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에 관하여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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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을 경험하면서 분명히 알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건강해야 내가 건강하고 내가 건강해야 다른 사람들도 건강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공간에서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숨을 쉰 것만으로도 전염이 되고 확진 판정이 나고 격리가 되는 사람들을 보면서(혹은 그러한 일의 당사자가 되면서), 나는 마스크를 하지 않아도 손을 씻지 않아도 백신 주사를 맞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대단히 이기적이거나 무지하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율라 비스의 산문집 <면역에 관하여>는 팬데믹 이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팬데믹 이후에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저자는 자신의 건강 문제 때문에 오래 전부터 의학 이슈에 관심이 많았지만,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면서 보다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특히 출산 후 아기들이 의무적으로 접종해야 하는 각종 백신에 대해 알아보고 그러한 백신에 대한 다른 양육자들의 의견을 접하면서, 저자는 백신의 원리를 비롯해 백신을 둘러싼 찬반 양론과 그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기 시작했다. 


백신의 역사는 사실 '백신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종두법을 발견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책에 따르면 중국과 인도,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종두법과 유사한 민간 요법이 시행되고 있었다. 이렇듯 백신은 유서가 깊을 뿐 아니라 효과가 입증되었는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백신의 효과를 믿지 않고, 백신 접종을 하느니 차라리 진짜로 병에 걸리는 편을 택하겠다고 우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아킬레우스 신화를 비롯한 전설과 <드라큘라>를 비롯한 문학 작품 속에서 찾는다. 


저자에 따르면 결국 백신을 비롯한 공중 보건 문제는 힘, 권력의 문제다. 어느 나라 또는 문화권이나 여성, 빈민, 장애인, 외국인, 이민자, 성소수자들을 차별하는 근거로 '더럽고' '냄새나고' '병을 옮긴다'는 식의 수사를 사용한다. 이러한 수사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의학 또는 과학적 시도에 대한 탄압 역시 오래 되었다. 불과 몇 세기 전까지 유럽에서 병을 치료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마법사, 마녀로 매도하여 처벌했다. 백신에 대한 불신 역시 백신의 효과 자체에 대한 불신이라기 보다는 백신으로 얻게 되는 집단 면역, 사회 안정에 대한 불신이다. 


팬데믹 이후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백신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나는 백신 비접종자들이 백신 접종자들에 의해 형성된 집단 면역의 수혜를 입는 것이 참 모순적이면서도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원치 않은) 이로운 결과를 얻는 것는 것은 백신뿐만이 아니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과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에서 비롯될까. 본능일까 환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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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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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었을 때는 작품의 소재(유부남과의 연애)에 대한 생각이 작품 전체에 대한 인상을 덮었다. 그러다 그가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고, 인터뷰나 서평 등을 통해 그에게 문학은 단순한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비(非) 남성, 비(非) 상류 계급 출신으로서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기록한 일종의 증언이자 저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작품을 작품 자체의 줄거리나 작품이 담고 있는 주제 의식에만 천착해 읽는 것은 일차원적이고 표면적인 독서에 불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은 첫 번째 책이 <부끄러움>이다. 


이 책은 아니 에르노가 열두 살 때 집에서 겪은 일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소도시에서 식당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부부의 외동딸로 태어난 그는, 노동 계급 아이들은 잘 가지 않는 기독교계 사립 학교에 진학하면서 처음으로 자신과 가족의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인식했다고 회고한다. 학교에서 아무리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모범생처럼 행동해도, 자신의 가족과 동네 사람들과 공유하는 특질 - 사투리를 비롯한 언어라든가, 낮은 수준의 취향 또는 취미 - 들이 끊임없이 그를 학교 아이들과 구분 지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낮,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견디다 못한 아버지가 낫을 휘두르며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 순간 평생 동안 지속될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날 그가 목격한 부모의 모습에선 그가 상류층을 위한 학교에서 배우는 모범적이고 우아한 관습이나 예절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고, 그때 그는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동안 속해 있었던 세계로부터 배운 것들을 철저히 부정하고 배반해야 하는 잔인한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서는 내가 나임을 부정해야 하는 삶이라니. 아니 에르노가 겪은 일과 정확히 똑같은 체험을 한 적은 없지만, 나에게도 나와 내 가족의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인식하게 된 순간들이 있고, 그 때문에 이 책에서 그가 술회하는 과거의 기억들과 감정들이 그저 남의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식 이전과 이후의 경계가 된 사건을 특정할 수 있는 기억력과, 문제의 사건을 다양한 각도로 생각해 보면서 자신의 가치관과 사유를 다듬어간 노력과 집념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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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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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연말에 <구의 증명>을 읽기로 결심한 건, 이 소설이 영화 <본즈 앤 올>과 함께 묶여서 소개된 걸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본즈 앤 올>은 식인 취향을 가진 두 젊은이의 방황과 사랑을 그린 영화인데(아직 안 봄), <구의 증명>이 <본즈 앤 올>과 연결된다는 건 <구의 증명>에도 그러한 요소들(식인, 젊음, 방황, 사랑)이 있다는 뜻일 터. 그중에서도 '식인'이라는 소재가 소설 속에서 어떤 식으로 활용되었는지(최진영 작가님이 쓴 식인 소설은 어떤 느낌일지)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고, 결론부터 말하면 아주 좋았다. 


