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의 소설
정세랑 지음 / 안온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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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보다도 짧은 길이의 소설들을 엮어서 만든 미니 픽션집이다. 길이는 짧아도 "정세랑이 정세랑 했다."라는 생각이 족히 들 만큼 한 편 한 편이 재미있고 통쾌하다. 제목의 '아라'는 정세랑 작가가 받침이 없는 이름을 찾다가 고른 이름인데,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여러 작품에서 썼다고 한다. 정세랑 작가는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작품에 차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e.x. 재인, 재훈, 재욱), 아라는 가까운 사람 중에 같은 이름이 없어서 편히 쓰게 되고, 가장 과감한 주인공에게 쓰게 된다고 한다. (아마도 작가의 분신 아닐까) 


이 책에 실린 모든 소설이 각자의 매력 때문에 좋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10시. 커피와 우리의 기회>이다. 2019년 10월 <월간 윤종신>에 소개된 소설인데, 체질이 바뀌어 하루에 딱 한 잔만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된 주인공이 단골 카페에서 새로 들어온 커피를 시음하는 내용이다. 다른 작품에서 보지 못한 특별한 사건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전혀 새로운 기법이 쓰인 것도 아니지만, 평범한 일상이 비범하고 환상적인 색채를 띠는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한 정세랑 작가의 특기가 잘 발휘된 작품이라고 느꼈다. 


후반부에 실린 <현정>은 정세랑 작가의 팬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서점에 갔다가 하필이면 그때 지진이 나는 바람에 서가 사이에 갇혀버린 주인공이 생수 한 병과 초코칩 쿠키 한 박스로 며칠을 견디며 읽은 책들에 관한 소설인데, 언급된 책들은 곧 정세랑 작가의 추천 도서 목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2020년 알라딘 17주년 기념 짧은 소설 모음 <열일곱 : 열일곱 명의 작가 열일곱 개의 이야기>에 소개되기도 했으며, 현재 알라딘에서 무료 이북으로 읽을 수 있다(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8241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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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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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수입업자로 일하며 세 식구의 가장으로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중년 남성 김기영은 사실 80년대에 북한에서 남한으로 파견된 간첩이다. 간첩이라고는 해도 그의 직속 상관이 일찍이 북한에서 숙청되어 간첩다운 일을 해본 건 예전 일이고 그나마도 손에 꼽을 정도다. 부모는 물론 일가 친척도 없으면서 혼자 힘으로 번듯한 사업체와 서울의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할 만큼 남한 생활에 잘 적응한 그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평소처럼 사무실에 출근해 컴퓨터를 켰는데 당장 24시간 안에 북한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이어지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는 김기영과 김기영의 아내, 김기영의 딸의 시점으로 쓰인 이야기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주된 서사는 물론 김기영의 이야기인데, 간첩으로 남파되기 전후의 그의 삶과 현재의 그의 삶이 묘사되는 방식이 상당히 흥미롭다. 김기영은 북한에서 사실상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남한에서는 확실한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적응력과 위장술로 북한과 남한 사회 양쪽에 완벽하게 동화되었고, 오랜 세월을 함께 산 가족이나 친구에게조차 본심을 털어놓거나 진짜 정체를 들키는 일 없이 훌륭하게 자신을 위장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 모든 것과 단절해야 하는 순간이 임박해 왔을 때, 그는 거짓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는 것과, 거짓 위에 쌓아 올린 관계조차도 끊어낼 때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남편 혹은 아버지의 극적인 하루를 전혀 알지 못하는 아내와 딸의 서사도 흥미롭다. 이 소설이 한국 독자들에게는 주로 남북 분단 문제를 다룬 소설로 읽힌 반면,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민자 문제를 다룬 소설로 읽혔다는 점도 신기하다. 2006년에 초판을 읽은 독자들과 지금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의 감상이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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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상자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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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독감을 호되게 앓았는데 그때 - 잠은 오지 않고 그렇다고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 읽은 책 중에 하나다. 한국에는 2022년에 소개된 책이라서 미야베 미유키의 최신작인 줄 알았는데, 일본 초판은 1996년에 나왔다고 해서 놀랐다. 미야베 미유키가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매우 인기 있는 작가라서 구간은 거의 다 한국에 소개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소개되지 않은 책이 있다니... (심지어 그 사이 신간이 또 나왔다. 무려 SF...) 


