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1
아니 에르노 지음, 김선희 옮김 / 열림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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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가 말년에 치매를 앓았던 어머니를 돌보며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처음에 작가는 자신의 집에 어머니를 모셨지만, 이혼 후 혼자서 두 아들을 키우고 생계를 위해 일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까지 돌본다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게 되었는데, 분명 병원에서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케어하고 있고 자신도 열심히 문병을 하는데도, 자식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지 못하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러나 작가가 이십 대일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훨씬 오래 사셨고, 그만큼 말년에 작가와 함께 보낸 시간도 길었으니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돌보면서, 작가는 그토록 강하고 똑똑하고 무섭기까지 했던 어머니가 이렇게 약하고 무지하고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넘어 공포를 느낀다.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아마 매우 높은 확률로) 자신의 미래이기도 할 터.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겪게 되는 노화와 병, 죽음에 관한 성찰이 담긴 문장들이 깊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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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옷장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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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전작 읽기에 도전 중이고, 이제 몇 권 안 남았다. <빈 옷장>은 아니 에르노가 1974년에 발표한 첫 소설로, 전작 읽기에 도전 중인 사람으로서는 작가의 첫 책에서 시작하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막상 읽어보니 문체나 형식 면에서 나중에 출간된 책들에 비해 훨씬 낯설고 어려운 면이 없지 않고, 내용도 아니 에르노가 이후에 발표한 책을 읽고 나서 읽으면 더욱 잘 이해되기 때문에 (전작 읽기 도전) 후반에 읽은 게 정답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스무 살 대학생인 화자가 임신 중절 수술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서 불법이었던 낙태 수술을 받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정신을 잃어가는 화자는 꿈을 꾸듯 과거로 돌아간다. 식당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며 외동딸을 키운 부모. 그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입학한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화자는 우수한 성적과 치열한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힘든 계층 간의 경제적, 문화적 격차를 깨닫고 깊은 열등감, 결핍감에 시달린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지면, 시골이 아닌 수도에 살면 이 모든 차이나 차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대학에서 만난 남자친구로 인해 임신을 하고, 몇 달 사이에 장래가 촉망되는 대학생에서 불법 낙태 수술대에 오르는 신세로 전락한 화자는 "내가 배웠던 모든 것에 구역질이 난다. 나는 사방에서 농락당했다."(15쪽)라고 느낀다. 


그러나 화자에게 있어 진정한 고통은 낙태 그 자체가 아니라, 낙태를 한 후에도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부모와 사회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적어도 경제적으로 자립할 때까지는. 아니 어쩌면 그 후에도 영원히 자립할 수 없을 것 같은(교사가 되면 경제적 자립은 가능하겠지만, 애초에 교사는 부모가 자신에게 바란 직업이지 자신이 원해서 택한 직업이 아니므로 '자립'한 삶이라고 부를 수 없다) 강력하고 불길한 예감. 


문학도로서 자신이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공부해온 문학에 대해 회의하는 대목도 나온다. "빅토르 위고나 페기처럼 교과 과정에 있는 작가를 공부해 볼까. 구역질이 난다. 그 안에는 나를 위한 것, 내 상황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9쪽) 읽을 것은 많지만 정작 '나를 위한' 읽을 것은 없다는 발견과 인식이 작가를 만들고 창작물을 낳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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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딸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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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에게 그가 태어나기 전 죽은 언니가 있다는 사실은 다른 책에 언급된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다른 딸>은 바로 그 죽은 언니에 대한 책이다. 아니 에르노는 열 살 때 어머니가 이웃과 나누는 대화를 엿듣다가 어머니가 자신을 낳기 전에 다른 딸을 낳았고 그 딸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두 분의 입에서 죽은 딸, 즉 아니 에르노의 언니가 언급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아니 에르노도 부모님에게 언니에 관해 묻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시 아니 에르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때까지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부모의 유일한 딸이며 그들의 사랑을 받는 둘도 없는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부모에게 다른 딸이 있었고, 자신은 그 딸이 죽고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한, 일종의 대체물 또는 대용품으로서 잉태되고 출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놀랄 수밖에. 심지어 그 사실을 부모로부터 직접 들은 것도 아니고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하고만 공유하는 비밀로서 알게 되었으니, 열 살의 어린 아이로서는 존재 불안과 깊은 배신감, 우울감을 느낄 만하다. 