이야기는 소꿉친구인 '담'과 '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모와 단 둘이 사는 여자아이 담은 어느 날 우연히 동네에서 남자아이 구를 만나고,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처음에는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을 사귀는 사이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나중에는 정말로 연인이 되었고, 서로에게 다른 연인이 생긴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어느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소울 메이트'로 여기며 그리워 한다. 


이렇게만 보면 흔한 사랑 이야기 같지만, 이 소설의 핵심은 이들의 사랑이 아니라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현실, 더 정확히는 가난이다. 담과 구는 둘 다 유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는데, 특히 구는 부모가 빚 보증을 잘못 서고 이후에도 계속 사채를 쓰는 바람에 십 대 때부터 사채업자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며 학업도 포기하고 밤낮 없이 일하는 신세가 된다. 사람들은 구에게 부모를 버리고 먼 곳으로 도망쳐서 다른 신분으로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하지만, 구는 자신이 도망칠 경우 사채업자들이 부모를 죽이고 자신 또한 잡히면 죽임을 당할 거란 생각에 도망치지 못한다. 


그렇게 점점 더 세상의 끝으로, 끝으로 내몰리던 구는 결국 죽음을 맞고, 구의 짧지만 지난했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목격한 인물인 담은 구의 몸을 땅에 묻거나 태우는 대신 조금씩 먹어서 자기 몸에 담기로 한다. 이는 구가 죽은 후 세상에 혼자 남은 담이 자신의 친구이자 연인이자 형제와도 같았던 구의 흔적을 어떻게든 세상에 남겨놓고 싶은 마음에 하는 행위로도 볼 수도 있지만, 구의 영혼은 무시한 채 구의 몸을 이용하고 착취했던 (구의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에 대한 비판 내지는 저항 행위로도 보인다. 


식인이라고 하면 야만적이고 잔혹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실제로 이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의 몸을 이용하고 착취함으로써 운영되고, 이 과정에서 말 그대로 몸을 다치거나 잃는(먹히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아마도 작가는 이러한 현실을 식인이라는 소재를 통해 고발하고자 한 것 같고, 이러한 생각을 하고 보니 처음에는 (최진영 작가님 소설답지 않게)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던 이 소설이 그 어떤 소설보다도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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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립 사이드
제임스 베일리 지음, 서현정 옮김 / 청미래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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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가 되면 신년 운세를 찾아보는 사람이 많다. 나는 그런 걸 믿지 않지만,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고 어떤 힌트라도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해한다.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이 인생이고,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하고 준비해도 어그러지는 것이 삶이니까. 


영국 작가 제임스 베일리의 소설 <플립 사이드>의 주인공 조시가 딱 그런 상황이다. 12월의 마지막 날. 런던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소인 런던 아이에서 4년 동안 사귄 여자친구에게 청혼한 조시는 매몰차게 거절을 당한다. 이후 여자친구와 함께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고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사장인 회사에서도 잘린 조시는 순식간에 부모님 집에 얹혀 사는 백수 신세로 전락한다. 실망한 조시는 길에서 주운 50펜스 동전에 자신의 인생을 걸어보기로 한다. 힘들게 숙고해서 판단해도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없다면, 그냥 동전을 던져서 결정하는 게 낫다고 본 것이다. 


