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정현 작가의 소설을 좋아한다. 역사와 젠더, 미스터리와 스릴러. 내용으로 보나 형식으로 보나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다 있다. <마고>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시작된 한반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연가성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종로경찰서의 검안의로 일한다. 어느 날 연가성은 미군에 의해 살해된 윤박 교수의 시체를 검안하게 되는데, 범인이 미군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미군정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거라고 판단한 미군정 측 조사관은 윤박 교수와 관련이 있는 여자 셋 중 한 명을 범인으로 만들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사실 연가성은 종로경찰서 검안의인 동시에 '세 개의 달'이라는 가명을 쓰는 탐정이기도 하다.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에, 연가성은 어릴 때부터 소꿉 친구이며 현재는 같이 사는 친구이고 신문사 문화부 기자인 권운서와 함께 세 여자에 대해 조사하기로 한다. 그런데 세 여자와 윤박 교수의 관계를 알면 알수록, 이들이 윤박 교수를 죽일 만한 이유, 즉 범행 동기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뿐이다. 또한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알아도 적대시하는 관계로 보였던 세 여자는, 사실 서로를 구하고 살리는 관계라는 것도 알게 된다. 


'서로를 구하고 살리는 관계'는 연가성과 권운서에게도 해당된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로 살고 싶었던 연가성과,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살고 싶었던 권운서는 각각 다른 상대와 원치 않는 결혼을 한 후 이혼하고 둘이 함께 산다. 친구이지만 - 누구보다 상대를 아끼고 위해준다는 점에서 - 연인 같기도 한 연가성과 권운서를 보면서, 성별에 대한 사회적 제약은 물론 신체와 정신의 한계마저 극복한 사랑의 형태를 본 듯한 기분이 든 것은 내 착각일까. 연가성과 권운서의 관계성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흥미로워서, 둘의 또 다른 이야기를 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괴 2 - 산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다나카 야스히로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나카 야스히로는 일본 전국을 다니면서 산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기자이자 작가다. <산괴> 시리즈는 그런 그가 산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직접 들은 다양한 실화들을 르포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일단 실화라는 점이 눈길을 사로잡고, 겉보기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실은 귀신을 보는 능력이 있다거나, 능력이 없어도 귀신 비슷한 존재를 본 적 있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롭다. 


최근에 출간된 <산괴> 2권에는 1권과 마찬가지로 산사람들이 실제로 체험한 다양한 기담 혹은 괴담들이 실려 있다. 일본에서는 요괴나 신령 등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의 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모노'라고 부른다. 산은 공간 자체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일반적인 도시나 마을과는 동떨어진 공간이기도 하고, 동물이나 곤충 등 다양한 생명체가 살기 때문에, 출현하는 모노의 종류나 모노가 출현하는 방식 등이 다양하고 또 특이한 편이다. 


가령 아오모리시에 사는 한 남성은 어릴 때 집 바로 뒤에 있는 산에서 도깨비불을 본 적이 있다. 도깨비불이 나타난 장소는 공교롭게도 죽은 사무라이가 묻혀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그 도깨비불은 무덤 속 사무라이의 원혼이었을까? 미스터리 핫스폿으로 유명한 핫코다 산의 한 여관에는 메이지 시대의 육군 보병 모습을 한 귀신들이 나타난다는 괴담이 전해진다. 이 귀신들은 여관 내부를 배회할 뿐 사람들을 해치진 않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무섭지 않은, 우스운 이야기도 몇 편 있다. 산사람들 사이에는 산의 신은 여성이고, 젊은 사내의 남근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사냥꾼이 산의 신에게 잘 보이려고 입고 있던 바지와 속옷을 다 벗고 그것을 흔들었더니 순식간에 동물들이 주변에 몰려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태로는 도저히 총을 쏠 수 없었다는 것(ㅋㅋㅋ). 이런 걸 제 꾀에 제가 빠졌다고 하던가. 과연 사냥꾼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려라 메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자이 오사무 하면 한국에선 <인간실격>이 단연 유명하고 일본에서도 그렇지만, 일본에선 <인간실격> 못지 않게 자주 언급되고 인용되는 반면 한국에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 <달려라 메로스>라고 생각한다. 나는 일본의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연예인들이 <달려라 메로스>를 언급하는 장면을 하도 많이 봐서 언젠가 원작을 읽어보려고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2022년 민음사 판으로 읽게 되었다. (속 시원...) 


