는 별개로 영혼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이의 빛>을 쓴 로라 린 잭슨은 미국의 영매다. 한국에서 무당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듯이 서양에도 영매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상하는 모습이 있는데, 로라 린 잭슨은 그런 모습과 거리가 먼 외모를 지녔다. 학력과 직업도 훌륭하다. 저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다. 변호사 남편을 둔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그런 저자가 영매로서의 능력을 인식한 건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수영장에서 놀다가 문득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랜만에 엄마를 따라서 외갓집에 갔는데 그것이 외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이 일을 어머니에게 말하자 어머니는 자신의 모계에 영매 능력을 가진 사람이 몇 명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그때부터 저자가 영매로서 산 건 아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서양에도 영매가 비과학,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낮잡아보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저자는 자신에게 영매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주위에 철저히 숨기고 학업에 매진했다. 그 결과 우수한 성적으로 명문대에 입학했고 졸업 후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영매의 기질 때문인지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고 바른 길로 이끄는 일이 훨씬 더 적성에 맞는다고 느꼈다. 그래서 교사의 길을 택했고, 20년 동안 훌륭하게 교사직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저자는 학교장의 허락 하에 낮에는 교사로 일하고 밤에는 영매로서 사람들을 만난다. 의뢰인들은 대체로 병이나 사고 등으로 가족이나 연인, 친구를 잃은 사람들이다. 저자는 의뢰인의 사연을 듣고 망자가 보내는 이미지나 단어를 해석해 의뢰인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상담한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의뢰인이 오래지 않아 저자가 망자를 대신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눈물을 터트리는 대목들이 뭉클했다. 


저자는 과학자들이 모여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연구하는 단체인 윈드브리지 연구소에서 공인받은 영매이기도 하다. 영매로서 자신의 영적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위로해 주고 치유해 주는 한편, 영매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과학자들의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다른 영매들과 활발히 교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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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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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김영하 작가의 작품들을 다시 읽고 있다. 재작년과 올해 2차에 걸쳐 출간된 김영하 소설 결정판 박스 세트를 틈날 때마다 한 권씩 읽고 있는 것이다. 어제는 김영하 작가의 데뷔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화자의 직업이 자살 안내자라니 신선하군'이라는 생각 외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자살 안내자인 화자가 그동안 자신이 자살을 도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두 명의 사례를 소개하는 방식을 취한다. 첫 번째 사례의 주인공은 유디트라는 여성으로, 유디트는 형제인 C, K와 삼각관계를 이뤘다가 죽음을 택한다. 두 번째 사례의 주인공은 미미라는 여성으로, 행위예술가인 미미는 비디오 아트를 하는 C와 협업을 했다가 죽음을 택한다. 두 개의 사례 모두 남자는 어리숙하고 우유부단한 반면 여자는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는 이 소설이 출간된 90년대를 강타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구 한국어판 제목은 '상실의 시대')를 연상케 한다. (<에반게리온>도 비슷한 걸 보면 세기말 남성 창작자들의 공통된 성애관이었던 걸까.) 


전체적으로 지금의 김영하 작가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세기말 감성이 낭낭한 소설이지만, 다비드의 유화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시작한다든지,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가벼운 혼란을 준다든지, 종국에는 인간 존재의 허무, 기억의 불완전성, 관계의 허구성 등을 사유하는 점 등은 김영하 작가의 작품답게 우아하고 영리하며 성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 작가의 최신작 <작별인사>는 가장 인간에 가까운 존재로서 만들어진 휴머노이드 '철이'가 스스로 인간 되기를 포기함으로써 역으로 가장 인간다운 존재가 되는 이야기인데, <파괴>의 75쪽에 "마네킹보다 사람은 우월한 존재일까. 왜 만화영화의 요괴들과 사이보그들은 사람이 되지 못해서 안달일까?"라는 문장이 나와서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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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생활 - 부지런히 나를 키우는
임진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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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읽는 생활'을 하기가 힘든 요즘이다. 내가 속한 업계는 연말연시가 대목이라서 일이 많기도 하고, 갑자기 아버지의 눈에 이상이 생기는 바람에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고, 집을 수리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가는 곳마다 들고 다니면서 한 줄이라도 읽으려고 애쓴 책이 있다. 임진아 작가의 신간 <읽는 생활>이다. 


나는 임진아 작가를 좋아한다.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아직, 도쿄>, <오늘의 단어> 등 임진아 작가가 집필한 모든 책을 읽었고, <어린이라는 세계>, <올리브색이 없으면 민트색도 괜찮아> 등 임진아 작가가 그린 삽화가 들어간 책들도 사랑한다. 최근에는 오직 임진아 작가를 보기 위해 북서울 미술관에서 열린 언리미티드 에디션에도 다녀왔고, 임진아 작가의 2023년 일력은 친구한테 생일 선물로 사달라고 부탁해두었다. 


<읽는 생활>은 그동안 출간된 임진아 작가의 책 중에 가장 글밥이 많다. 책 제목이 '읽는 생활'인 만큼 주로 작가이자 독자로서의 경험을 담은 글들이 실려 있지만, 어떤 글에는 어린 시절의 임진아 작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대목도 있고, 또 어떤 글에는 임진아 작가가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그려볼 수 있는 문장도 있다. 


가장 좋았던 글은 서점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책을 닮은 사람'이라는 글이다. "그곳은 요즘 내가 완전히 잊고 지냈던, 실은 내가 향하고 싶던 공기로 그득하다. 어쩌면 빵을 만들지도 모르는 나, 어쩌면 시금치에 다른 간을 더해서 저녁 테이블에 올려놓을지도 모르는 나, 어쩌면 소도시로 여행을 갈지도 모르는 나, 어쩌면 방 구조를 바꿀지도 모르는 나. 그럴지도 모르는 나를 만나면서, 나는 내일이면 넘겨지는 새로운 페이지를 다르게 떠올려보게 된다. 어쩌면 가장 나를 닮은 시간을 서점에서 다시금 만나는 건지도 모른다." (121쪽) 


임진아 작가처럼 나도 서점에 갈 때마다 '내가 완전히 잊고 지냈던' 나, '실은 내가 향하고 싶던', '그럴지도 모르는' 나를 만나고 오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어쩌면 바로 그 기분 때문에, 십 년이 넘도록 독서라는 취미에 매진하고 서평 쓰기라는 습관을 지속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인간은 한 번만 살지만, 책을 읽으면 그 때마다 삶을 다시 살 수 있다고 했던 어느 작가의 말처럼, 현재의 내 삶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때로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책을 읽으면 언제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고 새로운 내가 될 수 있을 듯한 기분을 느끼니까. 


앞으로 또 다시 책 읽기가 힘들거나 버겁게 느껴질 때면 이 책을 책장에서 꺼내 읽어야겠다. 체력이 떨어질 때마다 찾게 되는 영양제처럼, 책과의 거리가 멀어진다고 느낄 때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의 원기와 활력이 채워져서 책을 찾는 손길이 한결 가벼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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