저녁 메뉴조차도 동전을 던져서 결정하는 조시의 모습을 본 가족과 친구들은 그의 행동을 비웃으며 말린다. 하지만 동전이 알려주는 대로 선택한 결과, 조시는 예전 같으면 가지 않았을 장소에 가거나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조금씩 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가령 친구들과 술집에 죽치고 앉아 노는 대신 TV 퀴즈 대회에 출전하고, 어른이 된 후로는 좀처럼 갈 일이 없었던 내셔널 갤러리에 갔다가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식이다. 





처음에는 동전에 운명을 맡긴다는 설정이 엉뚱하다 못해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동전 하나로 조시의 인생이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니 나도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 판단하기보다는 동전 던지기로 결정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해본 경험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것만을 근거로 판단이나 결정을 하면 매번 같은 판단, 비슷한 결정이 나올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이 소설은 영국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가 넘치는 작품이기도 하다. 조시가 하룻밤 사이에 바뀐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는 유머를 시작으로 친구들과 나누는 농담, 여자친구 후보들에게 건네는 우스갯소리 등등이 모두 재미있으니, 실컷 웃고 싶을 때 이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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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헤매는 마음
임승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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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다. 어릴 때는 연말이 되면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서 한 살 더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멈추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다. 한 해 동안 하루도 온전히 쉰 적이 없는데도 손에 쥔 것은 많지 않고, 이대로라면 내년에는 더욱 막막한 생활이 이어질 거라는 불안감이 강하게 든다. 여기에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는 체력과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부모님의 모습... 이런 나를 본다면 누군가는 '헤매고 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15년 차 방송작가 임승주의 산문집 <기꺼이 헤매는 마음>의 제목을 보았을 때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헤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구나 싶었고, '어차피 헤매는 것, 기꺼이 헤매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책을 읽으며 상상한 저자의 모습은 자유분방한 사람보다는 성실한 모범생에 가깝다. 인생 최대의 일탈이 학창 시절 좋아하는 농구 선수의 경기를 보기 위해 야간 자율 학습을 빠진 것이고(그것도 딱 한 번), 할 일이 많아서 머릿속이 복잡할 때에는 TO DO LIST를 만들거나 다꾸를 하고, 커피 한 잔 고를 때에도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아이스 카페라테만 주문한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마도 나와 MBTI가 같거나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혹시 ISFJ?). 


뭐든 계획대로 하는 것이 좋고 계획대로 안 되면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니 큰일이 생길 때는 물론이고 작은 일만 생겨도 혼란을 느끼고 헤맬 수밖에. 작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첫 직장을 박차고 나와 방송아카데미 구성작가 과정에 등록했지만 예상과 다르게 수업 내용이 흘러갔을 때, 어렵게 섭외한 인터뷰이가 갑자기 거절을 해오거나 예측 못한 일이 생겨서 준비한 원고가 소용없게 되었을 때, 갑자기 병이 나서 스케줄에 차질이 생겼을 때 얼마나 당황하고 힘들었을지 너무나 공감이 되고 내 일처럼 안타까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추억이 되고 교훈이 남는 건 어째서일까. 저자는 방송아카데미 시절 쓸데없다고 느꼈던 수업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고, 유난히 애를 먹은 촬영이 가장 보람 있었고, 아파서 쉴 수 밖에 없었던 시간들 덕분에 절이나 교회, 사원 등에서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기도하고 기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쓴다. 그러니 삶이 태클을 걸어올 때마다 '기꺼이' 걸려 넘어져도 괜찮다고 말한다. 


"앞으로는 이해 가능한 슬픔의 영역이 더욱 넓어지면 넓어졌지, 좁아지진 않을 것이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이별하고 세상 무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슬픔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이기에, 그것에 성장이라 이름 붙이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에 오늘의 우리는 다들 힘들고, 그 힘들다는 이야기를 나는 이렇게나 길게 길게 쓰고 있다." (246-7쪽) 


올해는 힘들었지만 내년에는 더 힘들 수도 있고, 어쩌면 매년 점점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그 때마다 무너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점점 더 강해지는 내가 되기를(암 안티프래질~ 안티프래질~). 헤매지 않고 지루하게 살기보다, 기꺼이 헤매며 즐겁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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