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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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부터 시작한 아니 에르노 전작 읽기의 끝이 보인다. 이제 <한 여자>, <여자아이 기억>, <칼 같은 글쓰기>만 읽으면 국내에 출간된 아니 에르노의 책은 전부 읽은 셈이 된다. 한 작가의 작품을 한 번에 몰아서 읽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아니 에르노의 작품 중에는 자전적인 것이 많고, 작가와 작품의 거리가 짧은 만큼 독자인 나에게 전해지는 자극이 커서, 이토록 강렬한 독서 체험은 이번이 처음이고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얼어붙은 여자>는 아니 에르노가 1981년에 출간한 세 번째 책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주변에서 보았던 여자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머니와 이모들, 이웃 아주머니들 등 저자가 어릴 때 보았던 여자들의 모습은 책이나 영화에 나오는 가녀리고 우아한 여성들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많이 먹고 마시고, 실컷 자고 열심히 일했으며, 크게 웃고 울고 떠들었다. 저자의 부모는 함께 식당 겸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호방한 성격의 어머니가 주로 청소와 빨래, 돈 관리를 담당했고, 섬세한 성격의 아버지가 요리와 설거지, 딸의 등하교를 도맡았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저자는 남녀의 성역할이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학교에 입학하고 자신과 다른 계층의 아이들을 사귀면서, 저자는 이제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르주아 또는 중산층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들의 세계에서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성격과 태도도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남자라면 야망을 크게 가지고 점점 더 많은 성취를 하는 것이 장려되는 반면, 여자는 그러한 꿈을 가지는 것이 장려되지 않았고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남자를 서포트하는 역할에 머무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저자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그렇게(남자의 서포트나 하는 여자로) 키우지 않았다. 하나뿐인 딸에게 무리를 해서라도 좋은 교육을 받게 해줬고,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일찍 시집 가서 아이를 키우며 젊은 시절을 보내기 보다는, 안정된 수입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직업을 가지라고 재촉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저자는 좋은 대학교에 들어갔고, 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차근차근 밟았다. 결혼이라는 폭탄이 터지기 전까지는. 


대학 졸업 즈음 결혼한 저자는 결혼한 후에도 순조롭게 학업을 이어가서 원하던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곧바로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하면서 교사의 꿈은 점점 멀어졌다. 문제는 결혼 직후만 해도 저자와 비슷한 처지였던(고학력 대졸 실업자) 저자의 남편은 아내의 서포트와 기혼자, 가장 특혜 등을 누리며 취업, 승진, 연봉 상승 루트를 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도 남편의 성공으로부터 덕을 보기는 했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콩고물일 뿐. 기껏해야 남편이 흘리는 콩고물이나 받아먹으려고 여자들이 어릴 때부터 피 땀 눈물 흘리며 공부하고 입시 치르고 취업 준비하는 건 아니잖아...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18년이나 결혼 생활을 지속했다는 게 대단하고(이 책 내고 1년 후 이혼했다고), 첫째 낳고 어렵게 교사 자격증 따서 교사 일 시작한 후에 학교에 기혼 유자녀인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둘째를 낳는다(?)는 사고방식이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된다... 전체적으로 <82년생 김지영>의 프랑스 버전 같기도 한데, 이 책은 1981년에 나왔고 <82년생 김지영>은 2016년에 나왔다는 거(대체 한국은 얼마나 후진국인 거야)... 지금 프랑스 여성들의 삶은 어떤지도 궁금하다. 이 시절보다는 나아졌을까 아니면 도긴개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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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 베이징 - 박제가의 그림에 숨겨진 비밀
신상웅 지음 / 마음산책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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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웅 작가의 전작 <쪽빛으로 난 길>을 워낙 재밌게 읽어서 이 책도 믿고 구입했다. 이 책은 저자가 우연히 책에서 그림 한 점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림의 제목은 <연평초령의모도>.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가 그렸다고 알려진 이 그림은, 언뜻 보기에는 그 시절에 그려졌을 법한 평범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청나라에 저항한 명나라 장수 정성공인데,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 명나라 장수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한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사람이 전체를 다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나누어 그린 것처럼 완성도나 수준의 차이가 느껴진다. 정성공의 어머니는 일본 여자인데 중국 복식 차림인 것도 이상하고, 정성공과 정성공의 어머니가 있는 건물의 양식이 일본이나 중국의 건물 양식이 아닌 것도 이상하다. 대체 누가 어떤 연유로 이런 미스터리어스한 그림을 그린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관찰과 조사에 근거한 추론을 펼칠 뿐, 실제로 누가 이 그림을 그렸다고 명시되어 있는 답을 찾아내거나, 저자가 찾아낸 답이 맞는지 틀린지 권위자 또는 전문가로부터 확인을 받지는 못한다. 그러나 저자가 답을 찾기 위해 일본의 히라도, 나가사키, 오사카와 중국의 취안저우, 샤먼, 광저우, 양저우, 베이징 등을 여행하는 과정은 충분히 흥미롭고 다양한 방면으로 공부가 된다. 작가의 다음 책을 읽고 싶은데 나오려나. 나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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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 1 - 시원한 한 잔의 기쁨
하라다 히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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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은 1,2,3권 다 읽으면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아직 2,3권을 안 읽었고 언제 읽을지 몰라서 1권만 지금 리뷰를 쓴다. 하라다 히카의 <할머니와 나의 3천 엔>, <76세 기리코의 범죄일기>를 읽고 이 작가는 여자 혼자 돈 벌고 먹고 사는 이야기를 잘 쓴다고 생각했는데, <낮술>도 예외는 아니다. 