표제작 <인내상자>는 에도의 전통 과자점 오미야가 배경이다. 이 과자점에는 당주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인내상자'라는 것이 있다. 인내상자를 물려받은 당주는 절대로 상자 안을 열어 봐서는 안 되고(열면 가게에 재앙이 닥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상자를 지켜내야만 한다. 열네 살 나이에 오미야의 새 당주가 되어 인내상자를 물려받은 오코마는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은 욕망과 상자를 지켜야 하는 의무 사이에서 갈등한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와 비슷한 이야기인데, 개인의 욕망을 자제하고 집단의 전통을 지키는 일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이야기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옛날(이 배경인) 이야기에 해당하지만, 돈을 대가로 거부하기 힘든 매력적인 제안을 받으면서 인생이 바뀔 뻔한다거나, 믿고 따랐던 사람이 뒤로는 나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배신감을 느낀다거나 하는, 현대인들도 충분히 겪을 법한 일들이 대부분이라서 흥미진진하고 동시에 유익하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미야베 월드 2막'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먹고사는 일이 최우선인, 경제적으로 넉넉하다고 말하기 힘든 형편의 서민들이라는 점도 감정이입이 잘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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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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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나오키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하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서점대상까지 수상한 작품이라는 홍보 문구에 혹해 읽게 된 소설이다. 작가가 대만 출신이라서 그런지 일본 소설인데 배경이 대만이고, 역사 소설, 추리 소설적인 요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청춘 소설의 느낌이 강하다. 개인적으로 '대만판 69(무라카미 류의 소설)' 같다고 느꼈는데, 작가 프로필을 보니 나이도 비슷하고(히가시야마 아키라는 1968년생, 무라카미 류는 1969년생), 소설 제목도 무라카미 류(龍)의 류와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류(流)다. 


이야기는 예치우성이 1975년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대만의 장제스 총통이 사망한 그 해,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겪은 후 온가족을 데리고 대만으로 피신해 일가를 이룬 예준린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최초 발견자이자 예준린이 가장 아끼는 손주였던 예치우성은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느끼고 열심히 범인을 찾는다. 그러나 그럴수록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질 나쁜 학생들과 얽히는 일이 늘어나고, 그런 모습을 지켜본 가족들(특히 부모님)은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딴청을 피운다며 예치우성을 꾸짖는다. 


이후 예치우성은 여느 청춘들처럼 험난한 인생을 산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군대에 끌려가고, 첫사랑과 헤어지고, 취업에 고전하고, 그러다 어찌어찌 겨우겨우 사회에서 자리를 잡는다. 그 사이 세상도 변한다. 40년 간 지속된 계엄령이 해제되고, 탈냉전 무드에 맞춰 대만과 중국 관계도 해빙 무드로 바뀐다. 그동안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겠다는 생각을 잊지 않고 있었던 예치우성은 중국 본토에 있는 할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와 사건의 진실은, 480쪽이 넘는 이 두툼한 소설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이면서도 애잔하다. 


이 소설은 줄거리 자체도 흥미롭지만,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 대만의 역사와 대만인과 중국인, 대만 본토 출신의 본성인과 중국에서 건너온 외성인 간의 갈등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공부가 된다. 대만인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 (비슷한 시기에 똑같이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한국인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도 비교할 수 있고, 일본과 대만의 경제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일본의 경제 상황에 따라 대만의 경제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도 알 수 있다. 한 시대의 반영이자 한 세대의 증언과도 같은 이 소설. 과연 나오키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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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탕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7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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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다는 건 한때는 머물렀다는 뜻이다.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을 때 우리는 떠나고, 더 이상 떠날 수 없을 때 우리는 머무른다. 이승우의 소설 <캉탕>의 배경인 대서양 인근의 작은 항구 도시 캉탕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어서 떠나온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주인공 한중수도 그렇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이룬 한중수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이명 때문에 몸도 마음도 피폐한 상태가 된다. 보다 못한 정신과 의사인 친구 J가 휴양 차 캉탕에 가보라고 조언한다. 그곳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자신의 외삼촌을 만나보면 도움이 될 거라면서 말이다. 


한중수가 캉탕에 도착해 보니 듣던 대로 캉탕은 어업을 주로 하는 작은 도시인데, 식당을 한다던 J의 외삼촌 핍은 오래전 식당을 접고 병원에 입원한 아내를 돌보느라 정신없는 모습이다. 한중수는 핍에게 말 한 번 붙이기도 힘든 상황에 실망하지만, 이내 기운을 되찾고 자신의 방식으로 도시 이곳저곳을 여행한다. 핍이 예전에 운영하던 식당에 가보기도 하고, 과거의 핍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핍의 사연을 듣기도 한다. 또한 한중수는 핍이 운영했던 식당에서 전직 선교사 타나엘을 알게 되고 오래지 않아 그의 사연을 듣게 된다. 


한중수와 핍, 타나엘은 어떤 이유로 원래 살던 곳에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되어 캉탕으로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을 캉탕으로 오게 한 '세이렌(사이렌)'은 각각 형태도 내용도 다른데, 이들을 예정된 (것으로 여겨진) 삶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길로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돌아감이 정말 예정되지 않은 일이었을까. 의도하지 않은 일탈이나 방황처럼 여겨진 우회가, 실은 각자의 삶에서 반드시 달성해야 할 사명이자 의무였던 건 아닐까.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대한 인용이 많이 나와서, 언젠가 <모비딕>을 읽은 후 다시 이 소설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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