어머니는 "그 아이는 쟤보다 훨씬 착했어요."라며 아니 에르노와 죽은 언니를 비교하는 말까지 했고, 이 말은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아니 에르노는 성장 과정 내내 언니처럼 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언니의 대체물로 살지만은 않겠다는 저항감 사이에서 갈등했다. 차라리 언니가 살아있었다면 부모님이 언니를 그토록 신성화하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그의 부모는 자식을 딱 한 명만 가질 계획이었기 때문에 언니가 살아있었다면 애초에 그는 태어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언니의 죽음을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죽은 언니의 존재 혹은 부재는 아니 에르노의 삶에 길고도 진한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그 그림자로 인해 그가 내내 음울한 삶을 산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은 언니와 같은 성녀가 아니고, 아무리 노력해도 언니만큼 착한 딸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일찍 깨닫지 않았다면, 부모의 기대를 거스르는 결정을 내리거나(낙태, 이혼) 사회적으로 지탄 받을 수 있는 연애에 과감히 뛰어들거나 그 모든 일을 글로 써서 발표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물론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위대한 작가는 결국 위대한 작가가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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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 혹은 침묵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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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에 출간된 아니 에르노의 두 번째 소설이다. 주인공은 '안'이라는 소녀인데, 아니 에르노의 첫 번째 책 <빈 옷장>의 주인공 '드니즈'와 마찬가지로 작가 자신의 출신 배경과 성장 과정, 실제 경험 등을 많이 반영하여 만든 - 사실상 작가 자신과 거의 동일한 - 인물로 보인다. 


중학교 졸업 학년인 안은 학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이지만,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 대부분인 학교에서 몇 안 되는 프롤레타리아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안의 부모는 안이 학교 아이들에게 잘 보이도록 새 원피스를 사달라고 하거나 친구들과 놀러 가겠다고 하면 공부나 하라고 야단치고, 그럴수록 더욱 더 깊은 열등감과 반항심을 느끼게 된 안은 시험이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면 기필코 학교 아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뜨거운 연애(+첫 경험)를 하겠다고 결심한다.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십 대 청소년이 주인공인 성장 소설(및 영화, 드라마 등)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변주된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다 만난 남자아이와 썸을 타다가 헤어지고, 또 다른 남자아이와 썸을 타다가 이번에는 좀 더 진도를 나가보고 그러다 또 헤어지고... 그렇게 몇 번의 연애를 거듭하다가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되는 이야기, 라면 로맨스(라는 이름의 판타지) 소설이 될 텐데, 이 소설이 로맨스 소설로 분류되지 않는 건 로맨스 이상(또는 이외)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방학 동안 몇 명의 남자와 아주 짧은 연애를 즐긴 안은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충격을 받게 된다. 첫째는 자신의 계급에 대한 인식인데, 이는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 자신은 노동자 출신인 상인 부모 슬하에서 자라서 중상류층의 언어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습득하지 못했고 그만큼 뒤처져있다는 - 자각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식이다. 둘째는 자신의 성별에 대한 인식인데, 이는 외동딸로 자랐고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안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안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과, 사회가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연애라는 일대일 관계에서조차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e.x. 남자가 여러 여자를 만나면 능력 좋다는 소릴 듣고, 여자가 여러 남자를 만나면 걸레라고 불리는 것) 


방학이 끝나고 고등학생이 된 안은 겉으로는 성실하게 학교 생활을 하지만, 속으로는 예전에 믿었던 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읽고 싶지 않고 쓸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이 책의 15페이지에 나온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걸 느긋하게 맞이하고 누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진리를 왜 그 때는(어쩌면 지금도) 몰랐을까(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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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용도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마크 마리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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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만 보고 사진 속 사람들의 감정이나 상태를 섣불리 짐작하는 일이 왕왕 있다. 웃고 있는 걸 보니 기분 좋은가 보다, 손을 잡고 있는 걸 보니 많이 친한가 보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사진은 사진 속 사람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일이나 처해 있는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때로는 진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실을 왜곡하거나 호도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아니 에르노와 마크 마리의 산문집 <사진의 용도>를 읽으면서 느낀 것도 바로 그것이다. 


<사진의 용도>는 연인 관계인 아니 에르노와 마크 마리가 정사를 치른 후에 정사를 치르기 직전 벗어놓은 옷가지나 신발, 흐트러진 침대나 소파 등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각각의 사진에 대해 각자가 쓴 짧은 에세이를 엮은 책이다. 이렇게 보면 두 사람이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를 기록한 로맨틱한 분위기의 책일 것 같지만, 사실 이 책에는 이 책에 실린 사진들만 봐서는 알 수 없는 - 당시 이들을 그 무엇보다 고통스럽게 했던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당시 아니 에르노가 유방암을 진단받고 투병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이들은 생과 사의 기로에 서 있었고 그 때문에 매일 괴로워했지만, 적어도 정사를 치르는 순간에는 죽음과 이별에 관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그 순간을 기록한 사진에는 그들이 그 때 어떤 상황이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는 모습이나 수술대에 오른 상황을 기록했다고 해서 그것이 (죽음의 공포와 이별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사랑했던) 그 시절의 두 사람을 온전히 담아냈다고 할 수는 없고...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람이란 무엇인가. 자꾸만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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