주인공 쇼코는 서른한 살 여성으로, 현재는 이혼했고 하나뿐인 딸은 남편이 키우는 상태다. 쇼코는 동창이 사장인 인력 사무소에서 '지킴이'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 특이하게도 쇼코는 낮이 아니라 밤에 일을 하는데, 가령 밤에 집을 비워야 하는 사정이 있는 사람을 대신해 그의 반려견, 아픈 아이, 노모 등을 돌보는 것이다. 그렇게 밤부터 다음 날 오전 시간까지 일을 한 쇼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심을 먹는 시간에 그날의 첫 끼를 먹으면서 간밤의 피로를 씻어주고 이후에 이어질 잠을 부르는 '낮술'을 마신다. 


이 소설은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와 구성이 비슷한 면이 없지 않다. 혼자 살고 혼자 일하는 주인공이 매일 다른 장소에서 일을 하고, 일을 마친 후에는 급격한 허기를 느끼며(하라가 헷따!) 자신의 위장이 원하는 음식을 찾아낸 다음 맛있게 먹는다. 차이가 있다면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은 술을 절대 안 마시는 반면, <낮술>의 쇼코는 때론 밥보다 술이 먼저일 만큼 술을 좋아한다는 것 정도? 


또 다른 차이점은 <고독한 미식가>에는 고로상의 개인사가 적은 반면, <낮술>에는 쇼코의 개인사가 적지 않게 나온다. 여기서 개인사란 쇼코가 과거에 원치 않은 임신으로 준비되지 않은 결혼을 한 바람에 결혼 생활 내내 불행했고 이혼 후에도 죄책감과 후회에 시달리는 것인데, 어차피 벌어진 일 이제 와서 생각해 봐도 별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는 쇼코의 모습과, 지금부터라도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애틋하기도 하고 남 같지 않기도 하고... 얼른 2,3권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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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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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이랑 작가님이 강력 추천해서 읽게 된 책이다. 맨 처음에 실린 단편 제목이 <화분>이라서 식물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임이랑 작가님(a.k.a. 식물이랑)이 추천하실 만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 화분이 그냥 화분이 아니야... 무려 아버지의 유골을 묻은 화분. 근데 화분이 말을 해. 정확히는 화분에 심은 식물이.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화분 말고 말하는 화분이 또 있어. 그 화분하고 이 화분하고 만나서 나중에는... 아무튼 재밌으니 읽어보시라. (참고로 팟캐스트 <임이랑의 식물수다>에 이유리 작가님이 출연하신 회차가 있으니 궁금하면 들어보시기를.)


[시즌2] 5화. 브로콜리 펀치의 사정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73072/episodes/24353596

[시즌2] 6화. 소설가의 식물 생활 feat. 이유리 작가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73072/episodes/24353598


이어지는 <둥둥>은 좋아하는 아이돌에게 인생을 건 열성팬이 바다에 빠졌다가 캐리어에 매달려 '둥둥' 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표제작이기도 한 <브로콜리 펀치>는 복싱 선수인 남자친구의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하는 상황을 그린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단편은 <왜가리 클럽>이다. 다른 단편들과 달리 (화분이 말을 한다거나 손이 브로콜리로 변하는 식의) 판타지적인 설정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MBTI가 I로 시작하는) 내향인인 나로서는 낯선 동네에서 낯선 사람들과 우연히 친구가 된다는 상황이야말로 가장 비일상적이고 환상적이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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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하이웨이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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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크고 두툼해서 다 읽는 데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읽었다. 에이모 토울스의 이참에 에이모 토울스의 다른 책도 다 읽어보려고 살펴봤는데, 국내 출간작 3권 중에 <모스크바의 신사>는 진작에 읽었고 <우아한 연인>만 아직 안 읽어서 바로 구입해 읽고 있다(이 책도 너무 재미있다). 


1954년 네브래스카. 소년원에서 퇴소한 열여덟 살 소년 에밋은 원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에밋의 아버지는 최근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에밋이 어릴 때 집을 떠났다. 에밋은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린 동생 빌리를 데리고 샌프란시스코로 떠날 계획을 세우는데, 에밋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긴다. 소년원의 문제아 더치스와 울리가 원장의 차 트렁크에 몰래 숨어서 에밋을 따라온 것이다. 고지식한 성격의 에밋은 더치스와 울리를 소년원으로 돌려보내려고 하는데, 그때 더치스가 솔깃한 제안을 한다. 울리의 가족이 사는 뉴욕으로 가서 울리의 할아버지가 울리에게 남긴 신탁자금을 찾아 나눠갖자는 것이다. 


사실 에밋은 더치스의 제안을 내켜 하지 않았는데, 독서광인 에밋의 동생 빌리가 자신이 사랑하는 책의 저자가 뉴욕에 산다며 뉴욕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그렇게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잇는 링컨 하이웨이를 타고 뉴욕으로 떠나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 과정에서 온갖 사건과 사고, 만남과 배신, 우연과 필연 등등이 이어지며 네 소년은 흩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도 하고, 만났다가 다시 흩어지기도 한다. 나중에 이 모든 일들이 겨우 열흘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걸 알고 놀랐는데, 그만큼 에피소드들이 극적이고 장면에 대한 묘사나 설명이 섬세하며 탁월하다. 


미성숙한 소년 넷이 일생일대의 모험을 하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같은 설정의 영화 <스탠 바이 미>와 스티븐 킹의 원작 소설 <시체(the body)>가 떠오르기도 했다(에이모 토울스는 제2의 스티븐 킹이 될 수 있을까? 그럴지도...). 이참에 다시 한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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