알고 보니 <달려라 메로스>는 장편이 아니라 (이 책 기준) 열일곱 쪽 남짓한 단편이다. 심지어 다자이 오사무 원작도 아니고 독일 시인 실러의 장편 시 <인질>이 원작이라고. <달려라 메로스>는 폭군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사형을 선고받은 메로스가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친구를 대신 인질로 세우고 고향에 다녀온다는 내용이다. "기다리는 몸이 괴로울까? 기다리게 하는 몸이 괴로울까?"라는 명대사는 이 소설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자이 오사무가 실제로 겪은 일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이 책의 전반부에는 <달려라 메로스>를 비롯한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 단편들이 실려 있고, 후반부에는 일본의 전래 동화를 다자이 오사무의 문체로 각색한 <옛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 다자이 오사무가 십여 년의 도쿄 생활을 회고하면서 쓴 자전적 소설 <도쿄 팔경>이 참 좋았다. 기뻤던 일도 슬펐던 일도, 좋았던 일도 나빴던 일도, 나중에 돌이켜 보면 모두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으로 마음에 남고, 그것들이 결국 하나의 생[一生]으로 정리된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해주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키7 미키7
에드워드 애슈턴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타니스와프 렘의 책을 읽다가 결국 포기했다. 책 읽다가 포기한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SF 소설은 완독을 못하는 경우가 유독 많다. 소설인데 소설 같지 않고 과학 같은 이 느낌... 근데 <미키7>은 괜찮았다. 너무 재밌어서 한 번에 다 읽었다. SF 소설 잘 못 읽는 사람도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이 찬사로 들릴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이런 기분. <마션> 이후 오랜만이야... 


주인공 미키는 거액의 빚을 지는 바람에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복제인간 '익스펜더블'이 되어 우주 개척단에 참가하게 된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능력 때문에 온갖 위험한 임무를 떠맡는 미키. 그렇게 미키1, 미키2, 미키3, 미키4, 미키5, 미키6이 죽고, 미키7이 어느 날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얼음 구덩이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한다. 미키7이 죽었다고 생각한 베르토는 미키8의 재생성을 요청하는데, 다음날 미키7이 베르토 앞에 나타난다. 미키7이 죽지 않고 미키8과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본부에 알려지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데... 


똑같이 생긴 미키7과 미키8이 (사실은 둘이지만) 한 사람인 척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다는 점에서 영화 <페어런트 트립>이 생각나기도 했다(<페어런트 트립>은 쌍둥이 자매가 한 사람인 척하는 내용이다).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도 나오는 걸 보면 인간과 그를 복제한 복제인간은 동일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걸로도 볼 수 있는데, 미키7과 미키8이 제한된 식량을 두고 다투는 모습이나 각자 다른 여자에게 끌리는 모습을 보면 적어도 작가는 둘이 다른 인격이라고 보는 듯하다. <미키7>은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 <미키17>의 원작 소설로도 알려져 있다. 


<미키7>에서 미키는 빚 때문에 익스펜더블이 되고, 익스펜더블이 된 후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능력 때문에 개척단 사람들로부터 노예나 머슴처럼 부림을 당한다. 복제인간을 만들고 우주 개척을 할 만큼 기술이 발전해도 부의 불평등, 계급 차별 같은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아찔하고 참담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선 이런 문제들이 어떻게 그려졌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품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그저 출판사(문학동네)에 대한 신뢰로 구입한 책이다. 표지를 열고 나서야 작가가 칠레 사람이고(루이스 세풀베다 이후 칠레 작가의 책을 읽는 게 참으로 오랜만) 일반적인 소설이 아닌 과학 논픽션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과학이라는 단어 때문에 약간의(사실은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졌으나 2021년 부커상 최종심에 올랐다는 문구에 마음을 달래며(재미가 없어도 대체 어떤 소설이 부커상 최종심에 오르는지 보기라도 하자) 다음 장을 넘겼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 너무 재밌었음. 


이 책에는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프러시안블루라는 안료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시안화물이라는 인체에 치명적인 화합물이 탄생했고, 이는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죽이기 위한 독가스를 생성하는 데 이용되었다. 한편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독가스 공격을 주도한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공기 중에서 질소를 추출해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그가 발견한 질소 덕분에 비료 혁명이 이루어져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과학자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할 답을 찾는 과정에서 그의 목적이나 의도와는 다른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살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에 부담감을 느끼고 과학계를 떠나거나 아예 세상과 등지는 인물들도 있다. 


때로는 문제의 답을 찾은 후 더욱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양자역학이다.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는 각각 행렬역학과 파동방정식을 이용해 고전물리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했으나 각자의 방식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서로에 대한 공격과 반박을 한참 동안 거듭한 끝에야 알아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학자의 모습처럼) 연구실 책상 앞에 앉아 문제만 들여다 보지 않고, 전화통을 붙들고 스승에게 징징대거나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자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면서 천재도 별 수 없구나(평범한? 인간이구나) 싶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